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 - 22부
관리자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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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1 04:08
-바람소리-
제 22 부 : 재회와 슬픔의 사이에서
차가 급발진을 하면서, 모퉁이를 돌자마자, 일슈가 소리쳤다.
‘이슈형, 누구 따라오나 쫌 봐봐.’
‘아닌뎅?….없는뎅?…..’
‘아니야…..그게 아니야. 분명히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니깐?’
‘아니라니깐……혹시…..꼬리? 안되겠넹…..가까운 곳이 어디드라?’
이슈는 일슈의 말에 동조하듯이, 네비게이터를 눌러, 가장 가까운 대체 차량이 있는 곳을 찍었다.
‘이슈형, 아무래도, 저….’
‘맞어..그 칼…’
‘어서 빨리…., 집으로는 가면 안돼….’
이슈의 차는 가까운 지하 주차장으로 급하게 꺾여 들어갔다. 2층을 내려가서 멈춘 곳은 그냥 보통의 건물 지하 주차장 이었다. 차를 주차 시키고, 일슈는 웃도리를 벗더니만, 런닝을 죽 찢어 손아귀에 뭉쳤다.
‘자, 다들 저 차로 옮겨 타시져. 얼릉…..’
이슈가 차의 도색을 예전처럼 바꾸고 있는 도중, 영문을 모르는 윤서와 현석은 다른 차로 갈아타기 전에 일슈를 도와, 타고 온 뒷자석에 삼슈를 엎드리게 뉘였다.
‘형…..쫌만 참아, 아니면 방법이 없어. 집에 가면 어떻게 방법이 있겠지만….쪼끔만….’
일슈는 한 손에 런닝 뭉치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등에 깊이 꽂혀, 칼집 밖에 나와 있질 않은 단도를 쑤욱하면서 등에서 뽑았다. 그리고, 바닥에 칼을 버리기 전, 그 와중에도 런닝 조각으로 칼의 손잡이를 닦고는 바닥에 버렸다. 일슈가 정신을 잃은 삼슈를 업고, 현석과 윤서가 부축해서 다른 차로 갈아타자,
‘이슈형, 갑시다. 이제 얼마 있질 않아, 저 칼을 목표로 놈들이 몰려 들거야. 어서 빨리…..’
‘오케바링!’
‘형, 혹시 모르니, 지지래나 부탁해.’
‘올커닝….’
일슈가 조수석에 타고, 뒤에는 윤서와 현석이 삼슈를 두 사람의 무릎 위에 엎드리게 하고서,현석이 지혈 대신으로 건넨 일슈의 런닝을 상처 부위에 누른 채,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셩, 차광도…..’
‘아싸, 가오링….’
일슈의 부탁에 회전 통로를 따라 지상의 입구로 가던 중, 차의 창문은 검게 변해 가면서 바깥과 빛이 차단되기 시작했다.
‘’셩, 지지래는 했수?’
‘물론이징…..’
‘지지래가 뭔지 궁금허시져? 그 칼이 놓여 있던 자리로 차들이 벌떼처럼 몰려 들거 아닙니까? 그 주위에 온통 특수 산을 뿌려 놓았다는 걸 얘기 허져. 타이어의 고무랑만 마주치면 겁나게 서서히 타들어가서리, 설령 우리를 발견했다고 쳐도, 2분 이내에 타이어는 그 산이 묻은 자리에서 징허게 빵꾸가 나버린다 이 말이져. 압정을 뿌려봐야 소용도 없고….., 아무런 조치도 없이, 속도 내가며 설사 우리 뒤를 따라왔다 해도, 뻥! 그리곤 뒤지는 거져.’
‘일슈야. 저 쇄끼들인 갑다. 직일 쇄낑, 나오면서 바리케이트나 아작내징?’
‘셩 그거 굳 아이디어…..’
그러자, 앞좌석에 앉은 일슈는 노트북 같은 장비를 열어, 무언가를 쳐대고, 묘한 타이밍으로 이슈의 차량은 입구로 나오고, 그 칼의 추적장치를 따라 겁나게 밀고 들어오는 차들은 지하 주차장 안으로 밀쳐 들어가고 있었다.
‘들어가긴 했어도, 나오지는 못할 것이넹……빙신 새끼들….’
일슈는 알아듣든 말든 상관 없이, 지금 들어간 지하 주차장의 바리케이트와 연결되어 있는 릴레이의 제어칩을 엉망으로 만들며 빠져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니, 놈들이 속았다고 느끼고 따라서 튀어 나가려고 해도, 고장나서 열리질 않는 바리케이트를 부수면서 까지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을 거라는 이슈의 치밀한 계산하에 나온 추적제어의 일편이었고……
‘피가 많이 나오는데…..’
‘알아여…..그래도 빨리 달리 수는 없어여. 꼭 누르고 계세여. 떼지 마시고….참 인사가 늦었네여.’
일슈는 슈샤인 보이즈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했다.
‘삼슈형이 칼침만 안 맞았어도 깨끗하게 끝나는 건데….이슈형….지름길로 갑시다.’
‘가구 이따이까!’
20여분을 가다가 기어이, 집앞에 도착한 일행은 이슈의 명령에 의해 아무도 움직이질 못했다. 리모콘으로 차고 문을 열고, 차가 완전히 들어가 셔터가 내려질 때까지, 이슈는 백미러를 통해, 혹시라도 따라 붙을 수 있는 미행을 감시 했지만, 다행히 미행은 발견되질 않았다. 차고와 정원으로 바로 연결된 쪽문으로 먼저 일슈가 내려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급작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온 일행 때문에 놀랄수도 있을 것 같은 희진과 민기를 안심 시키기 위함 이었다. 그리고, 삼슈의 피습으로 인해 밖으로 나오면서 희진이 소리라도 지를 수 있다는 생각에 일슈가 먼저 집안에 들어가 나오려는 두 사람을 막는 편이 좋겠다는 이슈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 이기도 했다. 곧 이어, 이슈가 삼슈를 업고, 이미 벌겋게 변해버린 일슈의 런닝을 상처에 누르면서 현석과 윤서가 집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어떻게 된거니….삼,삼,삼슈가…어떻게 된 거야?’….’
뒤에 따라 들어오는 윤서와 현석 일행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도 않고, 희진은 이슈의 등에 엎혀 있는 삼슈에게 달겨들어, 윤서가 누르고 있던 그 피에 흥건한 런닝을 빼끌어 들고, 슈 형제들과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온 손과 옷에 삼슈가 흘린 피로 범벅이 된 윤서와 현석, 그리고 민기만이 덩그럽게 남아버린 거실의 중앙…..묘한 정적이 몇초간 흘렀다.
‘살아….. 있었네.’
민기가 그제서야, 윤서를 껴안았다.
‘그러게…자기도….미안해…나 때문에……’
보기에 민망했던지, 현석은 고개를 돌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버려 버렸다.
‘선우 팀장님 이시져? 강민깁니다. 이제까지 우리 윤서를 지켜 주셨다구여?’
‘제가 뭐 한 게 있다고……이런 자리에서 뵙기가 쫌 그렇긴 합니다. 선우현석 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네요.’
세 사람은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아주 건조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려 하다가, 민기에게 욕실이 어디냐고 묻는 현석과 윤서……’
‘응, 따라와. 알려주께.’
두 사람을 욕실로 안내하고 자리로 돌아온 민기는 가슴 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남편의 입장이면서도, 너그들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며? 라는 말 한마디 물을 수 없는 지금의 상황도 잘 적응이 되질 않고 있었고, 희진과의 관계에 대해서 껄끄러운 이 시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런지도 제대로 감이 서질 않고 있었다. 얼마 있질 않아서 두 사람은 대강 손과 팔에 묻은 피를 씻고서 욕실에서 나왔다.
‘강선생, 어여 내려오징?’
급한 목소리로 이슈가 민기를 찾았다.
‘저 잠깐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자기야, 우리도 내려갈께….이렇게 혼자 있는 게 이젠 겁이 나서…..’
