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도록 아름다운 - 4부
관리자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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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1 04:39
04학번 정지현이었다. 자신의 마니또.
“예, 예?”
찬승은 잘 모르는 후배인데다가 너무나도 당황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했다. 그러자 지현은 맑게 웃는다.
“푸훗. 왜 존댓말하세요. 선배님은 명찰에 02학번이라고 적혀있고 전 명찰에 04학번이라고 적혀있는데요.”
찬승은 지현의 맑은 웃음과 아름다운 목소리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나 아까 낮에 본 그녀의 활달하고 터프한 모습이 떠올라 깜짝 놀란다. 도저히 지금의 모습과 낮의 모습은 매치가 되질 않았다. 찬승이 아무 말이 없자 지현이 말을 잇는다.
“여기서 혼자 뭐하세요? 안에서 안 노세요?”
지현의 말에 찬승은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야 자신의 신세를 깨닫고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아니…. 뭐 아는 사람도 없고…. 그냥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찬승은 반말이 잘 나오질 않는다.
“말 놓으셔도 되요. 제가 후배인걸요.”
“응, 응….”
찬승이 대답을 한 뒤 잠시간의 침묵이 돈다. 찬승은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잘 떠오르질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마니또 아닌가.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얘기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들킬 것 같았다. 하지만 찬승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지현이 먼저 입을 연다.
“옆에 앉아도 되죠?”
지현은 말을 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찬승의 옆에 앉는다. 그리곤 찬승을 보며 말했다.
“저 선배 알아요. 02학번 김찬승 선배죠?”
“나도 너 아는데…. 명찰에 써 있잖아.”
“에이…. 그런 거 말고요. 선배 민총, 형총 듣죠?”
지현의 말에 찬승이 놀란 듯 대답한다.
“어 맞아.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요. 저도 그거 듣는 걸요.”
지현의 말에 찬승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출석을 부를 때 정지현이란 이름이 있긴 있었던 것 같다.
“아아. 그렇구나….”
찬승이 또 그렇게 짧게 대답하자 지현은 맥이 풀렸다. 무언가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어도 찬승이 계속해서 짧게 답변을 하니 이어지질 않는 것이다. 지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에이. 재미없다. 선배 술 마실 줄 알아요?”
찬승은 지현의 입에서 재미없다는 소리가 나오자 뜨끔했으나 술 마실 줄 아냐는 질문에 대답해야했다.
“응…. 당연히 마실 줄 알지.”
“그럼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놀아요. 놀 사람 없으면 저랑 같이 놀아요.”
“그, 그래….”
찬승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현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숙소에 도착하자 지현은 소주 두 병과 약간의 안주를 가져오며 구석에 둘의 술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현의 동기인 듯한 남학생들이 몇 번 와서 그녀에게 같이 놀자고 했으나, 지현은 놀 사람이 있다면서 그들을 보낸다.
찬승은 그런 지현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그녀가 말하는 놀 사람이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자신을 챙겨주는 여자 후배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저렇게 예쁘고 청순한….
‘아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지금까지의 시련은 이런 축복을 내려주시기 위함이었군요.’
찬승은 눈까지 감고 연신 신에게 고맙다고 빌었다. 물론 찬승은 무신론자이다.
곧 숙소 구석에 조그만 술자리가 마련되자 찬승과 지현이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첫 잔을 따르자 지현은 독한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찬승이 그런 지현의 모습에 놀라 물었다.
“술 잘 마시니?”
“아뇨. 잘은 못 마시는데 좋아는 해요. 애들이 저 잘 취하니까 챙겨주느라 귀찮데요.”
찬승은 그런 지현의 말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자 지현이 그런 찬승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웃을 줄도 아네요?”
지현의 농담에 찬승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욱 크게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난 이렇게 잘 웃어.”
찬승의 과장된 행동에 지현도 웃음을 터트렸다. 찬승은 그런 지현의 웃음을 보며 행복함을 느꼈다.
‘아. 이것이다. 바로 내가 꿈꾸던 엠티. 이렇게 예쁜 여자 후배와 앉아서 술을 마시는 것!’
찬승은 역시 연합엠티를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나가려면 무언가 계속해서 말을 해야 한다. 찬승은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 낮에 축구 하는 것 봤어. 되게 잘 차더라? 축구부였니?”
찬승의 말에 지현이 고개를 흔든다.
“아뇨. 축구부는요. 그냥 운동을 좀 해서요.”
“운동? 무슨 운동?”
“태권도요. 4단이에요.”
지현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찬승은 뜨악하고 입을 벌렸다. 4단이라니…. 이렇게 예쁘고 청순하고 가녀린 여자애가…. 태권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4단이 대단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 강하구나 너….”
찬승의 당황한 듯한 표정과 말에 지현이 웃음을 터트린다.
“푸훗…. 강하긴요.”
찬승은 지현의 웃음에 머쓱해지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 맞다. 근데 왜 너보고 사람들이 전지현이라고 그래?”
찬승의 말에 지현의 얼굴이 붉어진다. 술기운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었다. 지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활발하고 당당한 태도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니 저는 그러지 말라고 그러는데 사람들이 자꾸 놀려서요. 닮았다고…. 아니! 제가 닮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데도 계속 놀리니까 이젠 그냥 아무 말 안 해요.”
찬승은 그런 지현의 태도가 무척이나 귀엽고 청순하게 느껴졌다. 아까의 당당한 태도가 싹 사라진 부끄러워하는 저 얼굴과 자세…. 이렇게 보니 전지현과 정말 닮았다.
“내가 보기에도 정말 닮았는데. 예쁘네….”
찬승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런 찬승의 말을 들은 지현의 얼굴은 귀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예엣? 아녜요! 무슨….”
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찬승은 그런 그녀의 태도가 참 순수하고 겸손하다고 생각되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밝고 당당하면서 이런 얘기에는 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찬승 역시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의 생각을 말했기 때문에 당황하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둘 다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는데, 지현이 고개를 들더니 찬승에게 물었다.
“아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셨는데 학교 혼자 다니세요?”
“응. 뭐 02학번 여자애들은 거의 4학년이고 남자애들은 아직 제대 안했고…. 같이 다니는 애들이 없지…. 그래서 이번에 사람들이랑 친해지려고 엠티 왔는데 친해지지도 못하고.”
“저랑 친해졌잖아요.”
지현의 말에 찬승이 웃었다.
“말이라도 고마워.”
