프로젝트 X - 27부
관리자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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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9 00:52
회의를 마치고 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비서역할을 하도록 아르바이트로 고용했던 미숙이 반갑게 인사하면서 문을 열었다. 쇼파에 앉아 탁과장에게 잘 다냐왔노라고 전화를 하는 사이에 미숙은 김이 모락모락 피오나는 뜨거운 커피 잔을 내 앞에 내려 놓고 가지런히 다리를 모아 그 옆에 서 있다.
"그래, 나 없는 동안 별일은 없었지?"
"네, 박사님이 안계시는 동안 매일 출근했지만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어차피 내가 있더라도 미숙씨랑 놀아 줄 것도 아닌데..."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서 휴먼로봇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며 보냈어요."
"그래, 뭐 좀 얻어 냈것이라도 있나?"
"아뇨, 그저 그런 것들이었어요. 인터페이스에 관련한 정보들도 뒤적여봤는데 워낙 어려워서 이해할 수도 없었구요."
"그랬구나. 이해할 수 없더라도 로봇에 관심이 있다면 헤치고 지나가야할 길이지."
"로봇이라고 해서 대단한 프로세스를 쓸 줄 알았는데, 마이크로컨트롤러의 결합인 것 같아요."
"그렇지. 제각각의 기관들은 마이크로컨트롤러가 독립적으로 일하는거야. 그걸 메인컨트롤러가 통제할 수 있도록 양방향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거지."
"저는 어떤 걸 공부해야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나요?"
"미숙이가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는 없겠지만 관심이 있다면 아주 작은 단위의 마이크로프로세스 제어에 관심을 가지는게 좋겠군."
"그럼 디바이스를 다루는 드라이버를 공부하면 되나요?"
"그렇지.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분야지만 오히려 여자들이 차분하게 접근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드라이버는 어셈블리로 제어하는데 아직 수학적 기초가 부족해서 힘들어요."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부족하다 싶은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해봐."
"일반수학은 자신있는데, 공학수학은 너무 벅차서 몇 번이나 팽기쳤어요."
"누구나 똑 같은 경험을 하지. 수학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해봐."
"그게 그거죠. 어차피 어렵거든요."
"십진수적인 개념으로 접근하지 말고 이진수로 모든 수리적 계산을 해봐."
"어휴, 그건 더 힘들어요."
"아닐꺼야. 어차피 컨트롤러는 이진수 밖에 없잖아. 온과 오프라고 할까? 반복적인 두 개의 신호만으로 적분도 거뜬히 해내는 놈이 신기하지 않아?"
"빠르니까 가능한거죠?"
"글쎄요. 수학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논리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가? 진리값이라는 걸 알지?"
"네, 진리표는 중학교 수준 이잖아요."
"그래, 미숙이가 수학을 수학으로만 여기고 공식만 외웠던거야. 그 진리표엔 엔드와 오알이라는 개념이 있었지? 그게 컨트롤러 속에 가득 들어있는것이거든. 수학이라는 딱딱한 학문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냥 모든 현상을 온과 오프만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끝없이 흐르는 물이나 공기라고 생각해봐. 그런다음에 뭘 얻고자 하는가에 따라 어떤 특별한 조건을 설정하게 되겠지? 가령 물이라도 먹는물 씻는 물이 있고 공기라고 하더라도 산소, 질소, 탄소 등과 같이 필요에 따라 채집하는 방법을 달리하듯이 온과 오프의 흐름 속에 특정조건을 넣어주면 그 조건에 맞아 떨어지는 어떤 값을 얻게 되겠지. 그것이 수학이야."
"아휴, 더 어려워요."
"흐르는 것과 걸러내는 것은 다시 엔드와 오아 조건으로 세분하면 효율성이 높아질테고 어떤 사람들은 엔드와 오아는 다른 것이라고 믿고 있겠지만 두 가지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분리된 것일 뿐이고 사실은 같은 결과를 얻게되지. 그것이 또한 수학이야."
"포기해야겠어요. 너무 어려워서."
"약한 소리하지 말고, 여태까지 배운 수학을 따로 따로 분리하지 말고 연관선상에 올려놔봐. 각각의 과정들이 공식들로 가득차 있다면 아낌없이 모두 지워버리라고. 수학은 공식이 아니라 논리의 결과이여야 하거든."
"공식을 알면 금방 풀리는 수학인데 그걸 버리라고요?"
"공식은 시험문제를 풀때는 속도를 높여주지만 철학을 할 때는 맹숭맹숭 답만 떨궈주는 나쁜 도구일 뿐이야. 적어도 로봇을 생각하고 컨트롤러에 접근하려면 여태까지 배운 과정을 생각하며 외웠던 공식을 과감하게 버려야하지. 미분과 적분을 이진수로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려면 과거의 기억을 잊어야하는거야."
