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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X - 28부

관리자 0 4147
아침 일찍 일어나니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시커멓게 손을 내민 활엽수 가지위엔 은빛으로 반짝이는 하얀 눈가루가 소복히 쌓여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이 정도 눈이면 체인을 감아야겠지?”

“행님요, 도로에 차가 엉키면 출근이나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심더.”

“큰 도로는 제설차가 손을 봤을테니까 별 문제 없는데 오솔길 나서는게 문제야.”

“차 두댈 쓰지 말고 한 대로 갈까예?”

“넌 저녁에 어쩌려고?”

“눈 녹으면 가져가지예.”

“그래, 위험한 길이니까 한 대만 끌고 조심조심 가보자.”

트렁크에서 체인을 꺼내자 탁과장이 장갑을 끼고 차에 체인을 걸었다. 사륜구동이라 웬만한 눈길은 문제 없겠지만 아무래도 큰길까지 나가는 몇 개의 언덕을 넘기 위해서는 체인이 필요할 것이다.

“아휴, 올 해는 눈 다운 눈이 안와서 섭섭했는데 너무 멋져요.” 차가 언덕을 넘어가기 시작하자 명옥이가 말했다.

“아이 때는 눈이 그냥 좋기만 하더니 요즘은 눈이 무서우니 나이를 먹은 탓일까?” 숙이 근심스러운 듯 말했다.

“추울 땐 서민들만 고통이야. 길 미끄럽지 날 춥지. 어디 돈 안들고 넘어갈 일이 있어야 말이지.”

“행님요, 경기가 딱 얼어붙은게 요 앞 빙판 같네예.”

“맞다. 별 것 아닌 듯 보여서 무심히 지나가다간 딱 사고낼 장소구나.”

“좋아질 듯 좋아질 듯 하면서 계속 어려우니까 더 힘들어예.”

“그래도 우린 직장생활을 하니까 월급이나 바라보며 산다지만 딱히 돈 나올 곳 없이 장사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힘든 시간이다.”

“그래요,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도 죽을 맛이네요.”

“왜요, 잘 안되예?”

“요즘 잘 되는게 뭐 있니? 모두 몸 사리고 돈을 안푸는데.”

“하긴 우리회사 송사장도 예전같지 않다고 연신 성홥니더.”

“첨단제품일수록 힘들 땐 발목을 더 잡아대지. 네가 이럴 때 사장님의 힘이 되드려라.”

“마케팅을 배워야 겠어예.”

“그래, 넌 개발자도 아니면서 개발팀을 맡고 있으니 맘 아프겠다. 시간을 쪼개서라도 개발된 제품이 잘 팔릴 수 있는 방안을 함께 연구하면서 서서히 마케터로 입지를 바꿔봐.”

“알겠심더. 지가 만든 건 지가 팔아야제.”

“그리고, 너도 여자를 한번 울린 경험이 있으니까, 다시는 여자를 아프게 하지 말아라.”

“어쿠, 잘 알겠심더. 내겐 명옥이 뿐이라니까예.”



큰 길로 들어섰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체인을 풀고 달리기엔 무리가 있다. 차안에 따뜻한가 가득차고 네 명이 서로 대화를 하며 이동하는 통에 앞유리창엔 습기가 자꾸 달라붙는다.

“유리창이 자꾸 흐려지니까, 탁아, 아무래도 너랑 나랑은 입 다물고 있는게 좋겠다.”

“알았심더. 대신 교수님이랑 명옥이 네가 말 좀 많이 해라.” 탁이 뒤를 돌어보며 말했다.

몇일째 계속되는 잔잔한 추위 속에 강물도 흐름을 멈추고 얇은 얼음을 만들고 있다. 예전에는 몇일 추우면 몇일은 따뜻한 삼한사온이 있어서 겨울을 이기기엔 좋았는데, 요즘에 들어서는 그렇게 매서운 추위가 없는 대신 지속적으로 은근한 추위가 조금씩 더해가는 통에 오히려 추위를 타는 사람에겐 더욱 잔혹한 겨울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햇살이 조금 더 닿는 양지에는 파릇한 풀들이 철없이 피었다가 죽기도 할텐데 요즘 들어서는 그나마 보이지 않는다. 숙과 명옥은 뒷 자리에 앉아 소곤거리며 정겨운 자매의 정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눈 발이 내리는 통에 도로는 조금만 조심하면 오히려 운전하기엔 어렵지 않았지만 막상 회사에 도착해 보니 운전대를 잡았던 오른쪽 어깨가 빠질 듯이 아프다.