‘그래, 그럼 같이 내려가자. 팀장님도 내려 가시져….’
‘네.’
이슈의 안내로 민기도 첨으로 지하의 작업실로 내려가게 되었다. 지하의 작업실은 3중 철문으로 되어 있어서 왠만한 총기류의 탄환으로도 부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 너른 집의 건평만큼의 공간 하나를 전부 지하층으로 터서 옹벽과 기둥을 제외한 전 공간을 오픈화 시킨 그곳은 운동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문을 열자마자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는 휘장이 설기설기 쳐진 아라비안 나이트에나 나올 것 같은 대형 침대가 놓여져 있었고, 중앙에는 그들의 분위기와 쌩뚱 맞도록 튀어 버리는 상아색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벽은 온통 그들이 평소에 필요로 하는 장비와 무기, 셀수 없이 많은 컴터와 보조로 장식되어 자물쇠로 채워진 총기류까지, 모든 것이 그들의 아지트라고 하기에 걸맞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삼슈는 그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 옆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닦아내는 희진의 얼룩진 손매무새가 보이고 있었고…..
‘다른 분들은 앉으셩. 강선상은 이리로 오징?’
‘자, 잠시만 옆으로 비켜서세여.’
‘형, 장비 쫌 갖고 오지?’
‘응.’
일슈의 부탁에 이슈가 들고온 트렁크 같은 가방을 침대에 걸터 앉은 민기의 발 앞에 척하고 펼쳐 놓는데…..
‘그거면 왠간한 수술도 될 껍니다. 저희가 고액을 들여 맞춘 거져. 이 집 한채 값은 족히 넘어갈 거에여.’
민기는 눈이 휘둥그레 지고 만다. 그 트렁크는 좌우로 열리고, 또다시 그 내용물이 2단으로 개페 되어 총 4개의 덩어리로 펼쳐지는 임시 의료용 기구였다. 30분에서 40분까지 공급 가능한 산소호흡기 에서부터, 탄두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는 초음파 장비에서부터, 화상, 열상, 자상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못할 부위가 없을 정도로 수술 도구가 짜임새 있게 갖추어진 것이 그것 이었다. 게다가 병원에서나 공급이 가능한, 강심제, 국소마취제, 항생제등등이 한두 달은 병원에 가지 않고도 자가치료나 드레싱을 할 수 있게끔 짜여진 그 내용물은 오랜 경험하에 만들어져 주문 생산된 물품임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물건은 참….기가 막히네여.’
‘외국에서 특수 제작해서 국내 의료장비 수입시에 껴 묻혀서 들어온 겁니다. MRI 같은 장비들 들여 올때는 무슨 산때미 같은 크기로 온다는 걸 그들은 너무도 잘 알거든여, 그 안에 이 장비를 낱낱이 분해해서 넣어오면, 아무리 눈까리가 좋은 세관 직원도 눈 씻고 다시 봐야 투시 X레이 상으로도 못찾아 내져. 병원이나 장비 수입처로 보내진 뒤에는 하나하나 멜로 전달받은 설명서 대로 조립해서는,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 무지막지한 고가로 넘기는 겁니다. 이 상처를 해 가지고 병원에는 도저히 갈 수 없기에….아마도 외국에서 잔뼈가 굵은 마피아나 신디케이트들도 똑같이 다친다고 할지라도 병원에 쉽사리 갈 수 없다는 제약으로 인해, 자연 발생적으로 수요가 생긴 제품 이라고 봐여. 사려는 사람이 있기는 있되 한정적이니, 값이 오지게 비싸져. 그래도 우리들 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장비라고 봐여. 이렇게 강선생 같은 분이 계시면, 이 장비가 빛이 나져, 빛이 나……’
‘삼슈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민기는 일단 혈압을 재기로 했다. 맥박을 재면서 현재 출혈이 얼마나 되었으며, 현재, 어느 부위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지 보기 위해 손에 검진용 고무장갑을 끼웠다.
‘잠시만여.’
뜬금없이 민기는 옆에 앉은 희진에게 눈짓을 하며, 옆으로 비켜나 앉으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윤서가 희진에게 다가가서는,
‘걱정 마세여. 남친 되시는 분, 곧 깨어나실 거에여. 체력이 워낙 좋으셔야져. 하늘을 붕붕 나시는 거 같던데…..사람이 뭐 쉽게 죽나여?’
갑자기 분위기 상으로 삼슈의 여친이 되어버린 희진이 멀뚱한 눈으로 윤서를 바라다 보며, 옆으로 나와 앉게 되었다. 민기는 장갑을 낀 채로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부위를 손가락으로 좌악 벌렸다. 여자들은 고개를 돌렸고, 민기의 코 끝으로 쇠덩어리가 삭는듯한 냄새가 흘렀다. 칼은 다행히 심장을 비켜났고, 가까이서 찌른 것이 아니라, 원거리에 단도를 날린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이 정도의 완력으로 칼을 날릴 정도라면, 단거리에서 찔렸을 경우, 흉골이나, 견갑골을 짓 이기면서 폐속으로 칼이 들어갔을 터인데, 원낙 근골이 장대하고, 무술로 다져진 삼슈 였기에 그 정도 선에서 칼이 박히기만 한 것으로 보였다.
‘저, 삼슈가 무슨 형이지?’
‘O형이여.’
‘그럼 제가 하께여.’
희진이 나서서 팔을 걷어 부쳤다. 트렁크 안에 들어가 있는 수혈 장비는 두 사람 사이에 작은 펌프 모터가 돌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피를 천천히 뽑아 바로 수혈해 주는 기능조차 보유하고 있었다.
‘먼저 꿰매야 하는데, 봉합사가 어디에 있지?’
‘아니, 깊이 꽂힌거 아닌강? 기냥 거투루 꼬매면 속은 어쩌궁?’
이슈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물었다.
‘걱정 마세여. 다행히 척추로 가기 직전에 칼 끝이 멈췄고, 뼈도 손상이 되질 않았으니, 외부만 탄탄히 꿰매주면 안쪽의 살은 아주 빠른 시간내에 붙을 겁니다. 인간에게는 자연 치유력이란 게 있거덩여. 약이 없이도, 평소의 강인한 체력이 있었다면, 이쯤 상처야 금방 털고 일어날 거에여. 단지, 칼이 꽂혔던 자리가 어깨의 근육과 관련이 되는 곳이라서 한동안 팔을 못쓰게 될겁니다. 금속에 혹시 감염될 수도 있는 파상풍 정도나 조심하고, 계속해서 드레싱만 잘 해주면, 곧 괜찮아 질겁니다.’
민기는 능숙한 솜씨로 바늘에 실을 꿰었다.
‘으으응….으으윽….여기가….여기가…..’
‘삼슈..움직이지 마. 여기 집 지하실이야. 상처를 꿰매야 하거덩? 그리고, 수혈도 해야하구…..정신이 들어?’
민기는 삼슈가 정말 대단한 정신과 체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에구구 나죽네 하면서, 한 사나흘이나 있다가 깨어날 일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다는 중압감 때문인지, 상처를 입었음에도, 삼슈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고 있었기에 말이다.
‘자, 부분 마취 허께?’