“아녜요. 선배 형총, 민총 오전 수업 같이 들으니까 그거 들을 때 학교 같이 올라가요. 그거 끝나면 점심시간이니까 점심도 같이 먹고!”
지현의 말에 찬승은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저, 정말? 그, 그럴까?”
“예. 여기 전화번호 찍어주세요. 먼저 온 사람이 줄 서서 기다렸다가 같이 올라가요.”
지현은 찬승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찬승은 지현의 핸드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하면서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자신에게 매일은 아니지만 학교에 같이 가고 함께 점심을 먹을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예쁘고 아름답고 착한 후배와! 찬승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찬승이 번호를 찍어서 건네주자 지현이 받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 술 마시며 재밌게 놀아요.”
그러면서 지현은 다시 찬승과 건배를 하며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지현이가 술이 상당히 약했던 것이다. 한 병도 다 못 비운 지현은 혼자 연신 실실 거리면서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했다.
“술 그만 마시자….”
당황한 찬승은 지현에게서 술잔을 빼앗으려 했지만 그녀의 재빠른 행동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지현은 연신 웃으면서 찬승에게 말한다.
“으헤헤헤…. 왜요. 왜요. 선배 저랑 친해졌으면 재밌게 놀아야죠.”
“아니 너 많이 취했….”
찬승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막 쓰러지려는 지현을 붙잡기 위해 일어나자 갑자기 한 무리의 학생들이 지현을 둘러쌌다. 지현의 동기로 보이는 듯한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었다. 남학생들은 술에 취해 쓰러진 지현을 부축하며 일으켰고 여학생들은 찬승을 혐오스런 눈길로 쳐다봤다. 찬승은 그런 그녀들의 눈빛에서 쏟아져 나오는 강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늙은 변태 복학생 새끼가 어린 여자 후배 취하도록 술 먹이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내가 먹인 것도 아닌데….’
그러나 찬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지현은 잠자리가 있는 곳으로 옮겨졌고, 찬승은 그 술자리 구석에 쭈그리고 누워서 혼자 잠을 청했다.
*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나 대충 양치와 세수만 한 찬승은 가지고 온 모자를 푹 눌러 쓰며 생각했다.
‘결국 친해진 여자후배는 04학번 정지현 밖에 없네…. 아니지. 나만 친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걔는 그렇게 생각안 할 수 있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자 한숨이 푹 나온다. 엠티를 떠나올 때는 많이 친해져서 돌아가리라 생각했는데 결국 한 명이랑 짧은 대화와 술자리를 가진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찬승은 지현이 굉장히 예쁘고 청순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쳇…. 아쉽다….’
찬승은 지현이 떠나고 난 뒤 잠을 잔 것이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지는 소수의 인원들이 있을 것이고, 그 적은 인원들 틈에 끼면 분명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배 한 명 알았다고 방심한 것이 잘못이었다.
찬승은 아쉬운 마음에 숙소를 한 번 쳐다보고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뒷자리로 가면 남자 선배들과 앉을 것 같아 가운데쯤 창가자리에 털썩하고 앉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찬승은 아랑곳없이 그저 창밖만 바라보며 버스가 빨리 출발하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옆에 앉는 느낌이 난다. 고개를 슬쩍 돌려보자 길고 검은 생머리를 묶어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예쁜 여학생이다.
그 여학생이 찬승에게 웃음 지으며 말한다.
“앉아도 되죠?”
“어, 어…. 당연히 앉아도 되지.”
지현이었다. 찬승은 지현이 옆에 앉자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며 떨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현은 그런 찬승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맑게 웃으며 얘기했다.
“어제 죄송했어요. 세 잔 때부터 기억이 안 나네요. 제가 실수한 것 없죠?”
“응. 당연하지. 어제 재밌었어….”
찬승의 말에 지현이 다행이라는 듯 활짝 웃었다.
*
엠티에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피곤하기만 하다. 찬승도 지현도 정신없이 지쳐 잠들어 있었다. 가끔씩 눈을 뜬 찬승은 자신 쪽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다가 다시 바로 하는 지현을 아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어깨에 기대면 편안히 재워줄 텐데….’
그러나 지현이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다 아예 반대로 돌려버리는 모습을 보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조용하게 숨소리를 내며 잠을 자는 지현의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잠이나 더 자자….’
찬승도 몸을 창가 쪽으로 하며 잠을 청했다.
“선배. 학교에 도착했어요.”
너무나도 맑고 예쁜 목소리에 찬승은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그러자 자신의 반응을 보며 웃는 지현이 옆자리에 앉아 있다.
“아. 아. 그래….”
찬승은 지현의 뒤를 따라 허겁지겁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지현은 자기의 동기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동기들과 웃으면서 무언가 대화를 나눈다. 찬승은 그런 지현의 모습을 보며 부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나도 저렇게 같이 웃으며 얘기하면 좋을텐데….’
한참 부러워하는 찬승을 두고 과 학생회장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마니또 발표하겠습니다. 자신의 마니또는 자신이 들고 있던 쪽지에 적혀 있던 이름입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 터져 나온다. 종이에 적혀 있던 이름끼리 서로 마니또였던 것이다. 이런 유치한 장난이었지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찬승은 너무 놀라서 주머니에 꾸겨 두었던 종이를 꺼내 보았다.
[04 정지현]
‘그럼 나의 마니또도 정지현?’
찬승은 고개를 돌려 동기들과 웃고 있는 지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지현이 맑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인다. 자신이 마니또였다는 뜻이다. 찬승도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현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동기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찬승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저 애가 내가 마니또여서 그렇게 신경써준 거구나…. 쳇.’
찬승은 왠지 서글퍼졌다. 자신이랑 친해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마니또여서 잘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지현이란 아이랑 전혀 친분이 없는 사이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난 잘해준 것도 없네….’
문득 자신도 그녀의 마니또인데 잘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미안한 마음이 든다.
*
“다녀왔습니다.”
찬승이 집에 도착하자 현관에 동생의 신발이 보인다.
“서희 왔어요?”
찬승이 텔레비전을 보시는 어머니에게 묻자 고개를 돌려 서희 방을 쳐다보며 말했다.
“방에 누워있다.”
찬승이 서희의 방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가 없는 여동생의 방이라 이불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서희의 모습이 보였다. 찬승은 척 봐도 숙취에 괴로워하는 서희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술 많이 마셨냐?”
“응…. 어제 필름도 끊겼어.”
괴로운 듯한 서희의 말에 찬승이 놀란다.
