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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색 단검 - 1부

야설 0 14361

어깨가 약간 아픈 것을 빼고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심정이었다. 훈련용 검을 3천 번 휘두르기란 달성하기 어려운 과업을 오늘 완벽하게 끝냈기 때문이었다. 모든 기사 지망생들이
그러하듯 견습 기사 훈련소에서 쓰는 검은 웬만큼 단련된 기사도 여러 번 휘두르기 힘겨울 정도로 묵직하다. 더군다나 그리 큰 체격도 아닌 나는 처음에는 1천 번도 휘두르지 못하고
포기했었다. 
하지만 나는 반복되는 검 휘두르기가 힘보다는 기술에 많이 의거한다는 교관의 설명에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은 채 수많은 나날들을 빠짐없이 훈련소에 다녔고 그 결과가 오늘 나타났던 것이었다. 비록 이것이 정식 기사가 되는 시험에 통과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하나의
벽을 넘었다는 성취감에 나는 하늘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단지 시끌벅적하고 사람이 많은 시장통과도 같은 거리였기에 그 성취감을 아주 멋대로 발산할 수 없다는 게 약간
아쉬웠다. 나는 허리에 채워진 롱 소드를 뽑아들고 이리저리 휘두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조금 빨리 거리를 걸었다.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유피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순간 어깨에
아주 강한 부딪힘이 느껴졌다.


나는 몸을 조금 비튼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 들떠서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을 미처 못 봤나 싶었지만 그 어깨의 부딪힘이 꽤 거칠었던지라 먼저 사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바닥에 쓰러진 그 누군가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땐 그 따위 생각은 모조리 날아가버릴 정도로 의외의 상황이었다. 가냘퍼 보이는 뒤태로 한눈에 짐작할 수 있듯 여자였고
연녹색 셔츠에 짧은 스커트 밑으로 뻗어 나온 기다란 다리는 그 여자가 누군지 얼핏 더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엘프?............................................” 


물론 엘프가 마을에 나타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본래 엘프는 숲 속에서 사는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지만 비슷한 외모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성과 언어적 측면에서 인간과
상당량 흡사했다. 그래서 인간과 엘프는 서로 공존한 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고 정부에서도 이미 수백년 전부터 엘프와 인간의 교류를 정식으로 허가했다. 이 엘프도 무언가를 사려고
마을에 내려왔다가 앞뒤 분별 못하고 질주하듯 걷는 한 청년에게 약간의 봉변을 당한 게 틀림없었다.
 

“아... 저... 죄송합니다..........................................” 


나는 일단 본능적으로 더듬거리 듯 사과를 했으나 쓰러진 여자 엘프는 일어설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몸을 약간씩 떨고 있는 걸 보자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좌중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거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뭔 일인가 싶어서 하나 둘 멈춰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주 곤란한 상황이 야기됐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채자 나는 허둥지둥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어깨를 잡아 흔들어보았다.
 

“저... 이봐요?..................................”

“으음.......................................................”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그리고 기다란 금발 머리카락 사이로 삐져나온 긴 귀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엘프가 맞다는 걸 인지함과 동시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름다웠다. 물론
엘프 특성상 인간에 비해 빼어난 외모를 가졌다고 하고 또 나도 몇 번 봐 왔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아주 자세히 본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살포시 뜬 눈 사이로 보이는 갈색 눈동자가
날 응시한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야... 뭐...?.............................................”

“저... 두 사람... 아까 부딪혔는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돌아온 나는 다시 서둘러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힘이 빠져버린 것인지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세게 부딪혔다지만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어디 부러지거나 상처 입은 건 아니잖아? 심리적으로 너무 놀랐나?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 수군거림이 잦아졌다.
이대로 계속 대치해 있는 것도 곤란하다. 경비대가 와서 더 시끄럽게 일이 커지기 전에 일단 그녀를 일으켜 세워서 정말로 문제가 있는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나는 그녀의 한쪽 팔을
내 어깨에 두르게 하고는 힘을 주어 부축해 일으켰다. 의외로 순순히 일어나는 걸 보고 나는 약간 안도감이 들었다.