“공식적으로 같이 출근하니 너무 좋아요.” 숙이 환한 얼굴로 문을 들어선다.

우리의 관계를 모르는 직원들 때문에 회사 앞까지만 운전하곤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나타났던 얼마 전까지의 일들에 비해 이 사회에선 전혀 허용되지 않는 관계지만 나름대로 공식행사를 치른 지금은 적어도 이 직장에 의지해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 만큼은 수근거림을 허용하지 않는 숙의 대범한 조치에 의해 두 사람이 나란히 팔짱을 낀 채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따뜻한 공기가 방안에 가득하고 희미한 수증기가 폴폴거리며 오르다 사라지는 커피포트, 은은한 커피향을 담은 작은 찻잔, 등 뒤에서 비추는 따사로운 햇살 들이 기다리고 있는 내 방문 앞에서 숙과 헤어졌다.



“오셨어요?” 김미숙은 내가 방문을 열자 마자 따라 들어오며 커피포트에서 커피 한잔을 따라왔다.

“그래, 눈길에 힘들지는 않았고?”

“지하철 타고 다니잖아요. 이런 날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금 힘들었어요.”

“이제, 얼마 후면 개학이구먼.”

“아직 한달 남았어요.”

“한 달 동안 비서일만 하기도 바쁠텐데, 가까이 있으면서도 네 재능을 키워줄 기회가 없구나.”

“어제 하신 말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저도 수학에 관심을 더 갖기로 했어요.”

“그래라. 나라가 발전하려면 기초과학이 튼튼해야 하는데, 일반 기업체에선 돈도 안되는 학문에 투자할 여력이 없단다.”

“박사님 같은 분이 대학에서 학생들한테 호령 한번만 하면 정신차릴 애들도 많을텐데.”

“그럴 수만 있다면 호령이 뭐가 힘들겠니. 내 말을 믿고 따른 학생들이 막상 취업 전선에 나설 땐 그들을 받아 줄 기업체가 없다는게 문제지.”

“왜요? 기업체에서는 실력있는 학생들을 좋아하지 않나요?”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란다. 소수 기업은 원천기술 개발을 위해 노력하지만 더 많은 기업들은 남들이 만든 물건을 내다 파는데 전력하지. 그러니까 경영이니 무역이니 하면서 생활과 연관된 인문계열을 나온 사람들이 우선이고, 너희처럼 결과를 얻기 까지 험난한 길을 가야할 사람들을 뽑는데는 인색하게 되는거란다.”

“그럼 우리같은 사람들은 누가 뽑아주죠?”

“글쎄다. 조금 똘똘한 아이들은 평생 부와 명예를 위해 의과를 택하거나 고시 공부에 빠져 버리고 어줍지 않은 아이들만 갈팡질팡하며 아까운 젊음을 낭비하는구나.”

“진로를 바꿀까요?”

“어쩌면 그러는 것이 네겐 좋을 수도 있다.”

“박사님도 외로운 길을 혼자 걸었잖아요.”

“미친 짓꺼리였지. 아마도 네가 나의 길을 따른다면 험난한 인생여정만 남을 정도로.”

“그래도 박사님의 길을 따르고 싶어요.”

“그렇다면 너도 유학의 길을 택해봐라.”

“여기선 안된다는 말인가요?”

“우선 이 나라는 머리 좋은 사람들은 관료가 된단다. 학문이란 계속 변화기 때문에 따라 잡는 것만으로도 벅찰텐데 일단 관료가 된 후 먹고사는데는 지장만 없다면 자신이 과거에 습득한 적은량의 지식만으로 매일 변하는 세상을 저울질하며 살지.”

“박사님처럼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그건 새로운 것을 찾아 헤메는 미치광이가 되야하는거야. 그런 힘든 일을 피해 대부분은 관료의 길을 가는것이고.”

“어떻든 저는 박사님의 길을 따를꺼에요.”

“너랑 같이 있을 시간이 아쉽게도 짧지만 남은 동안 최선을 다해 길을 만들어보마.”