"잘 이해는 안되요. 하지만 박사님이 저를 위해 어떤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알겠어요."
"우리네 교육제도에 문제가 있었어.
문제를 더 많이 풀도록 방법을 가르쳤지만 한 문제를 풀더라도 왜 그런 결과에 도달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죽여 버렸지."
"그럼 박사님은 수학 공식을 안쓰나요?"
"공식은 안쓰고 부호는 사용하지."
"한 문제를 풀더라도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겠네요?"
"아주 쉽지. 오히려 공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철학적이될 수 있으니까."
"그럼 공식은 왜 만들어 놓은거죠?"
"문제를 이해한 사람이 다시 동일한 문제를 만났을 때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답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지.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 공식만 외워서 대입한 다음에 답을 얻어 낸다면 그것은 정말 남의 인생을 복사해서 사는 꼴이되고 말꺼야."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모든 사람이 수학과 동떨어진 삶을 살텐데 그들 모두가 철학적 관점에서 수학적 결과를 얻게 하는 것 보다는 과정에 필요한 만큼만 공식을 외우도록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했을 것 같으니까요."
"옳은 얘기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달라. 적어도 수학이라는 것은 따로 있는 학문이 아니라 일상 생활속에 흐르는 학문이야. 가령 차를 몰 때 계기판에 속도계를 보거나 기름 잔량을 표시하는 아날로그 신호를 볼 수 있잖아. 몇몇 사람들은 속도계와 계이지를 만들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그냥 읽고 해석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값으로 인지하면 되지. 다리를 건널 때 입구에 써 있는 길이를 보면서 걷는 것 보다는 계속 걷다보면 도착하는 결과만 얻어도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다리를 통과하는 차량수를 예상하고 그 차량이 동시에 올려질 무게를 계산해서 그 무게를 견딜 교각을 계산해 내거나 힘을 분산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일들이 모두 일상에 있지. 차를 몰고가다가 구부러진 길을 만났을 땐 적당한 각도로 핸들을 돌리면 자연스럽게 회전하지만 갑작스럽게 만난 도로의 구부러진 면을 만나서 나뒹굴어 버리는 차들도 있어. 그들은 수학과 물리에 무지한 사람들일텐데 그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것은 길을 설계한 사람이 수학적 관점에서 있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달라지는거야."
"논점을 모르겠어요. 수학을 해야하거에요 아니면 이용만 하면 되는거에요?"
"길을 가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 다르지. 가령 그냥 길만 갈 사람은 수학까지는 안해도 돼. 게이지를 보고 해석할 능력까지만 있으면 되겠지. 길을 만드는 사람은 달리는 사람의 주행속도와 꺽어질 각도를 예상해서 한번 핸들을 돌렸으면 더 이상 어떤 조작도 하지 않더라도 무사히 꺽인 도로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계하는 수학적 능력이 필요한거지."
"제가 마이크로컨트롤러에 관심이 있는 이상은 수학에 몰입해야 한다는 말씀이죠?"
"그래. 네가 관심있는 분야가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수학적 관점을 바꿔야 하는 것이지. 예전에 알고 있던 모든 공식을 버리고 예전부터 알고 있던 수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논리를 구성해야 하는거야."
"그런데 교수님들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죠?"
"어차피 대량 생산되는 학생들에게 얘기해봤자 입만 아플테니까 포기한거지."
"그래도 박사님과 같이 말해주면 몇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몇번은 시도해봤겠지.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었던 경험에 의해 포기했을테고."
"저는 가능성이 있나요?"
"그건 나도 모른다. 다만 네가 걸어왔던 길이 기초가 탄탄하면 수학적 난관을 이해할 수 있을테고 그렇지 않고 공식에 의존해왔고 왜 그걸 버려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라도 별수 없는 일반인이 되고 말테니까."
"좋아요. 박사님의 말씀대로 공식을 잊도록 노력해 볼께요."
"그렇다면 너에게도 작은 희망은 남겠군."
미숙이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않든 내 몫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학생에겐 기대할 다른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여자와 남자라는 동물적 분류 보다는 어떤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가에 따라 차별없는 대우를 하는 내게 모순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차 한잔 더 드릴까요?"
"아냐, 어린 네게 준비도 없이 수학적 얘기를 해서 머리가 아프겠구나."
"특별할 것 같았어요. 적어도 박사님을 모시고 있으면 다른 뭔가의 느낌을 얻을 것 같았거든요."
"그랬어?"
"제가 처음 도서실에서 박사님을 뵈었을 때도 느낌이 왔었어요. 이렇게 저희 교수님과 함께 일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되어 더 기쁘구요."