“뭐! 필름이 끊겨! 아무 일도 없었고?”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아…. 근데 무슨 일 말하는 건데?”
아무것도 모르는 듯 그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는 서희의 모습에 찬승은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저 다음부터는 조금만 마시라는 주의를 줄 뿐이었다.
*
찬승은 다음 날 학교로 올라가는 버스에 타려고 긴 줄의 끝에 서자 지현이 떠올랐다. 연합엠티 때 했던 약속대로라면 월요일과 수요일에 학교를 같이 가게 된다. 오늘은 월요일. 그런데 연락이 없었다.
‘쳇…. 그러면 그렇지. 그냥 마니또 때문에 해본 말이구나…. 그런 말 했었는지 기억도 못할 거야.’
찬승은 무척 섭섭했다. 그래도 같이 갈 생각을 하며 내심 기대 했었는데 역시 연락이 오질 않는 것이었다. 점점 줄이 짧아지며 지현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고, 연락도 오질 않았다. 찬승은 결국 망설이다가 버스에 올라탔다. 사람들 틈에 껴서 손잡이를 잡자 천천히 출발하는 버스…. 그 버스에서 이리저리 살짝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는 찬승의 마음은 서운하기만 했다.
그때 찬승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린다. 꺼내보자 문자였다. 후배인 지현에게서 온 문자….
[선배 어디세요? 저 줄 서 있는데.]
“아, 아저씨! 스톱! 스톱! 세워주세요.”
두 정류장쯤 온 버스…. 찬승은 아저씨에게 소리소리를 지르며 버스를 세웠다. 아저씨의 욕을 들으면서도 찬승은 버스에서 뛰어내렸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정말 연락이 오다니…! 잊지도 않았고 빈말도 아니었어!’
찬승은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처음에 출발했던 정류장으로 뛰어 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는 핸드폰으로 급하게 문자를 찍어 보낸다.
[미안 나 거의 다 왔어. 금방 갈게!]
지현에게서 곧 답문이 온다.
[예. 저 줄 서 있을게요. 빨리 오세요.^^]
웃는다…. 지현이 웃는 이모티콘을 보낸 것이다.
“오예!”
찬승은 더욱더 힘을 내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줄을 서있는 지현의 모습이 보인다. 찬승은 그녀 앞에 멈춰서 숨이 차올라 죽을 것 같은 걸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미, 미안…. 늦었지.”
“아녜요. 지금 타고 가면 되요.”
“그, 그래….”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하는 지현을 본 찬승은 안심이 되어 뒤를 돌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버스에 올라타 나란히 앉자, 찬승은 그제야 지현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분홍색의 얇은 재킷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길고 검은 생머리와 어울려 너무나도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조금 타이트한 재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그리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았다. 가슴이 꽤나 작은 모양이었다.
찬승은 그런 지현의 예쁘고 청순한 모습을 보니 기쁨에 겨웠다
‘아아…. 나도 이제 월요일과 수요일은 이렇게 예쁜 여자 후배랑 가는 구나. 점심도 같이 먹겠지?’
찬승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지현아 고마워….”
“예? 뭐가요?”
찬승이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를 하자 지현이 이상한 듯 되물었다. 그러나 찬승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실실 웃으며 얼버무렸다.
*
처음으로 누군가와, 그것도 이렇게 예쁜 여자 후배와 함께 학교에 올라간 찬승은 지현이 자신의 동기들 옆에 앉는 것을 보고는 구석 자리에 홀로 앉았다. 지현은 고개를 돌려 그런 찬승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동기들이 찬승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동기들이 싫어하니 함께 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강의가 시작하고 찬승은 가끔씩 자신을 돌아보며 웃어주는 지현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혼자 앉게 하니 꽤나 미안했던 모양인지 수업시간 틈틈이 찬승을 신경 써 주는 것이다.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찬승이 지현을 바라보자 친구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 점심 때 무엇을 먹을까 이야기하는 모양이지…. 점심까지 같이 먹는 걸 바라는 건 역시 무리인가….’
찬승은 괜히 지현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조용히 강의실에서 나왔다. 왠지 기운이 없어져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뒤쪽에서 지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같이 가요.”
찬승이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는 지현의 모습이 보였다. 지현은 찬승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왜 혼자가요?”
“응…. 아 너 친구들이랑 먹는 줄 알고.”
“에이-! 같이 먹기로 했잖아요.”
지현은 맑게 웃음을 지으며 찬승의 등을 툭하고 친다. 찬승은 그런 지현의 돌발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 보면 버릇이 없는 행동일 수도 있으나 찬승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맑게 웃으며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그런 지현의 모습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구내식당에서 각자 밥을 시키고 마주 앉아 먹기 시작하자 금세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아니 찬승만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지현은 찬승이 앞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큼직큼직하게 밥을 떠서 먹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소량만 먹을 것 같은 청순가련 공주 스타일인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양 볼을 크게 부풀리며 정신없이 먹는 모습이 왜 저렇게 먹는데도 살이 찌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아니면 날 남자로 생각 안하는 건지도 모르지….’
찬승은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여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와 관심이 없는 남자 앞에서 하는 행동이 전혀 다르다고….
숟가락을 들 생각도 안하고 그런 지현의 모습을 보고 있자 어느새 눈이 마주쳤다. 지현은 입 안 가득 밥을 넣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선배 왜 안 먹어요?”
“응? 아 먹, 먹어야지.”
찬승은 그제야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 한 숟가락을 먹고 나자 무언가 궁금한 것이 생겨 지현에게 물었다.
“아까 친구들이랑 무슨 얘기하는 것 같던데….”
“점심 먹기 전에요?”
“응….”
찬승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현은 입에 있는 밥을 꼭꼭 씹고는 꿀꺽 삼키더니 갑자기 고개까지 젖히며 크게 웃는다.
“푸하핫-!”
“왜, 왜?”
찬승이 당황하여 묻자 지현이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후아-! 킥킥. 애들이 선배랑 밥 먹기 싫데요. 왠지 냄새날 것 같다나…. 그래서 저 혼자 선배랑 먹는 거죠.”
“…미안.”
찬승은 냄새라는 말에 심히 충격을 받았으나 내색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친구들이랑 밥을 먹지 못하는 지현에게 사과는 해야 했다. 허나 지현은 재빨리 손을 젓는다.
“아녜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다른 날은 매일 같이 먹는걸요.”
“그래….”