살짝 비틀거리듯 인적이 드문 한적한 거리 구석으로 데리고 간 나는 그녀를 버려진 상자 위에 앉혔다. 장사를 하는 건물이었는지 쌓아올려진 통들이 많았고 나도 옆에 통 하나를 끌고 와
같이 나란히 앉았다. 
사람들 시선이 대부분 돌아갔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쉬듯 하늘을 한 번 본 후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여자 엘프는 손을 치마 위에 얹은 채 고개를 떨구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질문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결국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감을 느낀
나는 나지막하게 물어보았다.
 

“괜찮아요?.............................................”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조금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그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를 본 순간 내 마음은 다시 설레었다. 이것이 엘프의 용모구나. 그러나 그러한 생각도 잠시 그녀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뭔가 아름다운 음성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데려다 줘요...........................................”

“네?...............................................”

“집에 데려다 줘요... 발목을 다쳐서 걷지 못하겠어요..............................................”


나는 온갖 생각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시선을 그녀의 발 쪽으로 돌렸다. 가죽 끈으로 이리저리 종아리를 감싼 굽이 있는 신발을 신고 있었으나 사실 딱히 그녀의 드러난 발목엔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기보다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아주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저... 당신네들 집이란 건 숲 속 아닌가요?... 여기서 엘븐 포레스트까지는 적어도 인간의 도보로 사흘은 걸릴 텐데 그곳까지 가기는 무리입니다.................................” 


그녀는 이번에는 고개를 조금 더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왠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 어색해서 시선을 조금 피한 채 말을 이어갔다. 아니 이어가려 했다.
 

“상황이 어찌됐든 간에 저로 인해 일어난 불찰이니 발목을 치료할 수 있는 사제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치료비도 제가......................................”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집이 있어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자르듯 말을 했고 나는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잃은 채 멍청히 그녀를 마주보았다. 여자 엘프는 보충 설명이라도 하듯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길 저쪽 편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서 엘프 중에는 인간의 마을에서 집을 빌려 눌러 사는 엘프도 있다는 얘기를 아주 어렴풋이나마 기억해냈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보았고 여자 엘프는 덤덤한 표정을 일관한 채 그러는 나만 바라보았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녀를 일으켜 세워 어깨를 부축했다. 나와 비슷해보이는
나이의 외모답지 않게 그녀는 마치 소녀처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내게 기대왔고 나는 여자 엘프의 가슴이란 것을 셔츠 위로 느끼면서 한걸음한걸음 전진했다. 아주 최대한 자연스럽게
무언가의 임무를 수행하는 표정을 연기했다.


여자 엘프의 집은 골목의 꽤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간단히 손가락만으로 가리켰던 처음의 행위에서 짐작하지 못한 어려운 과정을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어깨를 부축한
그녀의 방향 지시에 따라 겨우 도착한 곳은 또 한번 의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생각보다 상당히 아주 낡은 판잣집 비슷한 곳이었다.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음산한 골목길과
판잣집을 번갈아 보면서 나는 도대체 이 아름다운 엘프가 왜 이런 곳에 살고 있지 하는 생각을 반복해서 되뇌었다.
 

어쨌거나 도착하자 그녀는 팔을 두르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문을 열고 안쪽을 가리켰다. 나는 신발을 벗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 그녀가 먼저 발을 내딛는 걸 보고 그냥
들어갔다. 아직 환한 느지막한 오후인데도 그녀의 집 내부는 상당히 어두침침했다. 살림도 별로 없었다. 한쪽 구석에 모아진 여행 도구들이 내 시야에 들어옴으로써 무언가 일이 있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라는 걸 짐작케 했다.
 

“휴우..............................................................” 


여자 엘프는 이제 좀 편하다는 듯 바닥에 깔린 모포 위에 주저앉고는 발목을 주물렀다. 사실 딱히 다친 것 같진 않아 보였으나 내가 치료사가 아닌 이상 확실히 해둘 필요는 있었다. 나는
잠시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다 앞에서 무릎을 굽히고 앉아 넌지시 물었다.
 

“괜찮아요?... 사제를 부르지 않아도........................................”