‘으으윽..안 그래도….. 되여….그냥 허세여…..그게 더 나아여’
‘아니, 그래도 그렇지….생살을 꿰는데……’
막무가내로 삼슈는 민기에게 그냥 꿰매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민기는 그것이 마취를 하고 꿰매는 것 보담 더 빠른 회복을 보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몸으로 하여금 통증에 익숙해지라는 일종의 지상명령이며, 그로 인해 상처의 부위로 신체적 비상체제가 집중되도록 유도하는 기능도 같이 동반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기는 해도, 그렇게 함으로해서 통증은 점차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마취를 한 것 보다 빠르게 붓기도 가라앉게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민기만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어대는 삼슈의 상처에 여지없이 바늘을 푹푹 꽂아댈 뿐이었다. 제일 고통 스러워 하는 부분은 한뜸 한뜸 마다, 매듭을 만드는 과정 이었는데, 마취를 했다면 모를까, 신경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매듭을 할 때는 살속에 실이 끼워진 채로 벌어진 양쪽의 살이 잡아 땅겨져 모듬어지는 그 파괴적인 통증으로 기절하기 십상이었지만, 삼슈는 몸만 부르르 떨 뿐, 입 밖으로 고함조차 지르질 않았다. 거의 마무리를 하고, 마무리 소독을 한 뒤에 압박붕대로 어깨를 둘러싼 처치를 하고는 바로 누워, 희진으로 하여금 수혈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두개의 가는 관을 통해 희진의 팔에서부터 검붉은 피가 흘러, 삼슈의 팔로 이어지고, 계수기에는 한도 용량 이전까지 수혈이 되는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자, 이제 모두 자리를 좀 비우져. 삼슈도 쉬어야 할 거 같고, 진통제는 싫다고 하니, 열이 꽤 오르긴 헐거야. 밤새 간호할 사람 빼고는 옆에 없는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수혈이 마무리되고 조금 어지럽기는 해도, 자기가 옆에 있겠다고 희진이 침대에서 일어나, 걷어부친 팔을 내리며, 말했다. 민기는 그럼 그렇게 하라며, 사람들을 데리고 지하실을 나섰다. 일슈가 같이 있겠다고 하는 것을 눈치를 주어가며, 끌고 나가는 이슈…..거실에 사람들이 모이자, 모두 말이 없었다. 희진과 삼슈를 뒤로 하고, 거실에 모인 일슈와 이슈, 그리고, 민기와 현석, 윤서 모두, 어줍잖은 뒤틀린 분위기로 인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빨리 회복될까?’
‘괜찮을꺼야.’
‘옆에서 여친이 잘 보살펴 주니까, 뭐. 빨리 회복하겠지…..’
‘그 여자분, 여친 아니거덩여?’
윤서의 여친 소리에 발끈하며, 눈을 똥그랗게 뜨는 일슈의 팔을 넌즈시 누르는 이슈….또다시 얼어붙은 실내의 공기….
‘저 근데, 왜 도망치셨는데여?’
대신 이슈가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윤서는 불안한 눈초리로 민기를 바라다 보았다. 민기는 얘기해도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 하세여, 여기 모인 사람들 한 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에여. 목숨 걸고 구하는 거 보셨으면, 아실턴데….’
일슈가 다시금 분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윤서에게 목소리를 날렸다.
‘알아여. 그런데, 아직, 해야할 일들이 있어여. 챙겨야 할 자료가 더 남아 있는데, 그게 있어야, 제 모양을 갖춘다고 봐여. 그 사람들도 제가 거기까지 접근한 줄은 모르고 있을 거에여.’
‘아니, 그럼, 다 들추어 보지도 않은 상황 때문에 저렇게 상록수 애들 눈에 독이 올랐다구여? 누굴 빙신으로 아나?’
‘상록수는 뭐져?’
민기는 윤서의 일과 상록수와의 함수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연계고리가 없는 듯한 내용을 듣고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상록수와의 관계에 대한 대강의 설명은 민기가 대신했다.
‘그럼 그게 상록수?’
현석의 맞장구에 윤서조차 고개를 끄덕인다. 상록수라는 명칭은 몰랐을 지언정, 분명 깊은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는 발언 이었다.
‘그럼 강선생 사모님께서는 죽은 윤미혜랑 무슨 얘기를 나누셨데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사모님께서…..’
‘일슈야…..방금 빠져 나오션는뎅, 두 분다 씻지두 못하셨당…..식사는 허셨낭? 오늘은 고만 허자. 형도 아프구…..씨스시구 저기 주방에 가셔설랑, 냉장고 열어 보시면, 먹을만한 게 꽤 있거덩여? 누님이 음식을 다 해 놓으셔설랑은…..우린 그만 내려가서 형이나 어찌 됐나 보자….아, 아, 강선상 걱정 안해두 되여. 조용히 옆에 이쓰께여. 얼릉?’
분위기가 고조되기 전에 이슈는 일슈를 끌고서, 지하로 내려갔다. 거실에는 민기와 현석, 그리고 윤서 이렇게 셋이 남게 되었다.
‘담배 쫌 있으시면…..이리 저리 끌려다 보니, 담배 살 여유도 없어서….’
‘아, 그러셨구나! 자, 여기 있습니다. 윤서도 주까?’
‘피워도 돼?’
‘응, 괜찮아.’
‘근데, 자기야,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데?’
‘응, 그저 일하다가…’
‘당신이야 맨날 병원, 아님, 집, 아님 룸싸롱인데, 이런 사람들 알 시간이나 있었나? 혹시 나이트 클럽 기도 출신? 그런 건 아닌 거 같던데…..’
‘나라고 이런 사람들 알지 마란 법 있니? 그간 어떻게 지냈어? 잠은 어디서 자구? 묻고 싶어 혼났네. 얘들 통해서 회사에서 팀장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 했다고는 듣고 있었어. 신문이나 방송은 봤니? 지금 밖엔 너나 나나 죽일 년놈으로 되어 있는 거 알아?’
‘응. 쫌 씻고 싶다. 배도 고프구….누가 먼저 씻을래여?’
‘괜찮아, 뭐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목욕탕이야 나누어 써도 되지만, 남의 집 이잖아? 그냥 두 분 들어가서 허시고 나오시져? 예전에도 많이 허셨을 텐데…..’
민기의 비아냥에 윤서와 현석은 할말을 잊어버렸다. 꼭 죄진 자가 잡혀 들어와 곡절을 추궁당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이미 꼬리가 말려서 저 구석으로 감추어진지 오래였다. 민기는 아까전 현관 입구에 있던 욕실 대신에 일부러 얼마전까지 희진과 뜨거운 섹스를 나누었던 욕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바닥의 구석에는 미처 씻어내지 못한 민기와 희진의 꼬시래기가 굴러다니고 있었지만, 그게 눈에 들어올만큼 윤서와 현석, 두 사람은 여유롭지도 않았을 뿐더러 눈치보기 바쁜 상황이었다. 문을 닫고 민기가 나가자,
‘윤서야, 우리 사이의 일을 다 아는 거 같아, 그렇지?’
‘저 사람들이 아니라 해도, 보고 들은 게 있다면, 벌써 눈치 챘겠지, 뭐…..어쩌겠어? 이렇게 도망나와 남의 신세 지게 된 건 민기씨나 나나 현석씨나 간에 마찬가진데….나 어느 정도 뻔뻔해 질라구 해. 살아야 하잖아? 사는 게 죽는거 보담 나은 이마당에, 누가 누구랑 어쩌구 저쩌구, 민기씨도 딴지 걸 맘은 없는 거 같아.’
‘그래두 그렇지, 이렇게 얼굴 마주보고 있자니, 정말 낯 간지럽다. 게다가 남편 밖에다 두고, 남친이랑 해피 샤워? 이건 쫌 아니라고 봐.’
‘세상사 모두 교과서에다 도덕책 처럼 흘러가면, 우리가 왜 이러고 있겠니? 현석씨 마누라도 알고보니, 현재의 남친 말고도, 화려하게 놀다가 시침뻑으로 안면 깠다며? 알기 전에야 그랬다 치자 말이야, 알고 나서도 얼굴에 티타늄 까는 거 보담야, 까놓고 당당해 져도 괜찮은 게, 요즘 세상 사는 쏠쏠한 재미라구. 버틸때까지 버텨야지, 지금에 와서 누가 누구 마누라네, 남편이네 어쩌구 하는 호구조사에다, 정분타령으로 분우구 썩힐 일 있어? 기냥 고우 엔 고우야. 다들 잘 살자고 허는 짓인데, 유치한 감정 쌈에다, 땅따먹기…… 이젠 일없네.’
‘넌 참, 적응도 잘헌다. 어쩜 그러니?’