찬승은 지현의 말에 적이 안심을 하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냄새가 날 것 같다라…. 조심스레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고급스런 향수 냄새가 날리는 없지만 아무 냄새도 나질 않는다.
‘쳇…. 건방진 후배들….’
찬승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밥을 먹으며 더 이상의 별다른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밥을 열심히 먹던 지현도 그 정도까지 대화가 진행되질 않자 꽤나 어색했던지 밝지만은 아닌 표정이다. 찬승도 무언가 얘깃거릴 꺼내고 싶었지만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으 예전에는 이러질 않았는데….’
찬승이 속으로 끙끙 거리고 있을 때 지현이 무언가 생각난 듯 손바닥을 탁 친다. 찬승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배! 선배 싸이 하세요?”
“싸, 싸이? 그게 뭐야? 가수 말하는 건가?”
“….”
지현은 양 손을 마주친 채로 멍하니 찬승을 바라보았다. 약간은 굳어진 미소와 함께….
*
집에 돌아온 찬승은 재빨리 자신의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지현이 말해준 사이트로 들어가 보았다.
‘싸이월드? 이게 뭐야. 나 1학년 때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 안한다고 날 그렇게 놀리다니….’
찬승은 아직도 점심시간 때 지현의 웃음 섞인 놀림이 떠오른다. 세대차이라느니 촌스럽다느니 이래서 복학생은 다르다느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어색한 분위기가 꽤나 풀어졌지…. 흠흠. 어디보자 이걸 요새 그렇게 많이 한단 말이지?’
찬승은 그 사이트에 가입한 뒤 자신의 미니홈피를 개설했다. 그리고 지현이 알려준 주소로 그녀의 미니홈피로 들어가자 화면 한 구석에 작게 뜨는 그녀의 사진이 보였다. 특유의 맑고 환한 웃음을 얼굴 가득 짓고 있는 지현….
‘예쁘네….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일촌신청을 하라고 그랬는데….’
찬승은 지현의 말대로 일촌신청을 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뒤져도 그런 메뉴는 없었다. 그래서 웬일로 일찍 들어와 있는 동생을 부르기로 했다.
“서희야! 서희야!”
찬승이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고 크게 소리를 지르자 방문을 벌컥 열고 동생이 들어왔다.
“응?”
“잠깐 일로 와봐. 와서 얘한테 그 뭐냐…. 아. 일촌 신청 좀 해줘.”
“일촌? 오빠 싸이 해?”
컴퓨터로 다가와 마우스를 잡는 서희가 신기한 듯 묻자 찬승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하하하. 요새 싸이 안하는 사람도 있냐?”
그러나 서희는 찬승의 말에 신경도 쓰질 않고 모니터에 떠 있는 지현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우와! 예쁘다! 누구야? 여자친구?”
“아냐! 인마. 우리 과 후배야.”
“호오. 예쁜데….”
서희는 중얼 거리며 지현의 이름을 클릭하고 일촌신청을 했다. 그리고는 사진첩 메뉴를 누르더니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쳇. 일촌공개네. 음. 잠깐 나랑도 일촌 해야지 그럼.”
서희는 자신의 미니홈피로 들어가더니 일촌신청을 걸어 놓았다. 찬승은 처음 보는 동생의 미니홈피를 슬쩍 보자 방문자 수가 삼만 명을 넘어가고 있었다.
“흠. 인기 많군. 내가 곧 따라잡아주지.”
찬승의 말에 서희가 방에서 나가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헹…. 노력해보셔.”
찬승은 서희가 나가고 자신의 미니홈피를 자랑스럽게 둘러보았다. 썰렁하긴 했지만 오늘 처음 개설한 것이니 차차 꾸며나가면 될 것이다.
‘후후. 그래도 첫 날부터 일촌이란 게 두 명 이나 생겼군.’
찬승은 왠지 모를 뿌듯함에 사로잡혔다.
*
화요일은 같이 가는 사람도 없고 밥을 먹는 사람도 없다. 게다가 마주치는 사람 중에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찾을 수 없다. 찬승은 이럴 때 오히려 아영이라도 만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영은 얼굴이 일그러지더라도 자신을 쳐다봐주니까….
그러나 오늘 수요일은 다르다. 지현과 함께 학교를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헥헥…. 선배 오늘은 제가 늦었네요.”
지현이 뛰어 왔는지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쉰다. 점점 따뜻해지는 4월의 중순. 사람들의 옷차림도 조금씩 얇아져만 갔다. 지현도 하얀색 후드티에 얇은 검은색 재킷만을 걸친 간편한 차림이다.
“아냐. 나도 방금 왔는걸.”
찬승은 오늘이 지현과 같이 가는 두 번째 날이지만 이젠 조금씩 그녀와의 대화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지현의 밝고 활발한 성격도 둘의 사이를 친하게 해주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제 가입한 싸이월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버스에 올라타 나란히 뒷자리에 앉자 찬승의 눈에 들어오는 한 여자가 있었다.
‘천사…!’
분홍색의 귀여운 후드티에 검은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천사는 앉을 자리가 없자 버스 손잡이를 잡고 조용히 창밖을 보며 선다. 혹시 자리가 있는지 커다란 눈으로 흑진주처럼 맑은 눈동자를 굴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천사의 얼굴은 마치 호기심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아기의 얼굴과 같았다. 천사의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길고 검은 생머리가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검은색 미니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얼마나 하얗고 가는지 검은색의 스커트와 선명하게 대조될 정도였다.
‘아 정말 예쁘다….’
찬승은 넋을 잃고 천사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지현도 굉장히 예쁘다. 사람들에게 물어 둘을 비교하라면 50대 50으로 갈릴 것이다. 하지만 찬승의 눈에는 천사가 더욱 아름답게 비춰졌다. 그만큼 천사는 찬승에게 있어 꿈에서나 보던 이상형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천사랑 알고 지낼 수 없을까….’
찬승은 멍하니 그런 생각만을 하며 학교를 올라갔다.
강의실에서는 여전히 혼자 구석에 혼자 앉게 되었다. 가끔씩 동기들과 앉아 있는 지현이 찬승을 바라보며 웃어주는 것이 다였다.
점심시간에는 지현이 동기들과 떨어져 나와 찬승과 밥을 먹는다. 찬승은 그런 지현에게 미안해 괜찮다고 말해볼까 생각하다가 어제 혼자 먹은 점심이 떠올랐다.
‘그러고 싶진 않아….’
결국 찬승은 지현에게 미안해도 그녀와 밥을 같이 먹기로 했다. 여전히 지현은 밥을 잘 먹었다. 여자들은 보통
“예, 예?”
