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말 - 2부12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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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18:44
제12화
“아 깜짝이야…어쩐 일이야?”
현관문을 열자 그녀가 서 있었다. 매력적인 큰 눈동자에 긴 눈썹, 곧게 뻗어내린 콧날과 반짝이는 입술, 그리고 희고 투명한 부드러운 피부. 빨려들 것만 같은 눈부신 미소를 띄우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어쩐 일이냐니.. 못 볼 거라도 본 사람마냥… 연구실에 들렀더니 오늘은 일찍 들어갔다고 해서 일부러 찾아왔구만..”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는 시늉조차도 사랑스럽게 보였다.
“미안, 미안.. 어서와.. 보고 싶었어.. “
얇은 브이넥의 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평상시의 유미다운 간단한 복장이었지만 그 간단함이 오히려 유미의 스타일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뭐야.. 모처럼.. 집에 오면서 연락도 안하고..”
“아..미안.. 오늘은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온 거라서 말야..”
“응? 그럼 또 학교로 가야 하는 거야?”
“아냐.. 내일 아침에 가면 돼.. 요즘 유미도 바빠서 늦게 들어오니까.. 대충 들어올 때쯤 전화하려고 했었지..”
“그랬구나…”
문득 어두운 그림자가 유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미안.. 그걸 뭐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응 알아… 참 희성아.. 지난번에는 미안.. 못들어와서… 동아리를 관둘지 말지 고민하는 후배가 있어서..그 얘기를 들어주느라 시간이 걸려버렸어.. 전화할까 했었는데.. 또 장난치려고 하고 그래서.. 걱정끼쳐서.. 미안”
“그랬구나.. 좋은 선배니까.. 유미는.. 하지만 그래도 전화는 좀 해주지… 앞으로 또 그런 장난치면 내가 그냥 안둔다고 해”
“… 응 그럴게..”
어렸을 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유미의 순수한 표정. 자신을 바라보는 그 표정과 태도가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앉아 있어봐 유미야.. 커피 타줄게”
“응”
테이블을 돌아서 언제나의 지정석으로 가서 앉았다. 언제부터인가 거기에 유미가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서로 바빠서 만나지도 못하고, 혼자 식사를 해야 할 때면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어 주길 바라는 희성이었다. 그랬던 유미가 지금 그자리에 있었다. 문득 눈을 돌리면 사라질 것만 같아 희성은 유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유미야…”
너무나도 익숙한 빨간 리본의 묶은 머리가 목덜미에 가볍게 붙어 있었나. 너무나도 여성스러웠다. 변함없이 언제나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유미가 자신의 여자친구라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화려하고, 도도하고, 아름다운 유미가 이렇게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커피를 타서 돌아섰다.
“유미야..?”
유미의 태도가 이상했다. 허벅지를 누르면서 고개를 숙인채 무엇인가를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유미야.. 왜.. 왜 그래?”
“아.. 응..으응.. 아무것도 아냐..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후후… 커피 고마워”
애교를 부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 오르는 커피잔에 입술을 대었다. 그런 유미의 태도가 평상시와 달리 섹시하게 보였다. 이렇게 둘이서 그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만 있어도 사랑스러웠다.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였다.
“뭐 그런 교수가 다 있어..? ”
“그치? 그치? 정말 짜증난다니까…”
평상시와는 달리 이것저것 주변의 일들을 늘어놓는 유미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얘기하고 싶은 게 이렇게 많았구나 싶었다. 시간을 내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미안해졌다.
“뭐야.. 왜 그래…?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아냐.. 너무 이뻐 보여서…”
“뭐야~”
수줍은 듯이 부끄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아, 참.. 연구… 잘 되어 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지금은 상상도 안돼…”
숨쉴 틈도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연구팀의 일원이 된 탓인지, 정말 지영에 잘 보고 있어서인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의 반도 되지 못했다. 지영의 모교인 T공대으로의 출장도 잦았다. 어느 학교의 학생일지 스스로도 헷갈릴 정도였다. 거의 비서처럼 출장에는 반드시 동행해야 했다.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연구원들을 만났다. 그것은 그 것 나름대로 신선한 자극이어서 불만은 없었지만 유미를 만날 시간은 그 만큼 줄어들어 있었다. 하루에 몇번 정도 문자를 주고 받는 게 다 였다. 유미도 응원해주고 있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라고는 해도 유미를 혼자 두는 것이 너무나도 미안했다. 그런만큼 이렇게 유미가 찾아와서 둘 사이를 확인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도 좋았다.