"황교수가 너에겐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더라."
"아르바이트 자릴 구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권하더라구요. 박사님을 도와주라고."
"난 커피 심부름 하는 아가씨가 필요했을 뿐이야."
"어머, 절 그럼 인정하지 않는건가요?"
"하기 나름이지. 지금 당장은 엄청 좋아하는 커피를 맘껏 마시고 싶을 뿐이니까."
"어떻게 하면 박사님 맘에 들까요?"
"난 네가 자라온 교육환경을 모르잖니. 그러니까 짧은 시간에 널 위한 어떤 프로그램도 할 수 없단다."
"제가 다 말할께요. 아까 박사님이 말씀하신 수학적 관점부터 수정할테니 저를 위해 많은 얘길 해 주세요. 저의 새로운 호기심이 된 로봇에 관한 것도 아르켜주시고요."
"넌 자유분망하게 살도록 자랐지?"
"엄격하게 자랐어요."
"남자랑 동거한다는 소문이 돌던걸?"
"동거한다고 섹스까지 하는 것은 아니에요. 경제적 부담을 나눈 것 뿐인걸요."
"너에 대한 소문 속엔 동거하고 있다는 것도 포함된 것은 치명적일텐데."
"남의 눈엔 옳지 않게 보일지는 몰라도 필요에 의해 동거하는 것이라 개의치 않아요."
"너도 주관이 뚜렷하니까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학생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돌고 교수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경제적 이익보다 다른 손실이 더 많을꺼다."
"동거한다고 소문낸 애들도 쿠린데가 많은 걸요. 오히려 저에 대한 나쁜 소문속에 자신들의 저질스런 행동을 감추는 술수만 있을 뿐이라는 걸 알아요."
"그렇게 이용당하는 것보다 당당하게 사는 방법을 찾지 그러니?"
"저는 당당해요. 정말 누가 뭐라해도 동거를 파기할 생각도 없고요."
"사생활까지 간섭해서 미안하구나. 알았다."
"박사님도 제 생각을 이해하지 않는건가요?"
"관여할 필요가 없겠지. 다만 황교수도 알고 있으니 딱해서 하는 말이다."
"제가 어떻게 사는지 박사님께 보여주고 싶어요."
"설마 나까지 그 동거 속에 포함시키려는 것은 아니지?" 나는 웃으며 미숙의 제의를 가볍게 거절했다.
미숙은 자신의 생활이 남에 의해 간섭당하는 것에 대한 실망의 빛을 보이며 총총히 자신의 자리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찌보면 사람들은 속사정을 모른채 드러난 모습만으로 평가하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연히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을 논하며 거창한 수학적 철학을 논하며 슬그머니 미숙의 동거로 이야기를 틀어버린 나의 어리석음에 젊은 여자는 또 한번 실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직 회사일이 맡겨져 있지 않았으므로 딱히 밀린 일도 없지만 일주일의 공백을 딛고 그동안 연구자료를 축적한 팀원들이 작성한 프로젝트 결과물에 손을 얹었다. 빼곡한 글자와 그림들로 가득한 설계도를 통해 분발하며 일한 사람들의 노고가 느껴졌다.
"행님요, 오늘 저녁 한턱 쏘이소." 오후가 되자 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옳다만 회사 스케쥴이 어찌됐는지 모른다."
"하모, 나랑 쏘주 한잔도 안한다 이겁니꺼."
"아니다. 내사 회장의 일정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후딱 알아보고 전화주이소."
창밖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미숙도 근무시간이 다 되가는지 서랍을 정리하며 덜그덩 소리를 내고 있다. 전화를 들어 숙의 일정을 묻는 것 보다는 직접 대면하는 것이 낫겠다 싶다.
"미숙씨, 시간되면 퇴근해라."
"네, 박사님."
황회장 문앞에 이르자 비서가 문을 열어 준다.
"숙아, 탁이가 보자는데 괜찮을까?"
"어머, 탁과장이랑 연락 됐어요?"
"응, 아침에 한번, 조금 전에 또 한번."
"어쩌지? 사장단과 임원들이랑 회식하는게 좋겠는데?"
"그럼 그냥 가라할까?"
"보고 싶기도 하고..."
"함께 참석 시킬까?"
"어휴, 어떻게 남의 회사 직원을 임원들 회식에 참석시켜?"
"그럼 어쩌지? 내가 빠져서 탁이랑 마시고 있을까?"
"말도 안된다. 당신이 빠지면 내가 뭐가 되는데?"
"거참, 낼 보자하지 뭐."
"아니면, 명옥씨랑 우리 집에 먼저 가 있으라고 해요. 얼른 끝내고 만나면 되잖아."