찬승은 잘 모르는 후배인데다가 너무나도 당황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했다. 그러자 지현은 맑게 웃는다.
“푸훗. 왜 존댓말하세요. 선배님은 명찰에 02학번이라고 적혀있고 전 명찰에 04학번이라고 적혀있는데요.”
찬승은 지현의 맑은 웃음과 아름다운 목소리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나 아까 낮에 본 그녀의 활달하고 터프한 모습이 떠올라 깜짝 놀란다. 도저히 지금의 모습과 낮의 모습은 매치가 되질 않았다. 찬승이 아무 말이 없자 지현이 말을 잇는다.
“여기서 혼자 뭐하세요? 안에서 안 노세요?”
지현의 말에 찬승은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야 자신의 신세를 깨닫고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아니…. 뭐 아는 사람도 없고…. 그냥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찬승은 반말이 잘 나오질 않는다.
“말 놓으셔도 되요. 제가 후배인걸요.”
“응, 응….”
찬승이 대답을 한 뒤 잠시간의 침묵이 돈다. 찬승은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잘 떠오르질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마니또 아닌가.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얘기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들킬 것 같았다. 하지만 찬승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지현이 먼저 입을 연다.
“옆에 앉아도 되죠?”
지현은 말을 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찬승의 옆에 앉는다. 그리곤 찬승을 보며 말했다.
“저 선배 알아요. 02학번 김찬승 선배죠?”
“나도 너 아는데…. 명찰에 써 있잖아.”
“에이…. 그런 거 말고요. 선배 민총, 형총 듣죠?”
지현의 말에 찬승이 놀란 듯 대답한다.
“어 맞아.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요. 저도 그거 듣는 걸요.”
지현의 말에 찬승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출석을 부를 때 정지현이란 이름이 있긴 있었던 것 같다.
“아아. 그렇구나….”
찬승이 또 그렇게 짧게 대답하자 지현은 맥이 풀렸다. 무언가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어도 찬승이 계속해서 짧게 답변을 하니 이어지질 않는 것이다. 지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에이. 재미없다. 선배 술 마실 줄 알아요?”
찬승은 지현의 입에서 재미없다는 소리가 나오자 뜨끔했으나 술 마실 줄 아냐는 질문에 대답해야했다.
“응…. 당연히 마실 줄 알지.”
“그럼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놀아요. 놀 사람 없으면 저랑 같이 놀아요.”
“그, 그래….”
찬승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현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숙소에 도착하자 지현은 소주 두 병과 약간의 안주를 가져오며 구석에 둘의 술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현의 동기인 듯한 남학생들이 몇 번 와서 그녀에게 같이 놀자고 했으나, 지현은 놀 사람이 있다면서 그들을 보낸다.
찬승은 그런 지현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그녀가 말하는 놀 사람이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자신을 챙겨주는 여자 후배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저렇게 예쁘고 청순한….
‘아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지금까지의 시련은 이런 축복을 내려주시기 위함이었군요.’
찬승은 눈까지 감고 연신 신에게 고맙다고 빌었다. 물론 찬승은 무신론자이다.
곧 숙소 구석에 조그만 술자리가 마련되자 찬승과 지현이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첫 잔을 따르자 지현은 독한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찬승이 그런 지현의 모습에 놀라 물었다.
“술 잘 마시니?”
“아뇨. 잘은 못 마시는데 좋아는 해요. 애들이 저 잘 취하니까 챙겨주느라 귀찮데요.”
찬승은 그런 지현의 말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자 지현이 그런 찬승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웃을 줄도 아네요?”
지현의 농담에 찬승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욱 크게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난 이렇게 잘 웃어.”
찬승의 과장된 행동에 지현도 웃음을 터트렸다. 찬승은 그런 지현의 웃음을 보며 행복함을 느꼈다.
‘아. 이것이다. 바로 내가 꿈꾸던 엠티. 이렇게 예쁜 여자 후배와 앉아서 술을 마시는 것!’
찬승은 역시 연합엠티를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나가려면 무언가 계속해서 말을 해야 한다. 찬승은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 낮에 축구 하는 것 봤어. 되게 잘 차더라? 축구부였니?”
찬승의 말에 지현이 고개를 흔든다.
“아뇨. 축구부는요. 그냥 운동을 좀 해서요.”
“운동? 무슨 운동?”
“태권도요. 4단이에요.”
지현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찬승은 뜨악하고 입을 벌렸다. 4단이라니…. 이렇게 예쁘고 청순하고 가녀린 여자애가…. 태권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4단이 대단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 강하구나 너….”
찬승의 당황한 듯한 표정과 말에 지현이 웃음을 터트린다.
“푸훗…. 강하긴요.”
찬승은 지현의 웃음에 머쓱해지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 맞다. 근데 왜 너보고 사람들이 전지현이라고 그래?”
찬승의 말에 지현의 얼굴이 붉어진다. 술기운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었다. 지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활발하고 당당한 태도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니 저는 그러지 말라고 그러는데 사람들이 자꾸 놀려서요. 닮았다고…. 아니! 제가 닮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데도 계속 놀리니까 이젠 그냥 아무 말 안 해요.”
찬승은 그런 지현의 태도가 무척이나 귀엽고 청순하게 느껴졌다. 아까의 당당한 태도가 싹 사라진 부끄러워하는 저 얼굴과 자세…. 이렇게 보니 전지현과 정말 닮았다.
“내가 보기에도 정말 닮았는데. 예쁘네….”
찬승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런 찬승의 말을 들은 지현의 얼굴은 귀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예엣? 아녜요! 무슨….”
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찬승은 그런 그녀의 태도가 참 순수하고 겸손하다고 생각되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밝고 당당하면서 이런 얘기에는 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찬승 역시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의 생각을 말했기 때문에 당황하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둘 다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는데, 지현이 고개를 들더니 찬승에게 물었다.
“아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셨는데 학교 혼자 다니세요?”
“응. 뭐 02학번 여자애들은 거의 4학년이고 남자애들은 아직 제대 안했고…. 같이 다니는 애들이 없지…. 그래서 이번에 사람들이랑 친해지려고 엠티 왔는데 친해지지도 못하고.”
“저랑 친해졌잖아요.”
지현의 말에 찬승이 웃었다.
“말이라도 고마워.”
“아녜요. 선배 형총, 민총 오전 수업 같이 들으니까 그거 들을 때 학교 같이 올라가요. 그거 끝나면 점심시간이니까 점심도 같이 먹고!”