‘나 원래 그런 년이야. 자기가 몰라서 그렇지, 내가 얼마나 독한 년인지 몰라서 그렇지….살아온 세월, 다 입으로 담기는 그래도….나 이래뵈도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안 겪어 본 게 없어. 알어? 어서 씻기나 하자. 민기씨 또 오해할라.’
‘오해해도 된다며?’
‘그래도 그렇지, 보는 앞에서 그 짓거리 할 생각이 나니, 자기는? 남자들이란 게 모두다….’
‘그런데, 넌 어머님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궁금하지두 않어?’
‘잘 있을꺼야. 언제나 그랬거든. 지 한 몸 살자고, 이리저리….암튼 나라고 별 수 있겠니? 그 핏줄에 그 자식이지. 이 모든 게 다 부모 잘 못 만난 탓이지, 뭐.’
‘어머님이 뭘 그렇게 잘못하셔서? 너 혼자 키우시느라 뼈빠지게 청소 하시면서….’
‘청소? 말이 좋아서 청소지…..나중에 말해주께.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그리구 우리 엄마가 얼마나 웃긴 여잔지…..살아온 세월을 보면 엄마를 절대 용서할 수는 없어도, 같은 여자의 입장으로 보면 측은허긴 해. 어쩜 살아도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을까도 싶구……’
민기는 한동안 두 사람이 벌거벗고, 샤워를 하는 욕실의 문 앞에 서서 끓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삭히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고야 만다. 이제는 안면까기로 했다는 윤서의 뻔뻔스러움이, 계면쩍어 하는 팀장의 태도보다 더 미워 보이는 묘한 면이 있음을 알았다. 조용한 거실로 나와 민기는 허전한 맘을 달래려고 주방의 바에서 술을 들고 나와, 안주도 없이 거푸 차례로 술을 들이켰다. 아무리 비상시라고 해도 남편의 권유랍시고, 옳다구나 하면서, 남친과 같이 욕실로 들어가던 윤서의 속을 도저히 이해할래야 이해할 도리가 없는 민기로서는, 속이 불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기만 했다. 게다가 두 사람이 흠뻑 젖은 머리로 커플룩처럼 목욕가운을 받쳐 입고, 욕실에서 나오는 모습은 가히 민기의 뚜껑을 열리게 하기에 충분한 뇌관이 분명했다.
‘윤서야, 우리 이쯤에서 얘기 쫌 하까?’
‘뭘?’
‘팀장님께서도 계시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이제 이렇게 모두 까발겨 져서, 아는 거 모르는 거 없이 다 드러난 이 마당에, 앞으로 어떡헐거냐구? 이렇게 일이 일어난 거야, 재껴 두더라도, 너랑 나 사이, 이제까지 부부라면 부부였잖니? 부부가 이런 거니? 부부가 이런 거야?’
‘제가 자리를 비켜 드릴까여?’
현석이 끼어들자, 민기가 버럭 화를 냈다.
‘팀장님도 들으셔야 할텐데여. 이제 남이라고 볼 수도 없잖은 관계 아닌가여? 모를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같이 몸뚱아리를 얼씨구나 허면서 공유 했는데, 귀에 거슬리는 얘기라고 자리를 뜨신다면, 너무 비겁한 거 아닌가여?’
‘자기야, 이게 무슨 이혼 법정도 아니고, 그런 얘기 꺼낼 상황은 아닌 거 같아. 솔찍히 얘기해서, 자기에게 제일루 미안한 건 나야. 그렇지만, 자기두 내 앞에서 쫌 정직해 보시지? 자기가 하고 다닌 꼬라지를 보자면, 자기두 결코 내 앞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껄? 내가 아까는 모른 척 하고 그랬지만, 내가 모를 줄 알고? 그 여자, 당신이 줄창 따라 댕기던 사진작가 아냐? 사진 작가가 사진이나 찍을 것이지, 남의 남편은 왜 건드리고 지랄이래? 구해준 것까지는 고맙다고 쳐. 그렇다고 자기 뒤도 구린 채로 똥 깔고 앉아 있는 주제비에 남 탓을 하면서 도덕군자 행세? 웃기셔!’
‘그래, 윤서, 너 이제 막가자 이거지?’
‘아하….좀 두분 다 진정 하시구 제 말 좀 들어 보세여. 지금 이 집 밖에 잘못 나갔다가는, 제 발로 걸어들어오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냉정하셔야지여. 저렇게 날고 기는 사람도 칼침을 맞고 뻗어 들어오는 이 판국에 누가 잘났네 하면서 시시비비 따져서야 뭘 하겠습니까? 저도 가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부하 직원과 부적절한 관계에 빠진 거, 시인 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걸로 인해 서로의 삶을 깨지 말자고, 어떻게든 살아 보자고, 기왕 시작하고 벌려진 일, 마무리나 끝을 보자고 허는 이 마당에 잘잘못을 딴지 걸어서야, 끝도 없고 한도 없지요. 서로의 감정 쌈은 다음으로 미루져. 저도 집으로, 아니, 예전의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맘 뿐입니다. 누가 이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가며, 내몰리는 상황에 빠질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저도 이번 일로 놀라고 상처 받기는 마찬가집니다. 이번에 사건 수사를 담당한 검사와 아내가 혼전에 그렇듯 깊은 사이였는지, 이번에서야 알게 되었져. 저도 윤서와 하고 댕긴 짓거리가 있어서 무어라 다구칠 입장도 못됩니다. 게다가 이렇게 쫓기는 몸이 되어보니, 더욱 예전의 평범했던 일상이 그립습니다. 서로가 조금씩만 양보하고, 어렵더리도 이해할 수는 없겠는지요?’
현석의 말에 윤서나, 민기나 흥분을 조금은 가라 앉힐 수 있게 된 건 사실 이었다.
‘그럼, 제가 하나만 묻겠습니다. 기약은 없지만, 이렇게 이 집에 빌붙어 지낸다고 합시다. 그럼, 이 집 안에서 저와 윤서는 같은 방을 쓰는 부부로 있어야 합니까? 아님, 팀장님과 시간을 보내도록 눈 감아 주어야 합니까? 아무리 비상시라고 해도 성욕이 비상시는 아닐텐데여?’
‘그건 쫌 대답하기 그렇네여. 저 솔찍히 얘기해서 윤서 무척 좋아합니다. 섹스든, 뭐든 간에 좋아하질 않았다면, 이 지경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을 거구요. 그리고, 저 삼슈라는 분의 도움도 있었지만, 윤서를 지금까지 구해내려고 애쓴 것에 대해서 일말의 권리주장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게 섹스든 어떤 것이든 간에…..저 그 혼란 스러운 와중에도…밝히기 어렵긴 하지만, 윤서랑 사내에서 도둑섹스도 한 사람 입니다. 윤서를 위기에서 구출한 대가는 아니더라도, 남편 이상의 보호의식도 있었구여. 권리주장 할 만 하다고 보는데여? 그렇다고 뭐 꼭 관계의 확보를 위해 대가리 박치기 하면서 싸우자,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이해를 구하는 거지여.’
‘아휴, 보자보자 하니깐, 두 사람 열나 웃긴다. 난 가만 있는데, 두 사람이서 누가 웃자리네 허면서 싸우는 꼬라지 하고는? 내가 언제 두 사람에게 내가 이 집에서 가랭이 벌려 준다디? 그리고 막말로, 두 사람 다 갖겠다고 내가 고집 피우면 어쩔건데? 민기씨는 어쩔거고, 현석씨는 어쩔 건데? 넌 이제까지 내 마누라 였으니까, 이제부텀은 안된다고, 보지구녕 손가락으로 막고 있을래, 아님, 남친도 헌신봉사 했으니, 대가성 섹스라도 있어야 된다고 남친 주제비에 남편 앞에서 성토를 헐래? 내 참 웃기고, 기막혀서…..’