"그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자 이거군."
탁과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명옥과 함께 양수리 집으로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한 후 숙과 함께 임원들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
"박사님, 한 잔 받으시죠."
"아~ 얘, 주십시오."
임원들은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나를 위해 아낌 없이 시간을 내 주었다.
"교수님인 회장님 덕분에 박사님까지 그룹에 포진했으니 명실상부한 첨단기술회사로 거듭나야겠죠?"
"그렇게 될껍니다."
"이 나라에선 뭔가 개발해서 먹고살 분위기가 아니던데 괜찮을까요?"
"어차피 우린 글로벌 기업이 될 겁니다. 이 좁은 땅에서 아등바등 거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만 주신다면 더 없이 고맙지요."
"하하, 앞 날을 장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줄은 알지만 이번 프로젝트 건만으로도 이 회사의 미래는 밝다고 봅니다. 믿어 보십시오."
주식이 오를 것이라는 생각에 임원들은 다소 들뜬 분위기 속에서 회식을 마쳐가고 있다.
황회장과 내가 회식자리에서 일어서고 총무부장이 계산을 마치는 사이에 임원들도 문을 나서며 두 사람이 함께 차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회장 전용기사가 있어도 부끄러운 마음에 이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지금은 꺼리김없이 기사를 이용하게 되었다. 숙도 혼자 몰아대던 차 대신 당당하게 기사를 쓰고 있는 현실에 대한 만족을 느낄 수 있을까?
"오늘 우리집에 손님들이 많으니까 박기사는 우릴 내려주고 돌아가세요."
"네, 회장님."
탁과 명옥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양수리 집은 환한 불빛을 내 뿜고 있었다. 세퍼트 들도 오랜만에 만난 나를 보고 컹컹 짖으며 반가워한다. 특별히 준비한 것도 없을 빈 집에 손님들만 있겠다 싶어 걱정이 됐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임시로 마련된 식탁과 진수성찬의 음식들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언제 준비했어?"
"탁과장이 온다고 해서, 호텔 부풰를 불렀어요."
"그럼 이게 모두 호텔음식이야?"
"그래요. 미국에서도 했으니까 여기서도 해야죠."
"우와, 탁아 너 땡잡았다."
"머가예, 당연한거지예."
"짜슥아, 황교수가 얼마나 깍쟁인데...."
"황교수님 결혼을 축하 드려요." 명옥이 한 발 나서며 축하의 말을 건냈다.
"지도예, 교수님이랑 행님의 결혼을 축하드려예." 탁과장이 나서며 선물 꾸러미를 건낸다.
"뭐야?"
"콘돔 아님니꺼."
"뭐? 콘돔?"
"나이도 있고 한데 애 배면 어쩔라구예."
"그래, 내가 너에게 선물한걸 그대로 싸왔단 말이지?"
"아임더. 새로 산겁니더."
"딴 선물은 없냐?"
명옥이 허리를 굽히며 가져온 선물 보따리를 내 밀었다. 하얀 백합과 빨간 장미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꽃 바구니였다.
"언제 이런 걸 준비했어?"
"언니, 아름답게 사세요."
"그래, 너도 잘 살고."
식탁 위에 있는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며 숙은 음식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며 조금 전 회식자리에서 궃이 음식을 사양하던 숙과는 달리 마구 먹어버린 내 배를 원망해야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배를 조금 남겨뒀어야 했는데 숙과 명옥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은근히 부아가 솟아 죄없는 포도주 잔만 연신 부어 마시고 말았다.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해요."
"어머, 그래도 돼요?"
"술 먹고 운전할 생각이었어?"
"아뇨, 요즘 대리운전이 많잖아요."
"여긴 오지라서 불러도 안와요. 맘껏 먹고 마시고 편히 자다가 낼 아침에 출근해요."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탁은 내게 잔을 부딪히며 웃음을 띄었다. 아마도 지난 날 술에 떡이 되어 잠에 떨어졌던 기억을 해 낸 것 같다. 명옥도 부끄러운지 연신 술 잔을 매만지며 화기애애한 피로연은 익어만 갔다. 밤이 깊어지고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점차 옅어 질 때까지 네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로 밤을 밝히고 있다.
"탁아, 우린 신혼이니까 먼저 들어가서 자라."
"우찌예, 우리도 신혼입니더."
"알았어. 더 늦으면 낼 아침에 못일어나니까 이만 끝내자."
"설겆이라도 할까요?"
"아냐, 낼 호텔에서 청소해 줄꺼야."
"어머, 그런것도 해줘요?"
"집사 할아버지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서 방에 들어가."