지현의 말에 찬승은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저, 정말? 그, 그럴까?”
“예. 여기 전화번호 찍어주세요. 먼저 온 사람이 줄 서서 기다렸다가 같이 올라가요.”
지현은 찬승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찬승은 지현의 핸드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하면서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자신에게 매일은 아니지만 학교에 같이 가고 함께 점심을 먹을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예쁘고 아름답고 착한 후배와! 찬승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찬승이 번호를 찍어서 건네주자 지현이 받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 술 마시며 재밌게 놀아요.”
그러면서 지현은 다시 찬승과 건배를 하며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지현이가 술이 상당히 약했던 것이다. 한 병도 다 못 비운 지현은 혼자 연신 실실 거리면서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했다.
“술 그만 마시자….”
당황한 찬승은 지현에게서 술잔을 빼앗으려 했지만 그녀의 재빠른 행동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지현은 연신 웃으면서 찬승에게 말한다.
“으헤헤헤…. 왜요. 왜요. 선배 저랑 친해졌으면 재밌게 놀아야죠.”
“아니 너 많이 취했….”
찬승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막 쓰러지려는 지현을 붙잡기 위해 일어나자 갑자기 한 무리의 학생들이 지현을 둘러쌌다. 지현의 동기로 보이는 듯한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었다. 남학생들은 술에 취해 쓰러진 지현을 부축하며 일으켰고 여학생들은 찬승을 혐오스런 눈길로 쳐다봤다. 찬승은 그런 그녀들의 눈빛에서 쏟아져 나오는 강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늙은 변태 복학생 새끼가 어린 여자 후배 취하도록 술 먹이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내가 먹인 것도 아닌데….’
그러나 찬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지현은 잠자리가 있는 곳으로 옮겨졌고, 찬승은 그 술자리 구석에 쭈그리고 누워서 혼자 잠을 청했다.
*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나 대충 양치와 세수만 한 찬승은 가지고 온 모자를 푹 눌러 쓰며 생각했다.
‘결국 친해진 여자후배는 04학번 정지현 밖에 없네…. 아니지. 나만 친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걔는 그렇게 생각안 할 수 있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자 한숨이 푹 나온다. 엠티를 떠나올 때는 많이 친해져서 돌아가리라 생각했는데 결국 한 명이랑 짧은 대화와 술자리를 가진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찬승은 지현이 굉장히 예쁘고 청순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쳇…. 아쉽다….’
찬승은 지현이 떠나고 난 뒤 잠을 잔 것이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지는 소수의 인원들이 있을 것이고, 그 적은 인원들 틈에 끼면 분명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배 한 명 알았다고 방심한 것이 잘못이었다.
찬승은 아쉬운 마음에 숙소를 한 번 쳐다보고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뒷자리로 가면 남자 선배들과 앉을 것 같아 가운데쯤 창가자리에 털썩하고 앉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찬승은 아랑곳없이 그저 창밖만 바라보며 버스가 빨리 출발하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옆에 앉는 느낌이 난다. 고개를 슬쩍 돌려보자 길고 검은 생머리를 묶어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예쁜 여학생이다.
그 여학생이 찬승에게 웃음 지으며 말한다.
“앉아도 되죠?”
“어, 어…. 당연히 앉아도 되지.”
지현이었다. 찬승은 지현이 옆에 앉자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며 떨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현은 그런 찬승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맑게 웃으며 얘기했다.
“어제 죄송했어요. 세 잔 때부터 기억이 안 나네요. 제가 실수한 것 없죠?”
“응. 당연하지. 어제 재밌었어….”
찬승의 말에 지현이 다행이라는 듯 활짝 웃었다.
*
엠티에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피곤하기만 하다. 찬승도 지현도 정신없이 지쳐 잠들어 있었다. 가끔씩 눈을 뜬 찬승은 자신 쪽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다가 다시 바로 하는 지현을 아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어깨에 기대면 편안히 재워줄 텐데….’
그러나 지현이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다 아예 반대로 돌려버리는 모습을 보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조용하게 숨소리를 내며 잠을 자는 지현의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잠이나 더 자자….’
찬승도 몸을 창가 쪽으로 하며 잠을 청했다.
“선배. 학교에 도착했어요.”
너무나도 맑고 예쁜 목소리에 찬승은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그러자 자신의 반응을 보며 웃는 지현이 옆자리에 앉아 있다.
“아. 아. 그래….”
찬승은 지현의 뒤를 따라 허겁지겁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지현은 자기의 동기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동기들과 웃으면서 무언가 대화를 나눈다. 찬승은 그런 지현의 모습을 보며 부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나도 저렇게 같이 웃으며 얘기하면 좋을텐데….’
한참 부러워하는 찬승을 두고 과 학생회장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마니또 발표하겠습니다. 자신의 마니또는 자신이 들고 있던 쪽지에 적혀 있던 이름입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 터져 나온다. 종이에 적혀 있던 이름끼리 서로 마니또였던 것이다. 이런 유치한 장난이었지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찬승은 너무 놀라서 주머니에 꾸겨 두었던 종이를 꺼내 보았다.
[04 정지현]
‘그럼 나의 마니또도 정지현?’
찬승은 고개를 돌려 동기들과 웃고 있는 지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지현이 맑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인다. 자신이 마니또였다는 뜻이다. 찬승도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현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동기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찬승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저 애가 내가 마니또여서 그렇게 신경써준 거구나…. 쳇.’
찬승은 왠지 서글퍼졌다. 자신이랑 친해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마니또여서 잘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지현이란 아이랑 전혀 친분이 없는 사이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난 잘해준 것도 없네….’
문득 자신도 그녀의 마니또인데 잘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미안한 마음이 든다.
*
“다녀왔습니다.”
찬승이 집에 도착하자 현관에 동생의 신발이 보인다.
“서희 왔어요?”
찬승이 텔레비전을 보시는 어머니에게 묻자 고개를 돌려 서희 방을 쳐다보며 말했다.
“방에 누워있다.”
찬승이 서희의 방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가 없는 여동생의 방이라 이불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서희의 모습이 보였다. 찬승은 척 봐도 숙취에 괴로워하는 서희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술 많이 마셨냐?”
“응…. 어제 필름도 끊겼어.”
괴로운 듯한 서희의 말에 찬승이 놀란다.
“뭐! 필름이 끊겨! 아무 일도 없었고?”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아…. 근데 무슨 일 말하는 건데?”
