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시간 - 7부
관리자
SM
0
4128
2019.05.19 01:53
집으로 오는 길 쇼핑백을 열어봤다.
계란보다 작을 것 같은 크기의 분홍색 구슬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지난번에 본 딜도와 같은 분홍색 이었다.
성격도 외모도 여성스러운 L이었지만,
플 할때 그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약간 무게감이 있는 그것은 너무도 매끄럽게 생겨,
젖은 상태에서 넣었다간 채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L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어째서 자꾸 나에게 이런걸 시키는 걸까.
그녀를 만나서 플을 하는 시간은 너무나 만족스럽고 날 흥분하게 했지만,
이런 식의 관계가 점점 불만족스러워졌다.
자꾸만 욕심이 났다.
처음 만남에서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신말고도 할 사람이 많을꺼란 말..
우연한 만남으로 겨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녀에게 거둬진 적도 없었으니,
버려질 기회도 나에겐 없는 것 이었다.
혹시라도 만남을 이어가지 못할까 두려워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내 처지가 한심했다.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들어 혼자 술이라도 한 잔 할까 했지만,
더욱 내 자신이 초라해질 것 같아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을 비운게 겨우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해가 지면서 어둑해진 집 안은 더욱 적막하고 고요한 듯 했다.
그녀가 건넨 쇼핑백을 치워두고 침대에 누웠다.
잔뜩 땀을 흘리고 씻지도 못 한 채 온 터라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피곤한 몸을 겨우 일으켜 옷을 벗고 욕실로 향할려다 화장대 앞에 주저 앉았다.
가슴 위, 아래 붉게 물든 하네스 자국..
살짝 살갖이 쓸려 파릇하게 멍이 올라 온 로프 자국이 그대로 거울에 비쳤다.
엉덩이에선 아픔이 느껴졌고,
내 입을 적셨던 지릿한 맛의 냄새가 떠올랐다.
마음과는 다르게 또 그 곳은 젖어왔다.
비참하다 느끼면서도 그 비참함에 흥분하는 내 자신이 더러웠다.
고개들어 바라본 거울 속의 나는 클리토리스를 문질러 대고 있었다.
L을 원망하고 나를 원망하면서도 그 텅 빈 마음을 채우고 보상받을려는 듯
점점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곳은 움찔거리며 뜨거운 기운을 울컥울컥 쏟아냈다.
" ..하아..-... 아... 주인님... 하아...앗..!..."
온 몸이 늘어졌다.
L을 생각하며 그녀에게 말하는 주인님 소리를 외치며 그렇게 난 느껴버렸다.
발 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서럽게도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잠이 들었다.
--
바쁜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 저녁이 되었다.
잠깐이라도 한가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L이 생각났다.
방 한켠에 놓아두었던 쇼핑백이 보였다.
내일이 그녀가 지시한 수요일..
무엇을 할려는 건지 알 순 없었지만,
기대감에 또 흥분감이 밀려오는 듯 했다.
끊어내고 싶었다.
이런식의 관계는 계속해서 날 괴롭힐 것 같았다.
단지 플을 하면서 행위에 의한 수치감이나 비참함이 아닌,
감정적인 부분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니 그것마저도 즐기며 받아들이는 내가 견딜 수 없었다.
가장 겁이 나고 두려워지는건 언제든 정리될 수 있는 L과의 관계였다.
예전엔 자위로 잘 느끼지도 못했던 내가 ...
그녀의 생각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오르가즘을 느끼고,
짧은 그녀와의 시간들이 평소에도 날 괴롭히고 있었다.
게다가 난 그녀의 지시에도 너무도 자연스럽고 충실했다.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그녀에게 받아달라 이야기를 할 배짱도 없었고,
그녀의 거절을 받아들일 용기도 없었다.
누군가든 만나고 싶어졌다.
여자든 남자든 플이든 섹스든,
무엇이라도 해야만 L의 생각을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컴퓨터를 켜고 메신저, 카페 할 것 없이 사람을 만날 만한 모든 것들을 켰다.
L을 만난 뒤론 접속조차 잘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평일이라 그런지 조용했다.
간간히 오는 인삿말들과 안부 글들..
뻔한 글들에 나도 뻔한 내용으로 답장을 했다.
메신저의 친구 목록을 뒤적였다.
목록의 처음과 끝을 몇 번이나 오갔지만 딱히 이런 이야길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 어이~ 잘 지내? 요즘 연락도 없고? -
S였다. 지역도 가깝고 해서 몇 번 만나 플을 했었던..
그는 관계가 계속되면서 한번 DS에 대한 말을 꺼냈었었다.
하지만 싫다는 말에 깔끔하게 그냥 이렇게 지내자 했었었다.
사람도 좋았고, 플도 썩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항상 어느선 이상을 넘지 못해 더이상 관계를 발전시키기 어려웠다.
대화 창을 켜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 네 잘 지내요. 별일 없죠? -
- 나야 늘 똑같지 뭐 ㅎㅎ 요즘 연락도 없고 바쁜거야? -
- 뭐 저도 그냥 그랬어요 -
S와의 대화는 언제나 그랬듯 별 다른 내용은 없었다.