명옥과 탁을 방에 들여 보내고 우리도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결혼이후 처음으로 집에서 맞이하는 합방이구나 싶다. 서둘러 옷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섰다. 뜨거운 물줄기가 온 몸을 적신다. 부드럽게 안겨드는 숙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다.
"그래, 나 없는 동안 별일은 없었지?"
"네, 박사님이 안계시는 동안 매일 출근했지만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어차피 내가 있더라도 미숙씨랑 놀아 줄 것도 아닌데..."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서 휴먼로봇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며 보냈어요."
"그래, 뭐 좀 얻어 냈것이라도 있나?"
"아뇨, 그저 그런 것들이었어요. 인터페이스에 관련한 정보들도 뒤적여봤는데 워낙 어려워서 이해할 수도 없었구요."
"그랬구나. 이해할 수 없더라도 로봇에 관심이 있다면 헤치고 지나가야할 길이지."
"로봇이라고 해서 대단한 프로세스를 쓸 줄 알았는데, 마이크로컨트롤러의 결합인 것 같아요."
"그렇지. 제각각의 기관들은 마이크로컨트롤러가 독립적으로 일하는거야. 그걸 메인컨트롤러가 통제할 수 있도록 양방향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거지."
"저는 어떤 걸 공부해야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나요?"
"미숙이가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는 없겠지만 관심이 있다면 아주 작은 단위의 마이크로프로세스 제어에 관심을 가지는게 좋겠군."
"그럼 디바이스를 다루는 드라이버를 공부하면 되나요?"
"그렇지.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분야지만 오히려 여자들이 차분하게 접근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드라이버는 어셈블리로 제어하는데 아직 수학적 기초가 부족해서 힘들어요."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부족하다 싶은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해봐."
"일반수학은 자신있는데, 공학수학은 너무 벅차서 몇 번이나 팽기쳤어요."
"누구나 똑 같은 경험을 하지. 수학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해봐."
"그게 그거죠. 어차피 어렵거든요."
"십진수적인 개념으로 접근하지 말고 이진수로 모든 수리적 계산을 해봐."
"어휴, 그건 더 힘들어요."
"아닐꺼야. 어차피 컨트롤러는 이진수 밖에 없잖아. 온과 오프라고 할까? 반복적인 두 개의 신호만으로 적분도 거뜬히 해내는 놈이 신기하지 않아?"
"빠르니까 가능한거죠?"
"글쎄요. 수학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논리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가? 진리값이라는 걸 알지?"
"네, 진리표는 중학교 수준 이잖아요."
"그래, 미숙이가 수학을 수학으로만 여기고 공식만 외웠던거야. 그 진리표엔 엔드와 오알이라는 개념이 있었지? 그게 컨트롤러 속에 가득 들어있는것이거든. 수학이라는 딱딱한 학문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냥 모든 현상을 온과 오프만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끝없이 흐르는 물이나 공기라고 생각해봐. 그런다음에 뭘 얻고자 하는가에 따라 어떤 특별한 조건을 설정하게 되겠지? 가령 물이라도 먹는물 씻는 물이 있고 공기라고 하더라도 산소, 질소, 탄소 등과 같이 필요에 따라 채집하는 방법을 달리하듯이 온과 오프의 흐름 속에 특정조건을 넣어주면 그 조건에 맞아 떨어지는 어떤 값을 얻게 되겠지. 그것이 수학이야."
"아휴, 더 어려워요."
"흐르는 것과 걸러내는 것은 다시 엔드와 오아 조건으로 세분하면 효율성이 높아질테고 어떤 사람들은 엔드와 오아는 다른 것이라고 믿고 있겠지만 두 가지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분리된 것일 뿐이고 사실은 같은 결과를 얻게되지. 그것이 또한 수학이야."
"포기해야겠어요. 너무 어려워서."
"약한 소리하지 말고, 여태까지 배운 수학을 따로 따로 분리하지 말고 연관선상에 올려놔봐. 각각의 과정들이 공식들로 가득차 있다면 아낌없이 모두 지워버리라고. 수학은 공식이 아니라 논리의 결과이여야 하거든."
"공식을 알면 금방 풀리는 수학인데 그걸 버리라고요?"
"공식은 시험문제를 풀때는 속도를 높여주지만 철학을 할 때는 맹숭맹숭 답만 떨궈주는 나쁜 도구일 뿐이야. 적어도 로봇을 생각하고 컨트롤러에 접근하려면 여태까지 배운 과정을 생각하며 외웠던 공식을 과감하게 버려야하지. 미분과 적분을 이진수로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려면 과거의 기억을 잊어야하는거야."
"잘 이해는 안되요. 하지만 박사님이 저를 위해 어떤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알겠어요."