아무것도 모르는 듯 그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는 서희의 모습에 찬승은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저 다음부터는 조금만 마시라는 주의를 줄 뿐이었다.
*
찬승은 다음 날 학교로 올라가는 버스에 타려고 긴 줄의 끝에 서자 지현이 떠올랐다. 연합엠티 때 했던 약속대로라면 월요일과 수요일에 학교를 같이 가게 된다. 오늘은 월요일. 그런데 연락이 없었다.
‘쳇…. 그러면 그렇지. 그냥 마니또 때문에 해본 말이구나…. 그런 말 했었는지 기억도 못할 거야.’
찬승은 무척 섭섭했다. 그래도 같이 갈 생각을 하며 내심 기대 했었는데 역시 연락이 오질 않는 것이었다. 점점 줄이 짧아지며 지현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고, 연락도 오질 않았다. 찬승은 결국 망설이다가 버스에 올라탔다. 사람들 틈에 껴서 손잡이를 잡자 천천히 출발하는 버스…. 그 버스에서 이리저리 살짝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는 찬승의 마음은 서운하기만 했다.
그때 찬승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린다. 꺼내보자 문자였다. 후배인 지현에게서 온 문자….
[선배 어디세요? 저 줄 서 있는데.]
“아, 아저씨! 스톱! 스톱! 세워주세요.”
두 정류장쯤 온 버스…. 찬승은 아저씨에게 소리소리를 지르며 버스를 세웠다. 아저씨의 욕을 들으면서도 찬승은 버스에서 뛰어내렸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정말 연락이 오다니…! 잊지도 않았고 빈말도 아니었어!’
찬승은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처음에 출발했던 정류장으로 뛰어 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는 핸드폰으로 급하게 문자를 찍어 보낸다.
[미안 나 거의 다 왔어. 금방 갈게!]
지현에게서 곧 답문이 온다.
[예. 저 줄 서 있을게요. 빨리 오세요.^^]
웃는다…. 지현이 웃는 이모티콘을 보낸 것이다.
“오예!”
찬승은 더욱더 힘을 내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줄을 서있는 지현의 모습이 보인다. 찬승은 그녀 앞에 멈춰서 숨이 차올라 죽을 것 같은 걸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미, 미안…. 늦었지.”
“아녜요. 지금 타고 가면 되요.”
“그, 그래….”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하는 지현을 본 찬승은 안심이 되어 뒤를 돌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버스에 올라타 나란히 앉자, 찬승은 그제야 지현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분홍색의 얇은 재킷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길고 검은 생머리와 어울려 너무나도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조금 타이트한 재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그리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았다. 가슴이 꽤나 작은 모양이었다.
찬승은 그런 지현의 예쁘고 청순한 모습을 보니 기쁨에 겨웠다
‘아아…. 나도 이제 월요일과 수요일은 이렇게 예쁜 여자 후배랑 가는 구나. 점심도 같이 먹겠지?’
찬승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지현아 고마워….”
“예? 뭐가요?”
찬승이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를 하자 지현이 이상한 듯 되물었다. 그러나 찬승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실실 웃으며 얼버무렸다.
*
처음으로 누군가와, 그것도 이렇게 예쁜 여자 후배와 함께 학교에 올라간 찬승은 지현이 자신의 동기들 옆에 앉는 것을 보고는 구석 자리에 홀로 앉았다. 지현은 고개를 돌려 그런 찬승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동기들이 찬승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동기들이 싫어하니 함께 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강의가 시작하고 찬승은 가끔씩 자신을 돌아보며 웃어주는 지현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혼자 앉게 하니 꽤나 미안했던 모양인지 수업시간 틈틈이 찬승을 신경 써 주는 것이다.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찬승이 지현을 바라보자 친구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 점심 때 무엇을 먹을까 이야기하는 모양이지…. 점심까지 같이 먹는 걸 바라는 건 역시 무리인가….’
찬승은 괜히 지현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조용히 강의실에서 나왔다. 왠지 기운이 없어져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뒤쪽에서 지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같이 가요.”
찬승이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는 지현의 모습이 보였다. 지현은 찬승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왜 혼자가요?”
“응…. 아 너 친구들이랑 먹는 줄 알고.”
“에이-! 같이 먹기로 했잖아요.”
지현은 맑게 웃음을 지으며 찬승의 등을 툭하고 친다. 찬승은 그런 지현의 돌발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 보면 버릇이 없는 행동일 수도 있으나 찬승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맑게 웃으며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그런 지현의 모습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구내식당에서 각자 밥을 시키고 마주 앉아 먹기 시작하자 금세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아니 찬승만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지현은 찬승이 앞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큼직큼직하게 밥을 떠서 먹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소량만 먹을 것 같은 청순가련 공주 스타일인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양 볼을 크게 부풀리며 정신없이 먹는 모습이 왜 저렇게 먹는데도 살이 찌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아니면 날 남자로 생각 안하는 건지도 모르지….’
찬승은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여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와 관심이 없는 남자 앞에서 하는 행동이 전혀 다르다고….
숟가락을 들 생각도 안하고 그런 지현의 모습을 보고 있자 어느새 눈이 마주쳤다. 지현은 입 안 가득 밥을 넣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선배 왜 안 먹어요?”
“응? 아 먹, 먹어야지.”
찬승은 그제야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 한 숟가락을 먹고 나자 무언가 궁금한 것이 생겨 지현에게 물었다.
“아까 친구들이랑 무슨 얘기하는 것 같던데….”
“점심 먹기 전에요?”
“응….”
찬승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현은 입에 있는 밥을 꼭꼭 씹고는 꿀꺽 삼키더니 갑자기 고개까지 젖히며 크게 웃는다.
“푸하핫-!”
“왜, 왜?”
찬승이 당황하여 묻자 지현이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후아-! 킥킥. 애들이 선배랑 밥 먹기 싫데요. 왠지 냄새날 것 같다나…. 그래서 저 혼자 선배랑 먹는 거죠.”
“…미안.”
찬승은 냄새라는 말에 심히 충격을 받았으나 내색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친구들이랑 밥을 먹지 못하는 지현에게 사과는 해야 했다. 허나 지현은 재빨리 손을 젓는다.
“아녜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다른 날은 매일 같이 먹는걸요.”
“그래….”
찬승은 지현의 말에 적이 안심을 하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냄새가 날 것 같다라…. 조심스레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고급스런 향수 냄새가 날리는 없지만 아무 냄새도 나질 않는다.