“네... 괜찮아요... 고마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다시 얼굴이 확 붉어짐을 느꼈다. 표정도 제대로 살피기 용이하지 않은 침침한 집 내부에 아이러니
하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어쩐지 더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차마 나오지 못하는 말을 억지로 꺼내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뒤돌아서는 나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저기요................................................”


나는 불과 반 걸음도 떼지 못하고 몸만 열려있는 문 쪽을 향한 채 멈칫했다. 어쩐지 그녀 목소리에는 알지 못하는 마력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이름이 뭔가요?..............................................”

“예?... 그... 그건 왜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다시 보면서 되물었다. 어쩐지 급작스럽게 경직해가는 심적 변화를 느끼며 하지만 여자 엘프는 여전히 발목을 주무르며 한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까지 데려와주신 게 너무 감사해서... 이름이라도 좀 알고 싶어서요.......................................”


아주 지극히 평범한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어째선지 그녀의 그런 물음마저도 온갖 생각이 머리 이쪽저쪽을 나돌아다닐 정도로 고혹적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곧 잡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피식 웃으면서 지나가는 음성으로 툭 건넸다.
 

“로키입니다... 성까지 하면 로키 크로슨이지만... 그냥... 편하게 로키로만 불리죠....................................................”

“흐음... 로키 씨... 좀 쉬었다 가지 않으실래요?... 엘븐 포레스트 특유의 잎 차가 있어서 잠시 맛보셨음 하는데요....................................”

“감사합니다만... 저는 지금... 막 견습 기사 훈련을 끝내고... 오는지라 빨리 집에 돌아가서 씻고 쉬고 싶습니다.............................................”


여자 엘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나는 그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진 짐작하지 못했지만 너무 매력적이고 아주 아름다운 미소라 자석에 끌리 듯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짧은 정적 후 여자 엘프는 일어섰다.
 

“흐음... 할 수 없군요... 그럼... 조금만 바래다 드리고... 아...........................................” 


그녀 자신이 주무르던 쪽 발목이 일어섬과 동시에 안쪽으로 꺾이면서 그녀는 다시 주저 앉았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발목을 부여잡고 움찔거리는 여자 엘프를 보던 나는 잠시 후
그녀에게 다가가서 옷자락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녀의 발목에 단단히 고정해주었다.
 

“찬물을 뿌리면 통증이 완화될 겁니다... 가까운 시간 내에 사제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나는 일어서지 말라는 손짓을 하며 일어서려 했다. 그 두번째 동작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여자 엘프가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친절하기도 하셔라...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잠시만 쉬다 가세요... 재미있는 얘기도 하면서.............................................”


나는 순간 정신이 멍해지면서도 그녀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말과 행동이었다. 나는 부드러운 여자 엘프의 살결을 느끼면서 더듬거리듯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얘기를 하려면 이 팔은 풀어야.............................................”


그러나 그런 내 의사표현 마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쳐오면서 말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반사적으로 그녀를 밀어 떨쳐
놓으려 했지만 가냘퍼 보이는 여자의 외모와는 달리 그녀의 팔 힘은 강력했다. 나는 당황하며 훈련소에서 검을 휘두르던 힘을 모아 그녀를 떨쳐놓으려 했으나 그렇게 세게 붙잡을만한
여자 엘프의 몸 구석을 찾지 못했다. 아니 이 모든 것을 떠나 나는 제대로 힘조차 쓰지 못했다. 여자 엘프의 나긋나긋한 살결과 부드러운 입술이 내 혼을 아주 모조리 뽑아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키... 키스?..............................................’ 


그러한 생각이 들 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그녀와 입술을 맞물린 채 가만히 있었다. 여자 엘프의 혀가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면서 내 혀와 마주했다.
엘프의 침은 어쩐지 달콤한 타액 같은 맛이 났다. 딱히 숲 속의 향기 같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몸 곳곳에서도 기분 좋은 향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나는 정신이 아주 몽롱해짐을 느꼈다.
머릿속이 온통 키스에 대한 생각으로 뒤덮이려는 찰나 그녀는 입술을 떼었다.
 

“후웃................................................”

“푸핫......................................................”