"우리네 교육제도에 문제가 있었어.
문제를 더 많이 풀도록 방법을 가르쳤지만 한 문제를 풀더라도 왜 그런 결과에 도달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죽여 버렸지."
"그럼 박사님은 수학 공식을 안쓰나요?"
"공식은 안쓰고 부호는 사용하지."
"한 문제를 풀더라도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겠네요?"
"아주 쉽지. 오히려 공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철학적이될 수 있으니까."
"그럼 공식은 왜 만들어 놓은거죠?"
"문제를 이해한 사람이 다시 동일한 문제를 만났을 때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답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지.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 공식만 외워서 대입한 다음에 답을 얻어 낸다면 그것은 정말 남의 인생을 복사해서 사는 꼴이되고 말꺼야."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모든 사람이 수학과 동떨어진 삶을 살텐데 그들 모두가 철학적 관점에서 수학적 결과를 얻게 하는 것 보다는 과정에 필요한 만큼만 공식을 외우도록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했을 것 같으니까요."
"옳은 얘기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달라. 적어도 수학이라는 것은 따로 있는 학문이 아니라 일상 생활속에 흐르는 학문이야. 가령 차를 몰 때 계기판에 속도계를 보거나 기름 잔량을 표시하는 아날로그 신호를 볼 수 있잖아. 몇몇 사람들은 속도계와 계이지를 만들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그냥 읽고 해석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값으로 인지하면 되지. 다리를 건널 때 입구에 써 있는 길이를 보면서 걷는 것 보다는 계속 걷다보면 도착하는 결과만 얻어도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다리를 통과하는 차량수를 예상하고 그 차량이 동시에 올려질 무게를 계산해서 그 무게를 견딜 교각을 계산해 내거나 힘을 분산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일들이 모두 일상에 있지. 차를 몰고가다가 구부러진 길을 만났을 땐 적당한 각도로 핸들을 돌리면 자연스럽게 회전하지만 갑작스럽게 만난 도로의 구부러진 면을 만나서 나뒹굴어 버리는 차들도 있어. 그들은 수학과 물리에 무지한 사람들일텐데 그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것은 길을 설계한 사람이 수학적 관점에서 있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달라지는거야."
"논점을 모르겠어요. 수학을 해야하거에요 아니면 이용만 하면 되는거에요?"
"길을 가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 다르지. 가령 그냥 길만 갈 사람은 수학까지는 안해도 돼. 게이지를 보고 해석할 능력까지만 있으면 되겠지. 길을 만드는 사람은 달리는 사람의 주행속도와 꺽어질 각도를 예상해서 한번 핸들을 돌렸으면 더 이상 어떤 조작도 하지 않더라도 무사히 꺽인 도로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계하는 수학적 능력이 필요한거지."
"제가 마이크로컨트롤러에 관심이 있는 이상은 수학에 몰입해야 한다는 말씀이죠?"
"그래. 네가 관심있는 분야가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수학적 관점을 바꿔야 하는 것이지. 예전에 알고 있던 모든 공식을 버리고 예전부터 알고 있던 수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논리를 구성해야 하는거야."
"그런데 교수님들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죠?"
"어차피 대량 생산되는 학생들에게 얘기해봤자 입만 아플테니까 포기한거지."
"그래도 박사님과 같이 말해주면 몇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몇번은 시도해봤겠지.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었던 경험에 의해 포기했을테고."
"저는 가능성이 있나요?"
"그건 나도 모른다. 다만 네가 걸어왔던 길이 기초가 탄탄하면 수학적 난관을 이해할 수 있을테고 그렇지 않고 공식에 의존해왔고 왜 그걸 버려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라도 별수 없는 일반인이 되고 말테니까."
"좋아요. 박사님의 말씀대로 공식을 잊도록 노력해 볼께요."
"그렇다면 너에게도 작은 희망은 남겠군."
미숙이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않든 내 몫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학생에겐 기대할 다른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여자와 남자라는 동물적 분류 보다는 어떤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가에 따라 차별없는 대우를 하는 내게 모순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차 한잔 더 드릴까요?"
"아냐, 어린 네게 준비도 없이 수학적 얘기를 해서 머리가 아프겠구나."
"특별할 것 같았어요. 적어도 박사님을 모시고 있으면 다른 뭔가의 느낌을 얻을 것 같았거든요."
"그랬어?"
"제가 처음 도서실에서 박사님을 뵈었을 때도 느낌이 왔었어요. 이렇게 저희 교수님과 함께 일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되어 더 기쁘구요."
"황교수가 너에겐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더라."
"아르바이트 자릴 구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권하더라구요. 박사님을 도와주라고."
