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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아들 - 7부

관리자 0 7542
노아의아들(7-완결)



미혜와 자연이가 인도네시아로 떠난 것은 상규가 먼저 출발한 지 3개월이 지난 8월의 일이었다.

E-mail이나 편지를 주고받기가 불편하여 가끔씩 전화통화를 하였다.

인도네시아의 섬들 중에서 수마트라섬의 또 다른 부속 섬인 바탐이라는 섬에 공항을 건설하는 공사라고 했다. 몇 차례에 걸쳐서 공사가 진행될 예정인데 지금은 공사의 초반이라고 했다.

지리적으로나 생활 권으로 보나 싱가포르에 가깝기 때문에 우리 여행객들도 많다고 했다. 또한 회사 사옥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많아서 크게 불편한 점은 없다고 했다.

매번 전화할 때 마다 보고싶다고 했다.

나는 지도 상에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가 있을 미혜를 생각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1년째 사귀고있던 내 아내가 될 혜진에게 정성을 쏟았다.

내 나이도 있고 해서 이제는 결혼을 전재로 사귀고 있는 중이었다.

미모와 여성스러운 애교 그리고 성격 등에서 이 정도라면.... 하고 생각할만한 여자였다.

무엇보다도 미혜가 떠나고 나서부터 내가 정성을 들이고 그러면서 내 눈에 콩깍지가 쓰이 듯 눈이 멀게 되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혜진과 미혜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비슷한 면 보다는 차이가 나는 면이 많았고 그런 점들이 나의 평가에서 더 우위로 작용하고 있었다.

미혜의 성격이 모나지 않고 순종적이라면 혜진은 개성 있고 자기 주장이 강했다.

미혜가 자기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데 반해서 혜진은 애교가 많고 솔직한 편이었다.

이런 것들은 혜진이 서울에서 태어났고 밝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미혜가 글래머형의 풍만한 몸매를 가진데 비해서 혜진은 좀더 날씬하고 부드러운 몸매를 가지고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3살이 적고 미혜 보다도 1살이 적었다.

나는 미혜에게 그녀의 존재를 밝히지 않다가 결혼 날짜를 잡고서야 이야기 해 주었다.

미혜가 떠난 후 해가 바뀐 1993년 봄이었다.

그 때 미혜는 상당히 맥이 빠진 듯 실망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역력했다.

그리고 자기도 6월쯤에 둘째 아이를 출산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와서 낳아야 할지 현지에서 낳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형식적인 축하의 말을 해주었다.

얼마 후에 미혜는 자연이와 함께 귀국을 했다. 둘째 아이의 출산을 위해서 였다.

귀국하는 날 마중 나가서 잠깐 봤는데 배도 많이 불러있었고 뚱뚱해져 있었다.

고향인 친정에서 묵을 예정이라고 했다. 마중 나온 동생을 따라서 내려갔다.

나는 1993년 10월에 결혼을 했다.

미혜는 그때까지 몸 조리를 겸해서 인도네시아로 가지않고 있다가 내 결혼식에 얼굴을 비췄다. 전에 보았던 뚱뚱한 모습은 없고 다시 예전의 모습을 회복해 있었다.

자연이와 이제 4개월이 채 안된 아이를 안고있었다.

내가 잠깐 한가한 틈을 타서 내게로 와서 말했다.

"신부가 참 예쁘네. 이제는 나 같은 건 잊어버리겠어?"

"후후.... 전하고 같을 수는 없겠지...... 잊지는 않을게..."

나는 내 결혼식장에 미혜가 나타난 것도 불안했지만 일부러 찾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너무나 불안하고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악의적인 말이 아니고 그냥 과거의 애틋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안심이 되었다.

5살이 된 자연이가 나를 못 알아보는 것도 조금은 섭섭했다.

나는 처음으로 미혜에게 내 아내를 소개 시켰다.

웨딩드레스에 신부화장을 한 혜진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날씬하고 큰 키가 웨딩드레스와 아주 잘 어울렸다.

미혜는 축하의 말을 전하고 너무 예쁘다고 칭찬했다.

"언니. 우리 오빠 행복하게 해주세요."

"고마워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알아보니 미혜도 다시 인도네시아로 떠났다고 했다.

결혼 후에 나는 동생 영미와 영애와도 따로 살게 되었다.

신혼의 단 꿈에 젖어서 미혜와의 일은 까마득히 잊혀지고 있었다.

아내와의 섹스는 미혜와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편이었다.

성격에 있어서 혜진은 명랑 발랄한 편인데 반해서 섹스는 미혜가 솔직하고 능동적이었다.

몸매의 느낌은 미혜는 풍만하고 안았을 때 가득찬 느낌이라면 혜진은 외형으로는 날씬하지만 안고있을 때의 부드러움은 뼈가 없는 듯 내 품 안에 녹아 드는 느낌이었다.