세 사람은 이렇게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는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옴을 서로가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열려진 지하실을 통해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낭랑한 음성…..그건 일슈의 비명같은 흐느낌 이었다. 간간히 목이 메인 구성진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일슈는 흐느
제 22 부 : 재회와 슬픔의 사이에서
차가 급발진을 하면서, 모퉁이를 돌자마자, 일슈가 소리쳤다.
‘이슈형, 누구 따라오나 쫌 봐봐.’
‘아닌뎅?….없는뎅?…..’
‘아니야…..그게 아니야. 분명히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니깐?’
‘아니라니깐……혹시…..꼬리? 안되겠넹…..가까운 곳이 어디드라?’
이슈는 일슈의 말에 동조하듯이, 네비게이터를 눌러, 가장 가까운 대체 차량이 있는 곳을 찍었다.
‘이슈형, 아무래도, 저….’
‘맞어..그 칼…’
‘어서 빨리…., 집으로는 가면 안돼….’
이슈의 차는 가까운 지하 주차장으로 급하게 꺾여 들어갔다. 2층을 내려가서 멈춘 곳은 그냥 보통의 건물 지하 주차장 이었다. 차를 주차 시키고, 일슈는 웃도리를 벗더니만, 런닝을 죽 찢어 손아귀에 뭉쳤다.
‘자, 다들 저 차로 옮겨 타시져. 얼릉…..’
이슈가 차의 도색을 예전처럼 바꾸고 있는 도중, 영문을 모르는 윤서와 현석은 다른 차로 갈아타기 전에 일슈를 도와, 타고 온 뒷자석에 삼슈를 엎드리게 뉘였다.
‘형…..쫌만 참아, 아니면 방법이 없어. 집에 가면 어떻게 방법이 있겠지만….쪼끔만….’
일슈는 한 손에 런닝 뭉치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등에 깊이 꽂혀, 칼집 밖에 나와 있질 않은 단도를 쑤욱하면서 등에서 뽑았다. 그리고, 바닥에 칼을 버리기 전, 그 와중에도 런닝 조각으로 칼의 손잡이를 닦고는 바닥에 버렸다. 일슈가 정신을 잃은 삼슈를 업고, 현석과 윤서가 부축해서 다른 차로 갈아타자,
‘이슈형, 갑시다. 이제 얼마 있질 않아, 저 칼을 목표로 놈들이 몰려 들거야. 어서 빨리…..’
‘오케바링!’
‘형, 혹시 모르니, 지지래나 부탁해.’
‘올커닝….’
일슈가 조수석에 타고, 뒤에는 윤서와 현석이 삼슈를 두 사람의 무릎 위에 엎드리게 하고서,현석이 지혈 대신으로 건넨 일슈의 런닝을 상처 부위에 누른 채,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셩, 차광도…..’
‘아싸, 가오링….’
일슈의 부탁에 회전 통로를 따라 지상의 입구로 가던 중, 차의 창문은 검게 변해 가면서 바깥과 빛이 차단되기 시작했다.
‘’셩, 지지래는 했수?’
‘물론이징…..’
‘지지래가 뭔지 궁금허시져? 그 칼이 놓여 있던 자리로 차들이 벌떼처럼 몰려 들거 아닙니까? 그 주위에 온통 특수 산을 뿌려 놓았다는 걸 얘기 허져. 타이어의 고무랑만 마주치면 겁나게 서서히 타들어가서리, 설령 우리를 발견했다고 쳐도, 2분 이내에 타이어는 그 산이 묻은 자리에서 징허게 빵꾸가 나버린다 이 말이져. 압정을 뿌려봐야 소용도 없고….., 아무런 조치도 없이, 속도 내가며 설사 우리 뒤를 따라왔다 해도, 뻥! 그리곤 뒤지는 거져.’
‘일슈야. 저 쇄끼들인 갑다. 직일 쇄낑, 나오면서 바리케이트나 아작내징?’
‘셩 그거 굳 아이디어…..’
그러자, 앞좌석에 앉은 일슈는 노트북 같은 장비를 열어, 무언가를 쳐대고, 묘한 타이밍으로 이슈의 차량은 입구로 나오고, 그 칼의 추적장치를 따라 겁나게 밀고 들어오는 차들은 지하 주차장 안으로 밀쳐 들어가고 있었다.
‘들어가긴 했어도, 나오지는 못할 것이넹……빙신 새끼들….’
일슈는 알아듣든 말든 상관 없이, 지금 들어간 지하 주차장의 바리케이트와 연결되어 있는 릴레이의 제어칩을 엉망으로 만들며 빠져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니, 놈들이 속았다고 느끼고 따라서 튀어 나가려고 해도, 고장나서 열리질 않는 바리케이트를 부수면서 까지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을 거라는 이슈의 치밀한 계산하에 나온 추적제어의 일편이었고……
‘피가 많이 나오는데…..’
‘알아여…..그래도 빨리 달리 수는 없어여. 꼭 누르고 계세여. 떼지 마시고….참 인사가 늦었네여.’
일슈는 슈샤인 보이즈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했다.
‘삼슈형이 칼침만 안 맞았어도 깨끗하게 끝나는 건데….이슈형….지름길로 갑시다.’
‘가구 이따이까!’
20여분을 가다가 기어이, 집앞에 도착한 일행은 이슈의 명령에 의해 아무도 움직이질 못했다. 리모콘으로 차고 문을 열고, 차가 완전히 들어가 셔터가 내려질 때까지, 이슈는 백미러를 통해, 혹시라도 따라 붙을 수 있는 미행을 감시 했지만, 다행히 미행은 발견되질 않았다. 차고와 정원으로 바로 연결된 쪽문으로 먼저 일슈가 내려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급작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온 일행 때문에 놀랄수도 있을 것 같은 희진과 민기를 안심 시키기 위함 이었다. 그리고, 삼슈의 피습으로 인해 밖으로 나오면서 희진이 소리라도 지를 수 있다는 생각에 일슈가 먼저 집안에 들어가 나오려는 두 사람을 막는 편이 좋겠다는 이슈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 이기도 했다. 곧 이어, 이슈가 삼슈를 업고, 이미 벌겋게 변해버린 일슈의 런닝을 상처에 누르면서 현석과 윤서가 집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어떻게 된거니….삼,삼,삼슈가…어떻게 된 거야?’….’
뒤에 따라 들어오는 윤서와 현석 일행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도 않고, 희진은 이슈의 등에 엎혀 있는 삼슈에게 달겨들어, 윤서가 누르고 있던 그 피에 흥건한 런닝을 빼끌어 들고, 슈 형제들과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온 손과 옷에 삼슈가 흘린 피로 범벅이 된 윤서와 현석, 그리고 민기만이 덩그럽게 남아버린 거실의 중앙…..묘한 정적이 몇초간 흘렀다.
‘살아….. 있었네.’
민기가 그제서야, 윤서를 껴안았다.
‘그러게…자기도….미안해…나 때문에……’
보기에 민망했던지, 현석은 고개를 돌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버려 버렸다.
‘선우 팀장님 이시져? 강민깁니다. 이제까지 우리 윤서를 지켜 주셨다구여?’
‘제가 뭐 한 게 있다고……이런 자리에서 뵙기가 쫌 그렇긴 합니다. 선우현석 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네요.’
세 사람은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아주 건조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려 하다가, 민기에게 욕실이 어디냐고 묻는 현석과 윤서……’
‘응, 따라와. 알려주께.’
두 사람을 욕실로 안내하고 자리로 돌아온 민기는 가슴 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남편의 입장이면서도, 너그들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며? 라는 말 한마디 물을 수 없는 지금의 상황도 잘 적응이 되질 않고 있었고, 희진과의 관계에 대해서 껄끄러운 이 시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런지도 제대로 감이 서질 않고 있었다. 얼마 있질 않아서 두 사람은 대강 손과 팔에 묻은 피를 씻고서 욕실에서 나왔다.
‘강선생, 어여 내려오징?’
급한 목소리로 이슈가 민기를 찾았다.
‘저 잠깐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자기야, 우리도 내려갈께….이렇게 혼자 있는 게 이젠 겁이 나서…..’
