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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색 단검 - 6부

야설 0 3763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미소띤 얼굴로 찬거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돌 그릇에 마늘을 빻기 시작한 그녀를 보며 나는 그녀가 거짓말을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정말로 모르는
건지를 가늠해보았다. 그러다 곧 참으로 시시한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단 걸 깨닫고는 배부를 때까지 한껏 수저를 놀렸다.
 

“휴우... 뭐야... 맛있잖아..........................................”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는 잘 먹었다는 의미로 배를 쓰다듬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감사하다는 의미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어째... 요리 솜씨가 더 는 것 같다?......................................”


하지만 식탁을 치우는 유피는 여전히 편안한 미소로 일관했다. 나는 그만 멋쩍어져 머리를 긁으려 했고, 그러는 찰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차 한 잔 먹을래?..............................”

“어?... 어... 그럼 고맙지............................................”

“오렌지 차로?...............................................”

“응... 꿀은 조금만 놓고.......................................”


나는 그녀가 물을 끓일 동안 문득 나도 모르게 일상적인 취향을 그대로 요구했다는 걸 깨달았다. 보름 가량 연락을 아예 끊고 지내다시피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이 익숙한 분위기는
나는 유피의 눈치를 살피려 벽에서 등을 떼 상체를 조금 세웠으나 뒤돌아 앉아서 뜨거운 물을 컵에 따르는 그녀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좀 더 자세히 볼까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여전히 뒤돌아 앉은 채로 들려왔다.
 

“요즘... 검 수련은 어때?.....................................”

“어... 어... 그냥 그렇지... 거의 마무리 단계니까 자세만 제대로 교정 중이야...........................................”

“힘들지 않아?...............................................”

“별로... 이젠 아예... 익숙해졌달까?... 하하... 그 무서운 교관도.................................................” 


교관 얘기가 나오자 그녀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웃는 듯한 동작이었는데 아무래도 그 때 내가 팔을 굽혀 보이며 ‘삶에서 견지해야 할 아름다움 어쩌구...’ 했던 것을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얼굴이 좀 붉어진 채 시선을 옆으로 슬쩍 두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차 맛을 우려내는 데만 열중하는 듯했다.
 


“지난번에 이상한 얘기 했던 것 미안해............................................”


보름이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그녀가 말하는 ‘지난 번’이 언제인지를 한번에 떠올리고 있었다. 나 또한 꺼림칙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때였으니까 그녀는 숨은 몰아 쉬듯 한번에
조금 길다싶은 문장을 뱉어내었다. 아무래도 나를 만나면 해야겠단 얘기를 줄곧 머릿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던 듯하다.
 

“나는... 그저 네가 걱정되었을 뿐이야... 무언가 내가 도움이 될만한 걸 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너무 지나쳤나 봐...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서 네 미소를 보아야만
 안심되고 다행이라고 했던 것... 내 자신의 이기라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난 단지... 오래고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어... 그뿐이야............................................”
 

아주 격앙되는 말을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내 뱉으려 하면서도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유피. 나는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뒤의
‘이해할 수 없다’는 건 표면적인 부분이었다. 왜 그녀가 사과하고 있지? 잘못하는 건 나 아닌가? 왜 유피가 그렇게 무리하면서까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아... 참... 차 식겠네... 여기...............................................” 


감정을 겨우 추스른 듯한 그녀는 서둘러 접시에 찻잔을 들어올렸고 나 또한 그냥 듣고 있었다는 태도를 연기했다. 그러나 그녀가 일어서서 내게로 한두 발자국 다가오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툭 하고 물어봤다.
 

“정말... 그것으로 괜찮아?............................................” 


나는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 이라는 게 어떤 의미의 관계를 말하는 건지 유피는 대번에 짐작해버린 듯 했으니까. 그녀의 눈이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순간 발을
휘청거렸다.


“아........................................................”

“이... 이봐... 괜찮아... 유피?......................................................”


나는 얼른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당황해서 무릎을 굽히고 앉아 옆의 아무 수건이나 들어 바닥을 닦아나가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 칠칠맞지 못하게... 이건... 저..............................................”

“데이진 않았어?... 다친 데는?................................................”

“다시... 새로 끓여줄 테니까..............................................”

“손... 좀... 봐.......................................”


그녀의 팔목을 잡아 끌려 했으나 유피의 팔은 그녀의 의지로 완강하게 고정돼있었다. 나는 찻잔이 깨질 때보다 더욱 놀랐고 그것은 그녀의 젖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난... 괜찮으니까!......................................................”


내게서 얼굴을 반쯤 돌린 유피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참으려는 의도가 아주 역력했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 따윈 비웃기라도 하듯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것은 엉망진창으로 젖어버린 바닥 위로 한두 방울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유피를 끌어안았다. 자격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여전히 그녀가 걱정하는
걸 말할 순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저 그녀를 끌어안고 싶을 뿐이었다. 침묵으로 일관된 적막함 속에서 유피의 흐느낌만 귓가를 어지럽혔고 나는 그럴수록 더욱 그녀를 끌어안았다.
 

“흐... 흣... 흑.......................................................” 


보름달에 가까워지는 밝은 달빛이 등불 하나 없는 골목길을 아주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달빛이다.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유피의 손을 차마 먼저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었다. 정적이 길어지자 유피는 얼른 자기 쪽에서 손을 빼었다. 나는 무언가 지탱하던 사슬이 끊긴 것처럼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유피는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의외로 강한
면모도 있는 여자다. 하지만 여전히 집으로 발길을 돌리기가 어렵다. 유피는 일부러 시선을 딴 데로 돌리며 시간을 가늠하는 듯했다.
 