-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요? -
- 아니 아직. 너가 소개 좀 시켜줘봐. 아님 한번 만나 주든가! ㅎㅎ -
- 그럼 내일 볼래요? -
- 왜이래;; 갑자기 니가 그러니까 무섭다. 요즘 굶었냐? -
- 싫어요? -
- 야야 까칠하게 왜 그러냐.. 싫다냐 누가.. -
- 좀 때려줘요 -
- 넌 뭐 못 맞아 죽은 귀신이 들렸냐.. 차라리 스팽키라고 하고 다녀라 ㅎㅎ -
- 그냥 좀 정신없이 맞고 싶어서 그래요. 내일 시간 괜찮아요? -
- 뭔 일 있는거 아니지? 나야 뭐 퇴근 후엔 프리하지~ -
- 전 퇴근 여섯시 좀 넘으면 하니까 .. 일곱시 쯤 어때요? -
- 알겠어 난 좀 더 빨리 나올 수 있으니까 마치고 너네 동네로 가지뭐 -
- 그럼 일곱시 우리동네 -
- 내일 나 진짜 막 팰껴... 도망이나 가지마 ㅎㅎㅎ -
- 알겠어요. 내일 연락 주세요 -
메신저를 껐다.
내일은 수요일이다.
병원에 가지 않으면 L은 날 어떻게 할까..
내가 오지 않음으로 인해 그녀가 실망 해주었음 했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게 너무 우스웠다.
단지 이런 만남을 통해서라도 L을 향해 온통 쏠린 관심을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결국은 L의 생각뿐 이었다.
아직 엉덩이엔 푸릇하게 멍이 들어있었다.
맘껏 맞고 싶다 했지만, 그렇게 맞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L이 남긴 멍자국은 아니었지만,
그녀로 인해 생긴 이 자국들을 지워버리고 덮어버리고 싶었다.
병원으로 오라던 L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일부러 멀리 치워 둔 쇼핑백이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애써 그녀의 생각을 떨쳐버리려 한참을 뒤척이다 억지로 잠이 들었다.
--
복잡한 기분에 일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정신 없는 하루를 보냈다.
괜한 일을 저지른게 후회가 되어 차라리 시간이 멈춰버려,
영 영 이시간 그대로 였음 했지만 어김없이 퇴근 시간은 찾아왔다.
가방엔 나도 모르게 챙겨둔 L의 쇼핑백이 들어 있었다.
눈에 띄는게 싫어 가방 안쪽 포켓에 구겨넣었다.
퇴근 준비를 하고 나서자 S에게 전화가 왔다.
" 마쳤냐? "
" 네.. 어디에요? "
" 그냥 너네 동네 공원 근처. 이쪽으로 올래? 아님 내가 그쪽으로 갈까? "
" 아뇨, 지금 그리로 갈께요. "
" 그래 좀 이따 봐 "
전화를 끊고 선 근처 마트에 잠시 들렀다.
맥주 두 캔을 사서 가방에 넣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기가 싫어 택시를 잡아타고 공원 근처로 갔다.
눈에 익은 S의 차가 서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차에 올라 탔다.
" 왔네. 그렇게 비싸게 굴더니 왠일로? "
" 뭐.. 그냥요. 얼른 어디든 가요. "
" 근처에 갈까? "
" 아뇨! ... 이 동네 말구요.. "
S에겐 미안했지만, 아직도 난 L을 의식하고 있었다.
혹여나 그녀의 눈에 띌까 너무 두려웠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그가 놀란건지 잠깐 내 얼굴을 빤히 보다 말 없이 차를 운전했다.
크게 멀지 않은 동네에 제일 먼저 보이는 모텔에 주차를 했다.
마음 같아선 더 멀리 가고 싶었지만, S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카운터에서 키를 건네받고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 좀 씻고 나올게요 "
퇴근 후 바로 온터라 씻을겸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 들어와 옷을 벗으니 푸릇한 멍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L에게선 어떤 연락도 없었다.
혹시나 휴대폰이 잘못된건가 싶어 회사 전화로 나에게 몇 번 전화를 걸어보고,
컴퓨터로 문자를 보내보고 했지만 휴대폰은 너무도 멀쩡했다.
이유를 묻는 다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날 불안하게 하는 한편 더욱 날 서운하게 했다.
천천히 씻었다.
이건 정말 S에게 못할 짓 이란 생각이 들었다.
코 끝이 시큰해지며 또 눈물이 나올려고 했다.
왜 안오냐고 다그쳐 줬다면 못 이기는척 갔을텐데..
애초에 나란 인간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한 L의 태도에 화가 나는 만큼 슬퍼졌다.
얼굴을 차가운 물로 몇번이나 씻어내고 밖으로 나갔다.
S는 들고온 케인이며 채찍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넓다 싶은 화장대 위에 그것들을 일렬로 줄세워 두고선,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 앉았다.