‘그래, 그럼 같이 내려가자. 팀장님도 내려 가시져….’
‘네.’
이슈의 안내로 민기도 첨으로 지하의 작업실로 내려가게 되었다. 지하의 작업실은 3중 철문으로 되어 있어서 왠만한 총기류의 탄환으로도 부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 너른 집의 건평만큼의 공간 하나를 전부 지하층으로 터서 옹벽과 기둥을 제외한 전 공간을 오픈화 시킨 그곳은 운동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문을 열자마자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는 휘장이 설기설기 쳐진 아라비안 나이트에나 나올 것 같은 대형 침대가 놓여져 있었고, 중앙에는 그들의 분위기와 쌩뚱 맞도록 튀어 버리는 상아색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벽은 온통 그들이 평소에 필요로 하는 장비와 무기, 셀수 없이 많은 컴터와 보조로 장식되어 자물쇠로 채워진 총기류까지, 모든 것이 그들의 아지트라고 하기에 걸맞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삼슈는 그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 옆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닦아내는 희진의 얼룩진 손매무새가 보이고 있었고…..
‘다른 분들은 앉으셩. 강선상은 이리로 오징?’
‘자, 잠시만 옆으로 비켜서세여.’
‘형, 장비 쫌 갖고 오지?’
‘응.’
일슈의 부탁에 이슈가 들고온 트렁크 같은 가방을 침대에 걸터 앉은 민기의 발 앞에 척하고 펼쳐 놓는데…..
‘그거면 왠간한 수술도 될 껍니다. 저희가 고액을 들여 맞춘 거져. 이 집 한채 값은 족히 넘어갈 거에여.’
민기는 눈이 휘둥그레 지고 만다. 그 트렁크는 좌우로 열리고, 또다시 그 내용물이 2단으로 개페 되어 총 4개의 덩어리로 펼쳐지는 임시 의료용 기구였다. 30분에서 40분까지 공급 가능한 산소호흡기 에서부터, 탄두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는 초음파 장비에서부터, 화상, 열상, 자상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못할 부위가 없을 정도로 수술 도구가 짜임새 있게 갖추어진 것이 그것 이었다. 게다가 병원에서나 공급이 가능한, 강심제, 국소마취제, 항생제등등이 한두 달은 병원에 가지 않고도 자가치료나 드레싱을 할 수 있게끔 짜여진 그 내용물은 오랜 경험하에 만들어져 주문 생산된 물품임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물건은 참….기가 막히네여.’
‘외국에서 특수 제작해서 국내 의료장비 수입시에 껴 묻혀서 들어온 겁니다. MRI 같은 장비들 들여 올때는 무슨 산때미 같은 크기로 온다는 걸 그들은 너무도 잘 알거든여, 그 안에 이 장비를 낱낱이 분해해서 넣어오면, 아무리 눈까리가 좋은 세관 직원도 눈 씻고 다시 봐야 투시 X레이 상으로도 못찾아 내져. 병원이나 장비 수입처로 보내진 뒤에는 하나하나 멜로 전달받은 설명서 대로 조립해서는,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 무지막지한 고가로 넘기는 겁니다. 이 상처를 해 가지고 병원에는 도저히 갈 수 없기에….아마도 외국에서 잔뼈가 굵은 마피아나 신디케이트들도 똑같이 다친다고 할지라도 병원에 쉽사리 갈 수 없다는 제약으로 인해, 자연 발생적으로 수요가 생긴 제품 이라고 봐여. 사려는 사람이 있기는 있되 한정적이니, 값이 오지게 비싸져. 그래도 우리들 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장비라고 봐여. 이렇게 강선생 같은 분이 계시면, 이 장비가 빛이 나져, 빛이 나……’
‘삼슈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민기는 일단 혈압을 재기로 했다. 맥박을 재면서 현재 출혈이 얼마나 되었으며, 현재, 어느 부위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지 보기 위해 손에 검진용 고무장갑을 끼웠다.
‘잠시만여.’
뜬금없이 민기는 옆에 앉은 희진에게 눈짓을 하며, 옆으로 비켜나 앉으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윤서가 희진에게 다가가서는,
‘걱정 마세여. 남친 되시는 분, 곧 깨어나실 거에여. 체력이 워낙 좋으셔야져. 하늘을 붕붕 나시는 거 같던데…..사람이 뭐 쉽게 죽나여?’
갑자기 분위기 상으로 삼슈의 여친이 되어버린 희진이 멀뚱한 눈으로 윤서를 바라다 보며, 옆으로 나와 앉게 되었다. 민기는 장갑을 낀 채로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부위를 손가락으로 좌악 벌렸다. 여자들은 고개를 돌렸고, 민기의 코 끝으로 쇠덩어리가 삭는듯한 냄새가 흘렀다. 칼은 다행히 심장을 비켜났고, 가까이서 찌른 것이 아니라, 원거리에 단도를 날린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이 정도의 완력으로 칼을 날릴 정도라면, 단거리에서 찔렸을 경우, 흉골이나, 견갑골을 짓 이기면서 폐속으로 칼이 들어갔을 터인데, 원낙 근골이 장대하고, 무술로 다져진 삼슈 였기에 그 정도 선에서 칼이 박히기만 한 것으로 보였다.
‘저, 삼슈가 무슨 형이지?’
‘O형이여.’
‘그럼 제가 하께여.’
희진이 나서서 팔을 걷어 부쳤다. 트렁크 안에 들어가 있는 수혈 장비는 두 사람 사이에 작은 펌프 모터가 돌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피를 천천히 뽑아 바로 수혈해 주는 기능조차 보유하고 있었다.
‘먼저 꿰매야 하는데, 봉합사가 어디에 있지?’
‘아니, 깊이 꽂힌거 아닌강? 기냥 거투루 꼬매면 속은 어쩌궁?’
이슈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물었다.
‘걱정 마세여. 다행히 척추로 가기 직전에 칼 끝이 멈췄고, 뼈도 손상이 되질 않았으니, 외부만 탄탄히 꿰매주면 안쪽의 살은 아주 빠른 시간내에 붙을 겁니다. 인간에게는 자연 치유력이란 게 있거덩여. 약이 없이도, 평소의 강인한 체력이 있었다면, 이쯤 상처야 금방 털고 일어날 거에여. 단지, 칼이 꽂혔던 자리가 어깨의 근육과 관련이 되는 곳이라서 한동안 팔을 못쓰게 될겁니다. 금속에 혹시 감염될 수도 있는 파상풍 정도나 조심하고, 계속해서 드레싱만 잘 해주면, 곧 괜찮아 질겁니다.’
민기는 능숙한 솜씨로 바늘에 실을 꿰었다.
‘으으응….으으윽….여기가….여기가…..’
‘삼슈..움직이지 마. 여기 집 지하실이야. 상처를 꿰매야 하거덩? 그리고, 수혈도 해야하구…..정신이 들어?’
민기는 삼슈가 정말 대단한 정신과 체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에구구 나죽네 하면서, 한 사나흘이나 있다가 깨어날 일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다는 중압감 때문인지, 상처를 입었음에도, 삼슈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고 있었기에 말이다.
‘자, 부분 마취 허께?’