“늦었지... 얼른 돌아가 쉬어...............................................”

“응....................................................”


문득 고개를 돌린 그녀의 머리 한쪽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나는 무거운 눈빛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머리핀...’


내가 유피에게 선물했던 것 언제 사준 건지 기억도 안 났다. 해를 거듭할 정도로 오래 전의 일이니 하지만 분명했다. 그저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눈에 띈 장물 상인에게서 별 생각 없이
사주었던 것이다. 
나는 몸을 돌리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유피에게서 멀어져 갈수록 발걸음은 조금씩 빨라져 갔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저만치까지 멀어진 유피가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도 건성으로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나와 그녀는 서로
은연중에 이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터였다.
 

내일부터 그녀는 다시 훈련이 끝나도 마중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나와도 예전 같은 느낌은 없을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규칙적으로 떼는 발걸음 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면 큰길이
나올 거고 그녀와 나는 다시 각자의 생활로 돌아간다. 물론 오늘은 시간이 시간인 만큼 선택지가 별로 없겠지만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여자 엘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순간에 왜 그녀가
떠올랐는진 몰랐지만 그리고 겹쳐지는 유피의 모습 
나는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곤 뒤를 돌아보았다. 유피는 여전히 그자리에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가 또 돌아본 걸
눈치채곤 손을 다시 흔들었다. 아니 흔들려 했다.


“어... 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겠지 내가 달려갔으니까 눈이 동그래지는 그녀의 놀람을 무시하고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그대로 그녀에게 뛰어오르듯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하늘색 원피스
치맛자락이 밑으로 축 처질 정도로 그녀는 뒤로 몸이 꺾였다. 꽤나 아팠을 법하지만 나는 그러한 생각도 무시하고 그저 그녀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로키...?........................................”

“미안해... 미안... 미안해..............................................”

“로키................................................”

“내가 미안했어... 내가... 내가...............................................”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유피에게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되풀이했다. 무엇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녀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아파.............................................................” 


어리둥절한 그녀가 가느다란 소리로 그 한마디를 내 뱉었을 때야 나는 겨우 끌어안았던 몸을 놓았다. 유피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상태였고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반복했던 말을 또 한번 건넬 수밖에 없었다.
 

“미안... 해..............................................................” 


그녀는 피식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할까 생각할 동안 이번엔 그녀가 끌어안아왔다. 나는 좀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나를 이해한다는
몸짓이었다. 나도 그녀를 마주 껴안았고 유피는 그렇게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등을 토닥거렸다.
 

“이제... 괜찮은 거야?................................................” 


왜 그랬는지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궁금할 법도 했지만 그녀는 그 중간과정을 모조리 생략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더욱더 옭아매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할 강력한 옭아맴 나는 또다시 울컥하고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간신히 그녀의 물음을 상기하고 짧게 대답했을 뿐이였다.
 

“그래.........................................................” 


유피는 그걸로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에 기댄 채로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그녀의 갈색 머리칼이 내 뺨을 아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마주 껴안다가 얼른
눈물을 찔끔 훔치고는 그녀를 약간 떨어뜨려놓았다. 그리곤 유피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은 채로 더듬거리듯 말하는 나였다.
 

“저... 유피... 그러니까 저어... 쭉 말하고 싶던 게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눈물이 고였었기 때문에 내 눈은 빨개져 있을 게 분명했지만 또 유피도 그걸 눈치채고 있을 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눈을 아주 동그랗게 뜨고 날 조금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하지만 역시 조금은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나... 나랑.................................................”

“.....................................................”

“나랑... 같이................................................”

“.........................................................”


나는 그녀의 어깨에 얹은 손을 거두어들이고 한쪽 무릎을 꿇고는 마치 주군에게 맹세하는 기사처럼 자세를 잡았다. 유피는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린 채 더욱 놀라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떨리는 게 얼핏 보이는 순간 나는 곧바로 내 뱉었다.
 

“정식으로 사귀어 줄래?..................................................................” 


그리고 잠시 후 가슴 위에 올렸던 손을 입으로 올린 채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유피 원망스러운 긴장을 받아버린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웃은 그녀는 다른 쪽 손으로 내 팔 옆쪽을
가볍게 쳤다.
 

“뭐야... 그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괜히 딴소리하나 긴장했잖아............................................”

“딴소리라니... 어... 그......................................................”


물론 프로포즈 할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관계를 좀 더 쌓고 싶었다. 그래 유피와의 관계. 요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속죄의 시간이라도 갖고 싶었는지
혹은 긴 시간 동안의 사귐을 정식 애인이란 단계로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싶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녀를 더 사랑해주기로 마음 먹었고 그녀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겠는가.


“좋아... 그럼... 그것을 수락하지....................................”


어느 새 평온함으로 다시 돌아온 유피가 두 눈을 살짝 감으면서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갈구하는 포즈로 무릎을 꿇고 있었고 유피는 다른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진 채
권위있는 자리에 오른 귀족마냥 선언을 했다.
 

“나... 에란시아 유피는 로키 크로슨에게 애인으로서의 신념과 충성을 받칠 것을 명합니다......................................”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유피는 손날로 마치 칼등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양 어깨에 한번씩 갖다 댔다. 이윽고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 둘은 한결 부드러워진 시선으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나는 그만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하게 일어섰다. 유피가 주먹을 들어보이며 히죽 웃었다.
 

“바람 피우면 죽는다!...........................................” 


이번엔 선 채로 경례를 붙이는 나는 그 전까진 몰랐던 행복감이 온 몸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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