"난 커피 심부름 하는 아가씨가 필요했을 뿐이야."
"어머, 절 그럼 인정하지 않는건가요?"
"하기 나름이지. 지금 당장은 엄청 좋아하는 커피를 맘껏 마시고 싶을 뿐이니까."
"어떻게 하면 박사님 맘에 들까요?"
"난 네가 자라온 교육환경을 모르잖니. 그러니까 짧은 시간에 널 위한 어떤 프로그램도 할 수 없단다."
"제가 다 말할께요. 아까 박사님이 말씀하신 수학적 관점부터 수정할테니 저를 위해 많은 얘길 해 주세요. 저의 새로운 호기심이 된 로봇에 관한 것도 아르켜주시고요."
"넌 자유분망하게 살도록 자랐지?"
"엄격하게 자랐어요."
"남자랑 동거한다는 소문이 돌던걸?"
"동거한다고 섹스까지 하는 것은 아니에요. 경제적 부담을 나눈 것 뿐인걸요."
"너에 대한 소문 속엔 동거하고 있다는 것도 포함된 것은 치명적일텐데."
"남의 눈엔 옳지 않게 보일지는 몰라도 필요에 의해 동거하는 것이라 개의치 않아요."
"너도 주관이 뚜렷하니까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학생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돌고 교수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경제적 이익보다 다른 손실이 더 많을꺼다."
"동거한다고 소문낸 애들도 쿠린데가 많은 걸요. 오히려 저에 대한 나쁜 소문속에 자신들의 저질스런 행동을 감추는 술수만 있을 뿐이라는 걸 알아요."
"그렇게 이용당하는 것보다 당당하게 사는 방법을 찾지 그러니?"
"저는 당당해요. 정말 누가 뭐라해도 동거를 파기할 생각도 없고요."
"사생활까지 간섭해서 미안하구나. 알았다."
"박사님도 제 생각을 이해하지 않는건가요?"
"관여할 필요가 없겠지. 다만 황교수도 알고 있으니 딱해서 하는 말이다."
"제가 어떻게 사는지 박사님께 보여주고 싶어요."
"설마 나까지 그 동거 속에 포함시키려는 것은 아니지?" 나는 웃으며 미숙의 제의를 가볍게 거절했다.
미숙은 자신의 생활이 남에 의해 간섭당하는 것에 대한 실망의 빛을 보이며 총총히 자신의 자리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찌보면 사람들은 속사정을 모른채 드러난 모습만으로 평가하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연히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을 논하며 거창한 수학적 철학을 논하며 슬그머니 미숙의 동거로 이야기를 틀어버린 나의 어리석음에 젊은 여자는 또 한번 실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직 회사일이 맡겨져 있지 않았으므로 딱히 밀린 일도 없지만 일주일의 공백을 딛고 그동안 연구자료를 축적한 팀원들이 작성한 프로젝트 결과물에 손을 얹었다. 빼곡한 글자와 그림들로 가득한 설계도를 통해 분발하며 일한 사람들의 노고가 느껴졌다.
"행님요, 오늘 저녁 한턱 쏘이소." 오후가 되자 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옳다만 회사 스케쥴이 어찌됐는지 모른다."
"하모, 나랑 쏘주 한잔도 안한다 이겁니꺼."
"아니다. 내사 회장의 일정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후딱 알아보고 전화주이소."
창밖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미숙도 근무시간이 다 되가는지 서랍을 정리하며 덜그덩 소리를 내고 있다. 전화를 들어 숙의 일정을 묻는 것 보다는 직접 대면하는 것이 낫겠다 싶다.
"미숙씨, 시간되면 퇴근해라."
"네, 박사님."
황회장 문앞에 이르자 비서가 문을 열어 준다.
"숙아, 탁이가 보자는데 괜찮을까?"
"어머, 탁과장이랑 연락 됐어요?"
"응, 아침에 한번, 조금 전에 또 한번."
"어쩌지? 사장단과 임원들이랑 회식하는게 좋겠는데?"
"그럼 그냥 가라할까?"
"보고 싶기도 하고..."
"함께 참석 시킬까?"
"어휴, 어떻게 남의 회사 직원을 임원들 회식에 참석시켜?"
"그럼 어쩌지? 내가 빠져서 탁이랑 마시고 있을까?"
"말도 안된다. 당신이 빠지면 내가 뭐가 되는데?"
"거참, 낼 보자하지 뭐."
"아니면, 명옥씨랑 우리 집에 먼저 가 있으라고 해요. 얼른 끝내고 만나면 되잖아."
"그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자 이거군."
탁과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명옥과 함께 양수리 집으로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한 후 숙과 함께 임원들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
"박사님, 한 잔 받으시죠."