‘으으윽..안 그래도….. 되여….그냥 허세여…..그게 더 나아여’
‘아니, 그래도 그렇지….생살을 꿰는데……’
막무가내로 삼슈는 민기에게 그냥 꿰매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민기는 그것이 마취를 하고 꿰매는 것 보담 더 빠른 회복을 보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몸으로 하여금 통증에 익숙해지라는 일종의 지상명령이며, 그로 인해 상처의 부위로 신체적 비상체제가 집중되도록 유도하는 기능도 같이 동반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기는 해도, 그렇게 함으로해서 통증은 점차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마취를 한 것 보다 빠르게 붓기도 가라앉게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민기만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어대는 삼슈의 상처에 여지없이 바늘을 푹푹 꽂아댈 뿐이었다. 제일 고통 스러워 하는 부분은 한뜸 한뜸 마다, 매듭을 만드는 과정 이었는데, 마취를 했다면 모를까, 신경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매듭을 할 때는 살속에 실이 끼워진 채로 벌어진 양쪽의 살이 잡아 땅겨져 모듬어지는 그 파괴적인 통증으로 기절하기 십상이었지만, 삼슈는 몸만 부르르 떨 뿐, 입 밖으로 고함조차 지르질 않았다. 거의 마무리를 하고, 마무리 소독을 한 뒤에 압박붕대로 어깨를 둘러싼 처치를 하고는 바로 누워, 희진으로 하여금 수혈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두개의 가는 관을 통해 희진의 팔에서부터 검붉은 피가 흘러, 삼슈의 팔로 이어지고, 계수기에는 한도 용량 이전까지 수혈이 되는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자, 이제 모두 자리를 좀 비우져. 삼슈도 쉬어야 할 거 같고, 진통제는 싫다고 하니, 열이 꽤 오르긴 헐거야. 밤새 간호할 사람 빼고는 옆에 없는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수혈이 마무리되고 조금 어지럽기는 해도, 자기가 옆에 있겠다고 희진이 침대에서 일어나, 걷어부친 팔을 내리며, 말했다. 민기는 그럼 그렇게 하라며, 사람들을 데리고 지하실을 나섰다. 일슈가 같이 있겠다고 하는 것을 눈치를 주어가며, 끌고 나가는 이슈…..거실에 사람들이 모이자, 모두 말이 없었다. 희진과 삼슈를 뒤로 하고, 거실에 모인 일슈와 이슈, 그리고, 민기와 현석, 윤서 모두, 어줍잖은 뒤틀린 분위기로 인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빨리 회복될까?’
‘괜찮을꺼야.’
‘옆에서 여친이 잘 보살펴 주니까, 뭐. 빨리 회복하겠지…..’
‘그 여자분, 여친 아니거덩여?’
윤서의 여친 소리에 발끈하며, 눈을 똥그랗게 뜨는 일슈의 팔을 넌즈시 누르는 이슈….또다시 얼어붙은 실내의 공기….
‘저 근데, 왜 도망치셨는데여?’
대신 이슈가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윤서는 불안한 눈초리로 민기를 바라다 보았다. 민기는 얘기해도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 하세여, 여기 모인 사람들 한 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에여. 목숨 걸고 구하는 거 보셨으면, 아실턴데….’
일슈가 다시금 분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윤서에게 목소리를 날렸다.
‘알아여. 그런데, 아직, 해야할 일들이 있어여. 챙겨야 할 자료가 더 남아 있는데, 그게 있어야, 제 모양을 갖춘다고 봐여. 그 사람들도 제가 거기까지 접근한 줄은 모르고 있을 거에여.’
‘아니, 그럼, 다 들추어 보지도 않은 상황 때문에 저렇게 상록수 애들 눈에 독이 올랐다구여? 누굴 빙신으로 아나?’
‘상록수는 뭐져?’
민기는 윤서의 일과 상록수와의 함수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연계고리가 없는 듯한 내용을 듣고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상록수와의 관계에 대한 대강의 설명은 민기가 대신했다.
‘그럼 그게 상록수?’
현석의 맞장구에 윤서조차 고개를 끄덕인다. 상록수라는 명칭은 몰랐을 지언정, 분명 깊은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는 발언 이었다.
‘그럼 강선생 사모님께서는 죽은 윤미혜랑 무슨 얘기를 나누셨데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사모님께서…..’
‘일슈야…..방금 빠져 나오션는뎅, 두 분다 씻지두 못하셨당…..식사는 허셨낭? 오늘은 고만 허자. 형도 아프구…..씨스시구 저기 주방에 가셔설랑, 냉장고 열어 보시면, 먹을만한 게 꽤 있거덩여? 누님이 음식을 다 해 놓으셔설랑은…..우린 그만 내려가서 형이나 어찌 됐나 보자….아, 아, 강선상 걱정 안해두 되여. 조용히 옆에 이쓰께여. 얼릉?’
분위기가 고조되기 전에 이슈는 일슈를 끌고서, 지하로 내려갔다. 거실에는 민기와 현석, 그리고 윤서 이렇게 셋이 남게 되었다.
‘담배 쫌 있으시면…..이리 저리 끌려다 보니, 담배 살 여유도 없어서….’
‘아, 그러셨구나! 자, 여기 있습니다. 윤서도 주까?’
‘피워도 돼?’
‘응, 괜찮아.’
‘근데, 자기야,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데?’
‘응, 그저 일하다가…’
‘당신이야 맨날 병원, 아님, 집, 아님 룸싸롱인데, 이런 사람들 알 시간이나 있었나? 혹시 나이트 클럽 기도 출신? 그런 건 아닌 거 같던데…..’
‘나라고 이런 사람들 알지 마란 법 있니? 그간 어떻게 지냈어? 잠은 어디서 자구? 묻고 싶어 혼났네. 얘들 통해서 회사에서 팀장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 했다고는 듣고 있었어. 신문이나 방송은 봤니? 지금 밖엔 너나 나나 죽일 년놈으로 되어 있는 거 알아?’
‘응. 쫌 씻고 싶다. 배도 고프구….누가 먼저 씻을래여?’
‘괜찮아, 뭐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목욕탕이야 나누어 써도 되지만, 남의 집 이잖아? 그냥 두 분 들어가서 허시고 나오시져? 예전에도 많이 허셨을 텐데…..’
민기의 비아냥에 윤서와 현석은 할말을 잊어버렸다. 꼭 죄진 자가 잡혀 들어와 곡절을 추궁당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이미 꼬리가 말려서 저 구석으로 감추어진지 오래였다. 민기는 아까전 현관 입구에 있던 욕실 대신에 일부러 얼마전까지 희진과 뜨거운 섹스를 나누었던 욕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바닥의 구석에는 미처 씻어내지 못한 민기와 희진의 꼬시래기가 굴러다니고 있었지만, 그게 눈에 들어올만큼 윤서와 현석, 두 사람은 여유롭지도 않았을 뿐더러 눈치보기 바쁜 상황이었다. 문을 닫고 민기가 나가자,
‘윤서야, 우리 사이의 일을 다 아는 거 같아, 그렇지?’
‘저 사람들이 아니라 해도, 보고 들은 게 있다면, 벌써 눈치 챘겠지, 뭐…..어쩌겠어? 이렇게 도망나와 남의 신세 지게 된 건 민기씨나 나나 현석씨나 간에 마찬가진데….나 어느 정도 뻔뻔해 질라구 해. 살아야 하잖아? 사는 게 죽는거 보담 나은 이마당에, 누가 누구랑 어쩌구 저쩌구, 민기씨도 딴지 걸 맘은 없는 거 같아.’
‘그래두 그렇지, 이렇게 얼굴 마주보고 있자니, 정말 낯 간지럽다. 게다가 남편 밖에다 두고, 남친이랑 해피 샤워? 이건 쫌 아니라고 봐.’
‘세상사 모두 교과서에다 도덕책 처럼 흘러가면, 우리가 왜 이러고 있겠니? 현석씨 마누라도 알고보니, 현재의 남친 말고도, 화려하게 놀다가 시침뻑으로 안면 깠다며? 알기 전에야 그랬다 치자 말이야, 알고 나서도 얼굴에 티타늄 까는 거 보담야, 까놓고 당당해 져도 괜찮은 게, 요즘 세상 사는 쏠쏠한 재미라구. 버틸때까지 버텨야지, 지금에 와서 누가 누구 마누라네, 남편이네 어쩌구 하는 호구조사에다, 정분타령으로 분우구 썩힐 일 있어? 기냥 고우 엔 고우야. 다들 잘 살자고 허는 짓인데, 유치한 감정 쌈에다, 땅따먹기…… 이젠 일없네.’
‘넌 참, 적응도 잘헌다. 어쩜 그러니?’