선천적으로 골격이 작은 편이라서 이런 느낌이 들지 않나 싶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도 둘은 달랐다.

미혜는 한번의 오르가슴을 깊고 격정적으로 느끼는데 반해서 혜진은 조용한 편이고 한 번의 행위에서 여러 번 느낀다고 했다.

미혜와는 다투는 일이 거의 없다. 사소하게 다투어도 그 자리에서 화해가 되는 편이다.

내 아내와는 티격태격 다투는 일이 많다. 화해도 하루 이상이 가는 경우도 있다. 내가 져 주어야만 싸움이 끝난다.

하지만 나는 아내를 무척 사랑하고 아내와의 섹스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94년 4월에 나의 첫 아들 주현이가 태어났다. 결혼 날짜와 비교하면 3개월 정도 빨리 태어난 셈이었다.

또 그 해 7월에는 미혜네 가족이 귀국했다.

미혜의 이사와 집들이가 끝나고 한 달쯤 지나서 상규가 술 한잔 하자며 불렀다.

상규네 회사 근처인 종로에서 만났다.

상규는 직장생활 6년째인데 벌써 과장 진급을 눈 앞에 두고있다고 했다. 해외 파견이 진급에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이 된다.

나도 직장생활이 4년째로 회사 내에서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다. 하지만 직급은 이제 겨우 대리에 진급한 형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그 동안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주로 상규가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 들을 이야기하고 나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내가 상규에게 손위 처남으로서의 권위적인 면이 없고-물론 먼 친척이었기 때문에-허물없이 지내는 편이라서 상규는 미혜의 친 오빠인 남진이 보다 오히려 나와 더 친하고 친구처럼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였다. 그렇지만 사회 경험이나 직급 등에서 나는 한 수 아래임을 속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상규는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술을 마시는 것이나 돈을 쓰는 것이 화끈했다.

몇 번의 술자리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아가씨가 나오는 술집까지 가고 나중에는 파트너를 데리고 2차까지 나가게 되는 정도 까지 발전했다.



자연이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쉽게 만날 기회는 없었다.

특별한 날에나 가끔씩 들러서 선물을 사주고 용돈을 주곤 하였다.

결혼 후에는 나도 용돈을 타 쓰는 처지라서 예전처럼 비싼 선물은 사 줄 수가 없었지만 유치원에 다니는 자연이가 좋아할만한 인형이나 퍼즐 맞추기 같은 선물을 사주면서 예전처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가족끼리 교류 방문하는 것으로 그런 기회를 종종 만들었다.

2년이 지난 96년에는 자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내가 아내 몰래 자연이 옷과 가방을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는 나의 둘째 아들 무현이가 태어났다.



다시 1년 정도가 지난 97년에 상규는 또 직장을 옮겼다.

그때까지 다녔던 회사보다는 지명도는 낮지만 거의 대등한 그룹계열의 건설회사로 직급도 한단계 높은 차장급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상규는 직장에서의 능력을 인정 받기 위한 정렬이 대단했다. 그것을 위해서 시간과 몸을 혹사한다고 표현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해외 파견도 그렇고 경우에 따라서는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일을 하고 접대를 하고 술로서 절어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가정과 가족에게는 소홀한 면이 없지 않았다.

반면 나는 그 동안 한 회사에 7년째 다면서 과장에 머물러 있었지만 직급에 크게 연연해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건설 분야와는 달리 소프트웨어 분야는 지방 보다는 서울에 고객사들이 편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파견근무는 별로 없었고 피할 수 있는 한 피했기 때문에 서울에서만 거주할 수 있었다. 나도 직장에서 인정 받기 위한 노력은 많이 했지만 상규에 비할 바가 못되었고 또한 나는 가족과의 시간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편이어서 그 부분에서도 상규와 다른 점이었다.

상규는 직장을 옮긴 후에 서해대교 공사현장에 파견을 가게 되었다.

자연이가 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상규 혼자서만 평택으로 내려갔다.

그 해 연말에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고 우리 셀러리 맨 들은 전전 긍긍하며 몸조심 해야 했다. 무수한 중간 관리자들이 명예퇴직이라는 명목으로 회사를 그만 두었다. 다행히 나는 신임 과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위기의 상황을 피해갈 수 있었다.

98년 가을이 깊어 갈 무렵 나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상규가 공사현장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상규는 현장에서 직접 일하는 업무는 아닌데 점검차 나갔다가 상당히 높은 곳에서 추락하여 머리를 많이 다쳤고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서울에 이송하여 서울대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나는 회사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병원으로 갔다.