나는 한쪽 손을 바닥이 짚고 다른 쪽 손으론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숙이곤 숨을 골랐다.


“허억... 허억...!... 이... 이게 무슨 짓................................................”


그러나 그 물음조차도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여자 엘프는 언제 발목의 부상이 있었냐는 듯 벌떡 일어서서 어느새 문가로 또각또각 걸어갔던 것이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릿결과
기다란 여자 엘프 특유의 희고 고운 다리의 뒷모습을 본 나는 정신이 또다시 새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여자 엘프는 가벼운 동작으로 손을 들어 판잣집의 문을 닫아버리고는 빗장을 걸어
잠갔다. 나무로 된 빗장은 못과 함께 걸려진 구식 빗장이었으나 쉽게 풀어질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상스레 어두침침한 내부가 알고 보니
창가 쪽에 드리워진 커튼들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또각거리며 걸어오는 여자 엘프 나는 멍청히 그런 그녀를 올려다본 채 ‘내가 물어본 게 그게 맞아’ 따위의 바보 같은 호응도 할
여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몸을 떨며 반대로 내가 다친 것처럼 주저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런 나를 내려다본 그녀는 무릎을 굽히며 앉곤 손가락을 내 턱 밑에 갖다 댔다.
 

“인간의 성욕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서죠........................................” 


나는 눈동자조차 떨리는 듯한 기분으로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무슨 의미인지 머릿속으로 되뇌려 했다. 물론 그녀는 그런 여유마저도 제공하지 않았다. 약간은 연해 보이는
자신의 분홍빛 입술을 살짝 핥으면서 여자 엘프는 꿈결같이 중얼거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자지는 어떤 맛일까... 랄까요?............................................” 


그녀의 손가락이 차츰차츰 내 턱에서 입술 쪽으로 훑으며 올라왔다. 나는 마지막 발악인 듯 목소리를 쥐어짜 말했다. 어째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 훈련 때 기력을
모두 소진해서일까? 아니면 방금 전의 키스로 여자 엘프가 내 기력을 무슨 마법 같은 것으로 빼앗았나? 그러나 원인이 어찌 됐든 지금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엘프는 이런 짓 따윈 절대 하지 않는 품위 높은 종족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머... 그건 또 어디서 들은 얘기에요?... 성(性)에 관심이 있는 건 인간이든 엘프든 똑같아요... 단지 겉으로 잘 보이지 않는 것 뿐... 난 당신이 맘에 들어버렸어......................”

“이러지 마요.............................................”

“흐음?... 당신도 싫진 않은 것 같은데... 절 보고 얼굴을 붉힌 건 그저 순간적인 충동에서였나요?......................................”

“난... 이미 애인이 있어요... 유피라는 여자친구.........................................”


무심코 말을 내뱉던 나는 순간 입을 닫아버렸다.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나를 잠시 쳐다보던 그녀는 쿡쿡대며 고개를 숙이곤 웃었다. 어쩐지 나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소녀
같은 행동을 하던 그녀의 모습이 내게로 옮겨진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래... 그 애인분과는 이런 걸 같이 안 하나요?...........................................”

“아직은...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가벼운 사이가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반쯤 돌린 채 본래의 이성을 찾듯 하지만 여전히 별 효력 없는 껍데기뿐인 말을 더듬거리며 내 뱉었다. 그녀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더욱 더 심하게 쿡쿡거리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리곤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생긋 미소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귀엽기도 해라... 하지만 오늘 만큼은 상념 다 떨치고 육욕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요?..................................”


여자 엘프의 가느다란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팔이 내 목을 또다시 감싸왔다. 나는 흠칫하면서 커다래진 눈을 어디다 둘지 모른 채 그저 뻣뻣하게 앉아 있었다. 어느새 상당량 밀착해온
그녀의 조그마한 입술이 벌어지며 귓가를 간지럽히듯 속삭였다.


“긴... 시간도 아니에요... 잠시만 즐기다 가요... 이것도 인연인데...............................................”


‘만들어진 인연이겠지..............................’


나는 잘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하지만 그렇게 내 뱉으려다 결국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도로 삼켜졌다.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절망감이 환희와 쾌락을 동반한 채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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