‘나 원래 그런 년이야. 자기가 몰라서 그렇지, 내가 얼마나 독한 년인지 몰라서 그렇지….살아온 세월, 다 입으로 담기는 그래도….나 이래뵈도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안 겪어 본 게 없어. 알어? 어서 씻기나 하자. 민기씨 또 오해할라.’
‘오해해도 된다며?’
‘그래도 그렇지, 보는 앞에서 그 짓거리 할 생각이 나니, 자기는? 남자들이란 게 모두다….’
‘그런데, 넌 어머님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궁금하지두 않어?’
‘잘 있을꺼야. 언제나 그랬거든. 지 한 몸 살자고, 이리저리….암튼 나라고 별 수 있겠니? 그 핏줄에 그 자식이지. 이 모든 게 다 부모 잘 못 만난 탓이지, 뭐.’
‘어머님이 뭘 그렇게 잘못하셔서? 너 혼자 키우시느라 뼈빠지게 청소 하시면서….’
‘청소? 말이 좋아서 청소지…..나중에 말해주께.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그리구 우리 엄마가 얼마나 웃긴 여잔지…..살아온 세월을 보면 엄마를 절대 용서할 수는 없어도, 같은 여자의 입장으로 보면 측은허긴 해. 어쩜 살아도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을까도 싶구……’
민기는 한동안 두 사람이 벌거벗고, 샤워를 하는 욕실의 문 앞에 서서 끓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삭히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고야 만다. 이제는 안면까기로 했다는 윤서의 뻔뻔스러움이, 계면쩍어 하는 팀장의 태도보다 더 미워 보이는 묘한 면이 있음을 알았다. 조용한 거실로 나와 민기는 허전한 맘을 달래려고 주방의 바에서 술을 들고 나와, 안주도 없이 거푸 차례로 술을 들이켰다. 아무리 비상시라고 해도 남편의 권유랍시고, 옳다구나 하면서, 남친과 같이 욕실로 들어가던 윤서의 속을 도저히 이해할래야 이해할 도리가 없는 민기로서는, 속이 불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기만 했다. 게다가 두 사람이 흠뻑 젖은 머리로 커플룩처럼 목욕가운을 받쳐 입고, 욕실에서 나오는 모습은 가히 민기의 뚜껑을 열리게 하기에 충분한 뇌관이 분명했다.
‘윤서야, 우리 이쯤에서 얘기 쫌 하까?’
‘뭘?’
‘팀장님께서도 계시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이제 이렇게 모두 까발겨 져서, 아는 거 모르는 거 없이 다 드러난 이 마당에, 앞으로 어떡헐거냐구? 이렇게 일이 일어난 거야, 재껴 두더라도, 너랑 나 사이, 이제까지 부부라면 부부였잖니? 부부가 이런 거니? 부부가 이런 거야?’
‘제가 자리를 비켜 드릴까여?’
현석이 끼어들자, 민기가 버럭 화를 냈다.
‘팀장님도 들으셔야 할텐데여. 이제 남이라고 볼 수도 없잖은 관계 아닌가여? 모를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같이 몸뚱아리를 얼씨구나 허면서 공유 했는데, 귀에 거슬리는 얘기라고 자리를 뜨신다면, 너무 비겁한 거 아닌가여?’
‘자기야, 이게 무슨 이혼 법정도 아니고, 그런 얘기 꺼낼 상황은 아닌 거 같아. 솔찍히 얘기해서, 자기에게 제일루 미안한 건 나야. 그렇지만, 자기두 내 앞에서 쫌 정직해 보시지? 자기가 하고 다닌 꼬라지를 보자면, 자기두 결코 내 앞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껄? 내가 아까는 모른 척 하고 그랬지만, 내가 모를 줄 알고? 그 여자, 당신이 줄창 따라 댕기던 사진작가 아냐? 사진 작가가 사진이나 찍을 것이지, 남의 남편은 왜 건드리고 지랄이래? 구해준 것까지는 고맙다고 쳐. 그렇다고 자기 뒤도 구린 채로 똥 깔고 앉아 있는 주제비에 남 탓을 하면서 도덕군자 행세? 웃기셔!’
‘그래, 윤서, 너 이제 막가자 이거지?’
‘아하….좀 두분 다 진정 하시구 제 말 좀 들어 보세여. 지금 이 집 밖에 잘못 나갔다가는, 제 발로 걸어들어오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냉정하셔야지여. 저렇게 날고 기는 사람도 칼침을 맞고 뻗어 들어오는 이 판국에 누가 잘났네 하면서 시시비비 따져서야 뭘 하겠습니까? 저도 가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부하 직원과 부적절한 관계에 빠진 거, 시인 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걸로 인해 서로의 삶을 깨지 말자고, 어떻게든 살아 보자고, 기왕 시작하고 벌려진 일, 마무리나 끝을 보자고 허는 이 마당에 잘잘못을 딴지 걸어서야, 끝도 없고 한도 없지요. 서로의 감정 쌈은 다음으로 미루져. 저도 집으로, 아니, 예전의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맘 뿐입니다. 누가 이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가며, 내몰리는 상황에 빠질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저도 이번 일로 놀라고 상처 받기는 마찬가집니다. 이번에 사건 수사를 담당한 검사와 아내가 혼전에 그렇듯 깊은 사이였는지, 이번에서야 알게 되었져. 저도 윤서와 하고 댕긴 짓거리가 있어서 무어라 다구칠 입장도 못됩니다. 게다가 이렇게 쫓기는 몸이 되어보니, 더욱 예전의 평범했던 일상이 그립습니다. 서로가 조금씩만 양보하고, 어렵더리도 이해할 수는 없겠는지요?’
현석의 말에 윤서나, 민기나 흥분을 조금은 가라 앉힐 수 있게 된 건 사실 이었다.
‘그럼, 제가 하나만 묻겠습니다. 기약은 없지만, 이렇게 이 집에 빌붙어 지낸다고 합시다. 그럼, 이 집 안에서 저와 윤서는 같은 방을 쓰는 부부로 있어야 합니까? 아님, 팀장님과 시간을 보내도록 눈 감아 주어야 합니까? 아무리 비상시라고 해도 성욕이 비상시는 아닐텐데여?’
‘그건 쫌 대답하기 그렇네여. 저 솔찍히 얘기해서 윤서 무척 좋아합니다. 섹스든, 뭐든 간에 좋아하질 않았다면, 이 지경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을 거구요. 그리고, 저 삼슈라는 분의 도움도 있었지만, 윤서를 지금까지 구해내려고 애쓴 것에 대해서 일말의 권리주장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게 섹스든 어떤 것이든 간에…..저 그 혼란 스러운 와중에도…밝히기 어렵긴 하지만, 윤서랑 사내에서 도둑섹스도 한 사람 입니다. 윤서를 위기에서 구출한 대가는 아니더라도, 남편 이상의 보호의식도 있었구여. 권리주장 할 만 하다고 보는데여? 그렇다고 뭐 꼭 관계의 확보를 위해 대가리 박치기 하면서 싸우자,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이해를 구하는 거지여.’
‘아휴, 보자보자 하니깐, 두 사람 열나 웃긴다. 난 가만 있는데, 두 사람이서 누가 웃자리네 허면서 싸우는 꼬라지 하고는? 내가 언제 두 사람에게 내가 이 집에서 가랭이 벌려 준다디? 그리고 막말로, 두 사람 다 갖겠다고 내가 고집 피우면 어쩔건데? 민기씨는 어쩔거고, 현석씨는 어쩔 건데? 넌 이제까지 내 마누라 였으니까, 이제부텀은 안된다고, 보지구녕 손가락으로 막고 있을래, 아님, 남친도 헌신봉사 했으니, 대가성 섹스라도 있어야 된다고 남친 주제비에 남편 앞에서 성토를 헐래? 내 참 웃기고, 기막혀서…..’
세 사람은 이렇게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는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옴을 서로가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열려진 지하실을 통해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낭랑한 음성…..그건 일슈의 비명같은 흐느낌 이었다. 간간히 목이 메인 구성진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일슈는 흐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