“아.. 저녁 어떻게 할래? 오랜만에 뭐라도.. 만들어… 줄까?... 유..유미야..”
컵을 손에 든 채로 눈에 생기가 없는 표정이었다. 멍한 눈빛이었다.
“유미야.. 유미야…?”
“…응? 아.. 미안.. 또 그랬네.. 미안해”
“왜 그래? 어디 아파?”
“음.. 어디까지 이갸기 했었지..? 아 맞다.. 저녁.. 저녁.. 어떻게 할까? 둘이서 맛渼?거.. 아음… 머.. 먹으러.. 가,, 갈까?”
컵이 흔들려서 커피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정말 괜찮아? 유미야? 아픈 거 아냐?”
“괘..괜찮아… 그냥.. 요즘… 컨디션이.. 좀.. 안좋은 거 뿐이야”
어느새인가 하얗던 피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식은땀 마저 흘리고 있었다.
“감기야? 열 있는 거 아냐? 얼굴.. 빨개졌어..”
“괜찮다니까…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좀.. 더.. 얘..얘기해줘… 맞아.. 이번에.. 나… 어학원…음… 다녀볼까… 해. 영어.. 배..아으음.. 워야.. 하.. 음....할 거 같아서..”
“오늘 좀.. 이상해 유미야.. 컨디션 안좋으면.. 무리하지 말고…”
“괜찮아.. 희..희성이도.. 열심히 하고,. 있잖아.. 나도.. 뭐,.뭔가.. 열심히 해서… 희성이.. 한테.. 뒤쳐지지… 않도록… 고….공부 좀 해보려고…으으응”
“유미야~!”
송글송글 땀이 맺힌 얼굴은 희성이 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밀려오는 무엇인가를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것 처럼 말을 더듬고 있었다. 가끔씩 터트리는 신음소리에 당황스러웠다.
“여..열심히.. 해… 나.. 지금 이대로는.. 안..안될 거 같아.. 희성이한테.. 음.. 이.. 이대론.. 아음,,, 흐윽.. 시.. 싫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유미쪽으로 다가가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때였다.
“더.. 이상은 안돼..”
목 깊은 곳에서 짜낸 듯한 소리를 내며 엎드려 몸을 떨었다. 묶여 있는 머리와 빨간 리본도 따라서 흔들렸다. 조금 후 경직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옆에서 봐도 알 수 있었다. 긴 한숨과 함게 젖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미..미안.. 화장실 좀…”
말을 마친 유미가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종종 걸음으로 뛰어갔다.
“유..유미야.. 괜찮아…?”
‘희..희성이 앞에서.. 내가.. 무슨 짓을….’
남자친구 앞에서의 치욕이었다. 고문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하기엔 너무나도 잔인하게 가슴 아픈 행위였다. 문을 잠그자 마자 아랫배의 압박을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서둘러서 지퍼를 내리고 바지를 벗었다.
“하아,,,,,”
지퍼 사이로 엷은 검은 털들이 보였다. 그날 이후부터 한번도 속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그곳으로부터 여자의 색향이 풍겨 올라왔다. 얇은 스웨터의 옷감 위로 봉긋한 두개의 꼭지가 돋아올라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댄채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와우고 싶지 않아도 외우게 되어버린 번호를 눌렀다. 바로 옆에 있었다. 이벽의 건너편에 그가 있었다. 틀림없이 유미의 침대에서 마치 제집인양 뒹굴면서 TV라도 보면서 손에 든 리모콘을 만지고 있을 악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채 애원할 수 밖에 없었다.
“제발,.. 부탁이야.. 이제 그만..”
“……”
“제발.. 부탁이에요.. 더 이상,,, 나…”
“……”
“흑…”
“……”
“두번.. 두번이에요…”
“……”
“…너무해…”
“……”
“유..유미는 … 희성이 앞에서..남자친구.. 앞에서.. 두번이나… 자..장난감으로 느..느꼈어요.. 너..너무.. 좋아서.. 차….참을 수.. 없어요… 장난..감.. 너무.. 좋아요…”
“……”
“애..얘기 했잖아.. 이걸로… 이걸로 됐지?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