어쩌면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미쳤는지도 모른다. 작은 땅덩어리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면서 저마다 특질을 살려 이 땅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풍요를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사회는 어쩌면 새로운 신분사회가 형성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미 확보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세력과 그들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그 자리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것 같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언제라도 자신의 사위적 위치가 이동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사회의 시스템을 결정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국민들의 세금으로 그 시스템이 유지된다는 것을 잊은 채 마치 그들의 호주머니 돈으로 불쌍한 이웃을 돕는 것처럼 마구 적선정책을 휘두른다. 그 것은 길게도 넓게도 아닌 것이며 명분에서도 뒤처지는 것들이다. 그들이 제안한 제도는 아주 짧은 동안에만 빛을 발하고 사그러지는 성냥불과 같이 타오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사회가 어렵게 변화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 조차도 없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작은 노력으로 많은 이들의 생활을 편케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적은 경험의 폭으로 시스템을 움직인다. 그래서 점차 시스템은 녹슬어 버리고 스스로 활력을 찾고자 하던 노력 조차도 더 비굴하게 변하면서 노력하지 않고 거져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노력되어 진다. 이 것은 주인이 배고픈 종에게 당장 먹을 것을 주며 충복하면 배부르게 먹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더러는 주인의 눈에 들어 창고라도 맡게 되면 주인의 눈을 속여서 자신의 많은 식솔들까지 배불리 먹게 할 수 있는 기회만 찾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새로운 신분사회를 고착화 시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제도를 꾸려나가고 있는 이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한 참을 망상같은 헛 것에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백과장이 들어왔다.

“박사님, 로봇의 근거리 통신방법을 정리해왔습니다.”

“음, 로봇의 이동속도가 초속 4만킬로를 넘게 될텐데 대기권에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정리됐다구?”

“빛의 속도를 능가하기 때문에 일반 전파로는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대기권에서는 이동 속도를 초속 십킬로 정도로 하면 어떻겠나?”

“수평으로 이동할 때는 전세계의 위성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속도 제한을 안해도 되지만 수직 상승하여 대기권을 벗어나면 어떤 통제 수단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한 통제회로가 고려되야 합니다.”

“이 놈의 머릿속에 태양계와 은하계 지도를 심어 놔야겠군. 일단 대기권을 벗어나면 스스로 생각하는 영역을 제한하고 괘도에 의해 임무 수행 후 지구로 복귀하는 시스템을 고려해야겠어.”

“대기권 안에서 조차 이동속도가 빨라 위치추적이 어렵습니다.”

“그렇겠지. GPS 라는 것은 위성에서 쏘아 준 위치 정보를 수신하여 로봇 자신이 현재의 위치를 계산하는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통제실에서는 휴먼로봇이 자신의 위치를 계속 위성을 통해 전송하지 않는다면 위치 추적이 어렵겠지.”

“그렇습니다. 컨트롤명령이 포함된 신호를 위성을 통해 로봇에게 전송하면 로봇이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문제 없지만 로봇이 스스로 생각하며 통제실 쪽으로 자신의 위치정보를 전송하지 않는다면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휴먼로봇의 지능이 발달하여 스스로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약간의 시도만 있어도 그 놈은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다는 얘기아닌가?”

“프로그래밍할 때 컨트롤명령을 자신의 생각 보다 우선하여 처리하도록 인터럽트를 확실히 걸어야 합니다.”

“우선 텔레메틱스 기법을 조금 더 고도화 시켜보게. 로봇이 송신장치를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스스로 행동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를 억제할 수 있도록 수신 장치만으로도 그 놈의 위치를 추적할 방법을 찾아야겠지.”

마침 백과장이 와이브로와 텔레메틱스에 조예가 깊은 관계로 휴먼로봇을 통제할 통신방법을 담당하고 있다. 근거리에 있을 때는 지그비를 적용하여 통제실의 모든 명령을 양방향으로 수행한다지만 빛의 속도로 이동을 하고 있는 동안에 갑자기 변한 상황에 의해 명령을 새롭게 내릴 때는 현재로서는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라도 시간통제기법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나는 백과장에게 텔레메틱스 방법을 심화시킬 것을 지시하고 박동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미국 잘 다녀왔어?”

“응, 멋진 여행이었지.”

“자네가 요청했던 신기술지원방안이 잘 안될 것 같아.”

“왜?”

“미친 놈이라는 군.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나만 손가락질 받았다구.”

“그랬구나. 혹시 했는데 역시였어.”

“자네 이젠 힘든일 그만하고 대학강단에서 후학들이나 가르키면 안될까?”

“조금 더 해 보고 정 안되면 그러지 뭐.”

“아무튼 자네일 이라서 소위원회까지는 상정해 봤는데 부결됐으니까 그런줄 알라고.”