"아~ 얘, 주십시오."
임원들은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나를 위해 아낌 없이 시간을 내 주었다.
"교수님인 회장님 덕분에 박사님까지 그룹에 포진했으니 명실상부한 첨단기술회사로 거듭나야겠죠?"
"그렇게 될껍니다."
"이 나라에선 뭔가 개발해서 먹고살 분위기가 아니던데 괜찮을까요?"
"어차피 우린 글로벌 기업이 될 겁니다. 이 좁은 땅에서 아등바등 거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만 주신다면 더 없이 고맙지요."
"하하, 앞 날을 장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줄은 알지만 이번 프로젝트 건만으로도 이 회사의 미래는 밝다고 봅니다. 믿어 보십시오."
주식이 오를 것이라는 생각에 임원들은 다소 들뜬 분위기 속에서 회식을 마쳐가고 있다.
황회장과 내가 회식자리에서 일어서고 총무부장이 계산을 마치는 사이에 임원들도 문을 나서며 두 사람이 함께 차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회장 전용기사가 있어도 부끄러운 마음에 이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지금은 꺼리김없이 기사를 이용하게 되었다. 숙도 혼자 몰아대던 차 대신 당당하게 기사를 쓰고 있는 현실에 대한 만족을 느낄 수 있을까?
"오늘 우리집에 손님들이 많으니까 박기사는 우릴 내려주고 돌아가세요."
"네, 회장님."
탁과 명옥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양수리 집은 환한 불빛을 내 뿜고 있었다. 세퍼트 들도 오랜만에 만난 나를 보고 컹컹 짖으며 반가워한다. 특별히 준비한 것도 없을 빈 집에 손님들만 있겠다 싶어 걱정이 됐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임시로 마련된 식탁과 진수성찬의 음식들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언제 준비했어?"
"탁과장이 온다고 해서, 호텔 부풰를 불렀어요."
"그럼 이게 모두 호텔음식이야?"
"그래요. 미국에서도 했으니까 여기서도 해야죠."
"우와, 탁아 너 땡잡았다."
"머가예, 당연한거지예."
"짜슥아, 황교수가 얼마나 깍쟁인데...."
"황교수님 결혼을 축하 드려요." 명옥이 한 발 나서며 축하의 말을 건냈다.
"지도예, 교수님이랑 행님의 결혼을 축하드려예." 탁과장이 나서며 선물 꾸러미를 건낸다.
"뭐야?"
"콘돔 아님니꺼."
"뭐? 콘돔?"
"나이도 있고 한데 애 배면 어쩔라구예."
"그래, 내가 너에게 선물한걸 그대로 싸왔단 말이지?"
"아임더. 새로 산겁니더."
"딴 선물은 없냐?"
명옥이 허리를 굽히며 가져온 선물 보따리를 내 밀었다. 하얀 백합과 빨간 장미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꽃 바구니였다.
"언제 이런 걸 준비했어?"
"언니, 아름답게 사세요."
"그래, 너도 잘 살고."
식탁 위에 있는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며 숙은 음식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며 조금 전 회식자리에서 궃이 음식을 사양하던 숙과는 달리 마구 먹어버린 내 배를 원망해야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배를 조금 남겨뒀어야 했는데 숙과 명옥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은근히 부아가 솟아 죄없는 포도주 잔만 연신 부어 마시고 말았다.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해요."
"어머, 그래도 돼요?"
"술 먹고 운전할 생각이었어?"
"아뇨, 요즘 대리운전이 많잖아요."
"여긴 오지라서 불러도 안와요. 맘껏 먹고 마시고 편히 자다가 낼 아침에 출근해요."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탁은 내게 잔을 부딪히며 웃음을 띄었다. 아마도 지난 날 술에 떡이 되어 잠에 떨어졌던 기억을 해 낸 것 같다. 명옥도 부끄러운지 연신 술 잔을 매만지며 화기애애한 피로연은 익어만 갔다. 밤이 깊어지고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점차 옅어 질 때까지 네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로 밤을 밝히고 있다.
"탁아, 우린 신혼이니까 먼저 들어가서 자라."
"우찌예, 우리도 신혼입니더."
"알았어. 더 늦으면 낼 아침에 못일어나니까 이만 끝내자."
"설겆이라도 할까요?"
"아냐, 낼 호텔에서 청소해 줄꺼야."
"어머, 그런것도 해줘요?"
"집사 할아버지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서 방에 들어가."
명옥과 탁을 방에 들여 보내고 우리도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결혼이후 처음으로 집에서 맞이하는 합방이구나 싶다. 서둘러 옷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섰다. 뜨거운 물줄기가 온 몸을 적신다. 부드럽게 안겨드는 숙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