중환자실에 있기 때문에 면회도 되지 않고 미혜의 시댁 식구만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목례를 하고 상태를 물어봤다. 그들도 걱정만하고 좀더 지켜봐야 한다고 할 뿐 정확한 상태는 모른다고 했다.

6시가 되자 면회가 허락되었다.

멸균복으로 갈아입고 안으로 들어가니 비닐 같은 것으로 칸막이가 되어있는 침대 위에 붕대로 전신이 감겨있는 상규가 누워있었다. 그 옆에는 초췌한 표정의 미혜가 눈이 퉁퉁 부은 상태에서 또 다시 울며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미혜에게 곧 나을 수 있을 거라며 위로하고 조금 지켜보다가 나왔다.

미혜는 나를 따라 나와서 나는 한참 위로해주고 돌아왔다.

나는 자주 면회를 했지만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미혜가 들려준 의사의 말은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는 서서히 좋아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희망을 잃지 말고 기다려보라고 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당숙과 당숙모도 다녀가고 남진이도 차례로 다녀갔다고 했다.

상규의 병세는 해를 바꿔서도 차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다음해 설을 넘기고 그러니까 사고가 난지 4개월을 조금 넘기고 결국은 운명을 달리했다.

1999년 그의 나이 36세. 결혼한지 10년에 딸 둘(하나)과 아직은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남기고 아깝게도 떠나고 말았다.

장례식은 그 병원의 영안실에서 치러졌다.

나도 고인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으로 애도를 표하고 명복을 빌어주었다.

하얀 소복을 입고 오열하는 미혜가 한없이 슬퍼보였다. 내가 위로해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미혜의 시댁 식구들과 함께 병원과 장례비에 대한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해 주었다.

한 달쯤 지난 어느날 미혜네 집을 방문했다.

미혜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있었다. 아이들은 거의 그늘진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자연이는 이제 11살로 초등학교 4학년이고 동생인 소연이는 7살로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미혜는 조용히 나를 맞아 주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미혜가 앞으로 살아 갈 일을 걱정하자 금전적으로는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보험을 들어놓은 것이 있었는데 고인이 의식 불명상태로 오래 있다 사망했기 때문에 3억원 정도가 나왔다고 했다. 거기에다 회사에서 보상금도 나오고 해서 당분간은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저축도 꽤 있고 집이 자기 집이기 때문에 전 재산이 5억이 넘을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자연이 소연이 교육비가 만만찮을 텐데 너도 일을 해야 하지 않겠니? 분위기도 바꿀 겸......"

"응. 그래야 겠어. 피아노 학원이나 운영해볼까?"

"그래. 너 피아노 잘 치지?"

"응 천천히 생각해보고......"

"그래. IMF 이후에는 어떤 일도 경쟁이 심해서 쉬운 게 없어. 신중하게 결정해야지.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 받으면 서운해 할 거다."

"응."

"아이들은 아빠 많이 찾지 않니?"

"아이 아빠가 집에 없는 때가 많고 평소에도 많이 놀아주지 않아서 별로 찾지 않아."

"그런 면에서는 불행 중 다행이네. 자연이 공부는 잘 하니?"

"잘 하는 것 같은데 요즘은 학교에서 성적을 평가하지 않잖아. 그래서 알 수가 없어."

"자연이 점점 예뻐지네."

"........"

내가 결혼한 후 애써서 미혜와의 관계를 공식적인 것으로만 한정하려고 했지만 자연이로 인해서 어쩔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묶여있다는 것이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 그만 갈게."

"오빠 더 있다가. 저녁밥도 먹고."

"집에 얘기도 안 하고 왔어....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그럴 거면 뭐 하러 왔어? 오빠한테 하소연도 좀 하게 천천히 가. 응?"

"그래. 알았어. 저녁밥만 먹고 갈게."

아이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묵묵히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오빠! 나 오빠 집 근처로 이사할까?"

"글쎄. 서로 의지하고 좋기는 하겠지만.... 솔직히 얘기해서 너와 나는 워낙 특별한 관계라서.... 나는 좀 자신이 없어.."

"........"

미혜는 말 없이 섭섭함을 표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생각해본 뒤에 말을 이었다.

"너무 가까이는 말고 걸어서 10분 15분 거리에 있으면 식구들 끼리 서로 왕래할 수도 있고 또 서로 너무 얽매이지 않고 괜찮을 것 같다."

"응...."

"미안해. 너무 내 생각만 해서."

나는 미혜의 등을 다독여 주며 위로해 주었다.

"아냐. 오빠 말이 맞아. 내 생각이 짧았어."

"내 말대로 하자. 자연이랑 주현이 무현이랑 사이 좋게 지내는 것도 보고싶고...."

"알았어 그렇게 할게. 오빠가 집 좀 알아봐 줘."

"내가 전화로 알아보고 알려줄게 결정은 네가 해. 집은 여자가 봐야 꼼꼼하게 잘 보잖아?"