‘쳇…. 건방진 후배들….’
찬승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밥을 먹으며 더 이상의 별다른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밥을 열심히 먹던 지현도 그 정도까지 대화가 진행되질 않자 꽤나 어색했던지 밝지만은 아닌 표정이다. 찬승도 무언가 얘깃거릴 꺼내고 싶었지만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으 예전에는 이러질 않았는데….’
찬승이 속으로 끙끙 거리고 있을 때 지현이 무언가 생각난 듯 손바닥을 탁 친다. 찬승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배! 선배 싸이 하세요?”
“싸, 싸이? 그게 뭐야? 가수 말하는 건가?”
“….”
지현은 양 손을 마주친 채로 멍하니 찬승을 바라보았다. 약간은 굳어진 미소와 함께….
*
집에 돌아온 찬승은 재빨리 자신의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지현이 말해준 사이트로 들어가 보았다.
‘싸이월드? 이게 뭐야. 나 1학년 때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 안한다고 날 그렇게 놀리다니….’
찬승은 아직도 점심시간 때 지현의 웃음 섞인 놀림이 떠오른다. 세대차이라느니 촌스럽다느니 이래서 복학생은 다르다느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어색한 분위기가 꽤나 풀어졌지…. 흠흠. 어디보자 이걸 요새 그렇게 많이 한단 말이지?’
찬승은 그 사이트에 가입한 뒤 자신의 미니홈피를 개설했다. 그리고 지현이 알려준 주소로 그녀의 미니홈피로 들어가자 화면 한 구석에 작게 뜨는 그녀의 사진이 보였다. 특유의 맑고 환한 웃음을 얼굴 가득 짓고 있는 지현….
‘예쁘네….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일촌신청을 하라고 그랬는데….’
찬승은 지현의 말대로 일촌신청을 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뒤져도 그런 메뉴는 없었다. 그래서 웬일로 일찍 들어와 있는 동생을 부르기로 했다.
“서희야! 서희야!”
찬승이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고 크게 소리를 지르자 방문을 벌컥 열고 동생이 들어왔다.
“응?”
“잠깐 일로 와봐. 와서 얘한테 그 뭐냐…. 아. 일촌 신청 좀 해줘.”
“일촌? 오빠 싸이 해?”
컴퓨터로 다가와 마우스를 잡는 서희가 신기한 듯 묻자 찬승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하하하. 요새 싸이 안하는 사람도 있냐?”
그러나 서희는 찬승의 말에 신경도 쓰질 않고 모니터에 떠 있는 지현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우와! 예쁘다! 누구야? 여자친구?”
“아냐! 인마. 우리 과 후배야.”
“호오. 예쁜데….”
서희는 중얼 거리며 지현의 이름을 클릭하고 일촌신청을 했다. 그리고는 사진첩 메뉴를 누르더니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쳇. 일촌공개네. 음. 잠깐 나랑도 일촌 해야지 그럼.”
서희는 자신의 미니홈피로 들어가더니 일촌신청을 걸어 놓았다. 찬승은 처음 보는 동생의 미니홈피를 슬쩍 보자 방문자 수가 삼만 명을 넘어가고 있었다.
“흠. 인기 많군. 내가 곧 따라잡아주지.”
찬승의 말에 서희가 방에서 나가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헹…. 노력해보셔.”
찬승은 서희가 나가고 자신의 미니홈피를 자랑스럽게 둘러보았다. 썰렁하긴 했지만 오늘 처음 개설한 것이니 차차 꾸며나가면 될 것이다.
‘후후. 그래도 첫 날부터 일촌이란 게 두 명 이나 생겼군.’
찬승은 왠지 모를 뿌듯함에 사로잡혔다.
*
화요일은 같이 가는 사람도 없고 밥을 먹는 사람도 없다. 게다가 마주치는 사람 중에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찾을 수 없다. 찬승은 이럴 때 오히려 아영이라도 만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영은 얼굴이 일그러지더라도 자신을 쳐다봐주니까….
그러나 오늘 수요일은 다르다. 지현과 함께 학교를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헥헥…. 선배 오늘은 제가 늦었네요.”
지현이 뛰어 왔는지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쉰다. 점점 따뜻해지는 4월의 중순. 사람들의 옷차림도 조금씩 얇아져만 갔다. 지현도 하얀색 후드티에 얇은 검은색 재킷만을 걸친 간편한 차림이다.
“아냐. 나도 방금 왔는걸.”
찬승은 오늘이 지현과 같이 가는 두 번째 날이지만 이젠 조금씩 그녀와의 대화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지현의 밝고 활발한 성격도 둘의 사이를 친하게 해주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제 가입한 싸이월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버스에 올라타 나란히 뒷자리에 앉자 찬승의 눈에 들어오는 한 여자가 있었다.
‘천사…!’
분홍색의 귀여운 후드티에 검은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천사는 앉을 자리가 없자 버스 손잡이를 잡고 조용히 창밖을 보며 선다. 혹시 자리가 있는지 커다란 눈으로 흑진주처럼 맑은 눈동자를 굴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천사의 얼굴은 마치 호기심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아기의 얼굴과 같았다. 천사의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길고 검은 생머리가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검은색 미니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얼마나 하얗고 가는지 검은색의 스커트와 선명하게 대조될 정도였다.
‘아 정말 예쁘다….’
찬승은 넋을 잃고 천사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지현도 굉장히 예쁘다. 사람들에게 물어 둘을 비교하라면 50대 50으로 갈릴 것이다. 하지만 찬승의 눈에는 천사가 더욱 아름답게 비춰졌다. 그만큼 천사는 찬승에게 있어 꿈에서나 보던 이상형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천사랑 알고 지낼 수 없을까….’
찬승은 멍하니 그런 생각만을 하며 학교를 올라갔다.
강의실에서는 여전히 혼자 구석에 혼자 앉게 되었다. 가끔씩 동기들과 앉아 있는 지현이 찬승을 바라보며 웃어주는 것이 다였다.
점심시간에는 지현이 동기들과 떨어져 나와 찬승과 밥을 먹는다. 찬승은 그런 지현에게 미안해 괜찮다고 말해볼까 생각하다가 어제 혼자 먹은 점심이 떠올랐다.
‘그러고 싶진 않아….’
결국 찬승은 지현에게 미안해도 그녀와 밥을 같이 먹기로 했다. 여전히 지현은 밥을 잘 먹었다. 여자들은 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