" 뭐해요.. 얼른해요.. "
" 좀 쉬어 피곤해 보이는데 "
" 아뇨 괜찮아요 그냥 해요 "
시키지도 않았지만, 난 화장대 귀퉁이를 잡고 엎드렸다.
S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단지 이 순간을 즐겨 주었으면 했다.
" 그래? 알겠어 똑바로 잡아 "
잠깐 뜸을 들이던 S가 일어나 내 눈앞에서 채찍을 집어 들었다.
" 엉덩이가 엉망인데 정말 맞을수 있겠어? "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챙겨 주려는 S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그럴수록 L의 생각이 났다.
왜 이렇게 까지 내버려둔건지,
자꾸만 그녀의 원망을 했다.
사실 L의 말을 어기고 다른 사람을 만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더욱 모든걸 그녀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케인을 들고 있는 S가 L이 되었음 하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했다.
L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 휘익 -
내 맘을 읽기라도 한건지 그가 세차게 채찍을 휘둘렀다.
여러 갈래로 만들어진 채찍은 두꺼운 가죽으로 만든 듯, 타격감이 무거웠다.
아픈 것 보단 무거운 느낌에 잠깐 휘청했지만, 다시 몸에 힘을 주었다.
죄책감 때문인지 S의 채찍질은 마치 화가 난듯 했다.
당장 아픔을 느끼면 L을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엉덩이에 아픔이 느껴질수록 그녀가 더욱 생각이 났다.
L이라면 이런 제멋대로인 날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만하고 싶었다.
자꾸만 화가 난듯한 L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대 맞지도 않았을 뿐더러, 충분히 참을 수 있는 정도 였음에도
자꾸만 눈물이 났다.
두 손에 힘을 꽉 주고 눈물을 참아내려 했지만,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은 화장대 위에 방울 방울 떨어졌다.
제어가 되 질 않았다.
" 아파? 왜그래? 이정도로? "
" 아니에요.. 아픈거.. 그냥 해줘요.. "
채찍질을 멈추곤 그가 물었다.
S의 말은 이 정도도 못 참냐는 타박이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던, 나와는 다른 모습에 진심으로 날 걱정하는 듯 했다.
" 제발.. 그냥 때려주세요.. 아파서 우는거 아니에요 .. 참을 수 있어요.. "
울면서 말하는 내 모습에 당황한 듯 했지만,
이내 그는 채찍질을 다시 시작했다.
방안을 울리는 큰 타격음에 흐느끼는 소리는 감춰졌지만,
어깨가 들썩이고 눈물이 나는건 감출 수가 없었다.
" 너 무슨일 있지? 이상하다 싶었는데 왜 그래 무슨일이야? "
도저히 못하겠다는듯 채찍을 내려놓고선 그가 물었다.
차마 L의 이야기를 할 순 없었다.
그냥 엎드린채로 한참을 울다 가방에서 맥주를 꺼내 그에게 건냈다.
" 미안해요. 괜히 시간만 뺐었네.. "
" 그러게 이럴꺼면 왜 불렀냐. 팔 운동도 하고 왔는데 "
내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그가 농담을 던졌다.
사실 그의 말이 귀에 들리질 않았다.
저질러 버린 일에 대한 후회와 L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있었다.
맥주를 마시던 그가 날 꽉 껴안아 입 맞추려했다.
몸이 밀착 되면서 단단하게 서 버린 그의 물건이 내 허벅지에 닿았다.
난 그를 민망할 정도로 세게 밀어냈다.
" 미안해요 ... 못하겠어요...나.. 먼저 가볼께요.. 정말 미안해요.. "
그는 놀란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에겐 너무나 미안했지만, 더 이상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그새 눈이 퉁퉁 부은듯 했다.
말이 없는 그 앞에서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 그래.. 뭐 무슨일인진 모르겠지만.. 기운내.. 다음에 연락하고 "
날 걱정해주는 S의 말에 대꾸할 정신도 없었다.
옷을 입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
늦은 시간이 아닌터라 모텔밖엔 택시가 많이도 지나다녔다.
가장 가까운 곳에 서있던 택시를 잡아탔다.
L의 집 근처로 가달라했다.
딱히 별다른 방도도 없었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봐야 할것만 같았다.
택시기사는 길을 제대로 모르는건지 근처에서 헤메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요금을 쥐어주곤 택시에서 내려서 뛰었다.
가까운 거리 였지만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저 멀리 그녀의 집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창엔 불이 켜져 있었다.
더욱 빨리 달렸다.
계단도 한 달음에 올라갔다.
그녀의 집 앞에 오니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또 멍해지는듯 했다.
거친 숨을 고르며 한참이나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용기를 내 그녀의 집 벨을 눌렀다.
--
요즘은 글을 쓰는것 보다,
댓글을 보고 쪽지를 보고 하는것에 더욱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ㅎㅎ
부족한 글에 항상 좋은 말씀 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벌써 수요일이네요.. 며칠만 있음 주말 입니다 ^^
더운 날씨에 다들 건강 조심하시고 기운내세요
-덧글-
저흰 대구쪽 F/f 커플입니다.
이쪽에 관심 있으신 fs분들 있으시면 쪽지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