"응."

미혜는 건성으로 대답하는 듯 했다.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사실 마음속에 심한 갈등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규가 죽고 나서 심해지기 시작한 증상이었다. 슬퍼하는 미혜를 보며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옛 일이 생각나고 연민의 정이 피어 올랐다.

아니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내와 결혼 생활이 5~6년이 지나고부터 가끔 미혜가 그리워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참을 만 했다.

오늘 미혜에게 찾아오면서도 아련한 기대감과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상반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거의 20년이 지난 과거의 추석날에 일어난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때도 처음 말을 꺼내지 못해서 그랬지 한번 말이 나오자 겉잡을 수 없이 우리는 가까워 졌었다.

그리고 미혜가 결혼 한 후에도 서로의 의사가 통하자 거리낌없이 불륜이 시작되었었다.

지금이 또 한번의 계기이다.

달콤한 금단의 열매와 사회적인 관습 ? 나는 끝내 결론을 낼 수가 없었다.

"........"

"........"

"오빠! ......"

"........"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팔로 살며시 감싸며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울지마. 나도 네 마음 알아. 조금만 시간을 더 갖고 생각해 보자. 마음이 정리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

아이들이 울먹이는 엄마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있었다.

"그래...."

나는 섭섭해 하는 미혜를 남겨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지금의 아내와 미혜 두 여자를 각각의 다른 집에 거느리고 탈없이 살아 갈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장미 빛 인생이다.

그렇지만 나의 처지는 예전과 다르다. 질풍노도의 스무 살짜리 무책임한 젊은이가 아니다.

한 여자의 남편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다.

나는 지금의 우리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라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

지금의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

미혜나 자연이는?

아마 모르긴 해도 거의 마찬가지 일 것 같다. 사회적인 눈만 피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동안의 미혜에 대한 나의 정과 헌신적인 그녀의 사랑을 생각하면....

그러나....

위험하다.

특히나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혜와는 사회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사이....

만약에 세상의 누구에게라도 알려진다면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얼굴을 들고 살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열매가 달콤한 대신 잘못하면 치명적인 독이 된다. 목숨이 걸린 문제다.

미혜의 성격 상 우리 사이의 관계를 발설할 염려는 없다. 또한 나에 대해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조심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 보다 두 배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한 번만 실수를 해도.... 한 번만 부주의를 해도....

특히나 여자의 육감은 남자의 그 것과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만약에 내 아내가 알게 된다면 나의 행복은 산산조각이 난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그렇다면?

미혜와의 새로운 관계는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달콤한 열매의 유혹을 이겨내야만 한다.

아! 아!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미혜. 나를 사랑했던 미혜가 슬픔에 빠져서 나를 원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내 딸을 낳아준 여인이 나를 원하고 있다......

아직도 사랑스러운 옛날의 연인이 나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나도 마음 속으로는 그녀를 원하고 있다......

겉으로는 조용하고 부드럽지만 마음 속에 불 같은 정열을 담고있는 여인.

33세로 아직은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혼자된 여인.

나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던, 너무도 헌신적이었던 여인을 몰인정하게 외면해야 한단 말인가?

상규의 죽음은 나에게도 너무 큰 시련을 가져다 주고있었다. 그리고 나는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머리 속에는 온통 미혜로 가득 차 있었다.

아내를 안을 때도 나는 빈 껍데기인 듯 했다.

나는 젊었을 때에 어느 정도는 장난기와 바람기 그리고 성적인 호기심과 육체적인 쾌락의 대상이었던 미혜와의 모든 일들을 상기해보며 내가 진심으로 미혜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인 소꿉장난하던 시절부터 처음 이성으로 만났던 열 여섯 살의 순결, 그리고 내 딸을 낳기 위해 일찍 결혼한 일, 그 이후의 불꽃 같은 미혜......

나의 35년의 인생 중 거의 대부분을 미혜가 관통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결혼한 이후 최근 칠 팔년 사이에도 문득문득 미혜를 생각하며 그리워했던 일을 상기했다.

아! 아! 그래!

나는 미혜를 외면할 수 없어....

미혜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을 一片丹心 나를 위해서 희생했다고 할 수도 있다.

나는 이제서야 미혜의 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헌신적인 것이었나, 그리고 나의 무책임함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내 아내와 내 아이들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미혜와 자연이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혜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려 가고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다른 사람보다 두 배의 행복을 얻기 위해 모험을 하는 쪽으로 결심을 굳혀가고 있었다.

그 두 배의 행복을 위해 몇 배의 고통이 뒤따른다는 모순에는 둔감해져 있었다.

미혜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나의 욕심이 앞서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빨간 유혹의 열매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조금 지난 어느날 미혜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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