박동진과 통화를 끊고 실소를 자아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신기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적어도 많은 아이티기업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신기술이 자신의 경험폭을 넘어갔더라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쩌면 더 많은 미치광이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구하기 힘든 첨단 부품들을 마음껏 사용해 볼 수 있도록 부품창고를 운영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조공장들은 인건비가 비싸다는 이유로 점차 중국 등지로 빠져나가면서 아이씨부품들의 국내 수요가 적어진 탓에 국내 부품수요가 적어지면서 생산공장들도 우리에겐 더 이상 판매량을 할당하는데 인색해지기 시작했다. 흩뿌린 듯 여기저기서 마음대로 줏기만 해도 구할 수 있는 부품 조차 요즘은 해외스톡을 찾아 헤메야 한다. 겨우 일원만 있어도 구할 수 있어야 할 부품들은 찾는 이들잉 적어지면서 점차 가격이 올라가고 재고를 급히 처분해대며 손해를 떨어내려는 브로커들은 해외스톡에만 의존하는 까닭에 점점 더 부품조달을 위한 시간 마져도 길어만 간다. 이런 현상을 파악하여 부품 재고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판매상에게 계속 재고를 갖고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보다는 차라리 필수 부품을 조사하여 정부가 그 수요량 이상을 재고 부담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 분위기 파악 조차 소홀히 하는 이 땅에서 더 이상 연구라는 것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떠나야겠다.



“점심 같이 해요.” 숙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어, 벌써?” 나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간줄도 모르고 있었나 보다.

“운전하면서 힘들었을텐데 어깨라도 주물러줄까요?”

“아냐, 힘들긴 뭘.”

“아까 보니까 목을 조금 흔들던데요?”

“사실 운전대에 힘이 너무 들어갔나봐. 오른 쪽 어깨가 아프긴하네.”

“그봐요. 내가 안마해줄게.” 숙은 내 뒤로 돌아와선 두 손으로 어깨를 잡고 안마하듯 꼭꼭 잡아 준다.“

“애구, 손 목 힘이 없어서 안되겠다. 고맙지만 그만해.”

“시시해?”

“응, 괜히 힘만 들잖아.”

“그럼 젊은 애가 하면 조금 날까?”

“젊은 애가 어딨어?”

“저기 미숙이 말야. 저 애한테 안마 시켜볼까?”

“쓸데없는 소리말아. 저 아인 업무 비서일 뿐인데 왜 여기다 붙이고 그래?”

“당신, 이젠 나 말고 딴 여잔 생각 안하는거지?”

“그걸 말이라고 해?”

“미숙이가 동거하는 거, 사실은 당신을 떠 보려고 내가 한 말이었어.”

“알아, 걘 가능성이 많아서 우리의 뒤를 이을 과학자로 키우고 싶었을 뿐이야.”

“알았어. 이젠 식사 하러가요.”



로비에 내려와 보니 사장단들도 식사에 초대됐는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단촐하게 먹을 수 있는 호박죽이 나오고 시간이 지날수록 야채류에서 육류의 음식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진한 된장찌개 만으로도 밥 한그릇을 뚝딱 비워버릴 수 있겠다 싶게 맛있는 음식들이다.



“어쩌면 이런 음식을 더 먹지 못할 것 같아요.” 식사를 마친 후 숙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딜 또 가시려구요?”

“대충 눈치는 챘겠지만 이박사님과 제가 미국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회사 운영은 누가 하죠?”

“여러 사장들께서 제가 없더라도 회사를 꾸리는데는 문제가 없다고 봐요. 프로젝트 마치는데 삼년 정도 걸릴텐데 그때까지 회사를 각자가 책임지고 맡아 주세요.”

“황회장, 결심이 선거야?”

“몇 군데 전화해봤어요. 우리의 프로젝트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없더군요. 그렇다면 차라리 이해하고 돕고자 하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요?”

“하긴 나도 조금 전에 친구한테 전화해봤는데,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더군.”

“그래요. 아까운 시간들이에요. 저에겐 여러 사장님들이 계시니까 견딜 수 있겠지만 박사님이 개발실 팀을 모두 데려 가려면 설득 시간이 약간은 필요하겠죠.”

“회장님의 뜻이 그렇다면 저흰 최선을 다해 회사를 키워놓겠습니다.”

“그럼요. 어떻게 이룩한 회사들인데, 여러 사장님들만 믿어요.”



숙의 말이 끝나자 마자 사장단은 기립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회사는 이렇게 정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도 도봉동의 아내에게 귀뜸은 했었지만 설마 이 땅을 이렇게 빨리 떠나게 될 줄은 몰랐다. 실망과 실망의 시간으로 점철 되는 것 보다는 희망의 나라에 발 붙이고 해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위해 목숨을 한번쯤 걸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어쩌면 밤새 내린 눈 탓으로 세상의 울긋불굿한 혼탁함이 한가지 색으로 뭍혀 버린 것처럼 내 맘 속에 갖가지 질곡의 소리들도 이렇게 하얀 눈 속에 뭍어 버리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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