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 - 1부
관리자
네토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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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18
2019.12.05 23:17
“야 우리 과 남자애들 영문과 여자애들이랑 과팅 결정됐다!”
“우와-!”
행정학과내에서도 다른 과 여자애들이랑 친하기로 유명한 한 남학생이 그렇게 말하자, 강의가 끝나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던 남학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댔다.
“뭐야. 웃겨.”
그러나 여자애들은 짜증난다는 듯, 하지만 전혀 신경은 쓰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야유만 보낼 뿐이었다.
“야 빨리 나와서 접수해. 10명 선착순이다.”
주선자 남학생이 그렇게 외치자 남학생들이 우르르 달려 나간다. 자리에 앉아 가만히 얘기를 듣던 환우도 재빨리 줄을 섰다. 앞에 서 있는 남자애들의 숫자를 세어보니 다행이 아홉 번째이다. 자기 뒤로 선 몇몇 남학생들이 투덜대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보인다.
‘휴우….’
환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흐뭇하게 자기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촌구석의 남중, 남고를 나온 환우는 여자친구를 사귀어보기는커녕, 여자의 손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상경해 행정학과에 11학번으로 입학해 처음해보는 미팅이니 어찌 기대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부푼 마음을 안고 고개를 내밀어 앞을 보기 몇 차례, 드디어 환우의 순서가 돌아왔다. 이름을 적던 주선자 남학생은 환우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름을 적는다.
“좋아. 최환우…. 이제 마지막이네.”
“야 나 된 거야? 확실히 적은 거지?”
환우가 재차 확인하자 남학생이 웃는다.
“야 여기 적었잖아. 너나 약속 펑크내지마라. 자 다음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환우는 기분 좋게 자리로 돌아와 주선자 남학생이 말하는 일정을 수첩에 받아 적기까지 했다. 이미 머릿속은 다가오는 봄날은 여자친구와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
3일 후, 드디어 과팅 날이 되었다. 학교 앞 호프집에서 만난 스무 명의 남녀학생…. 환우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앞에 마주 앉아 자기들끼리 도란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여학생들 중에 유난히 환우의 눈을 사로잡는 여학생이 있었다.
‘진짜 예쁘다….’
눈에 띄게 하얀 피부에, 약간은 도도할 것 같은 눈매를 가진 그녀…. 가끔씩 긴 머리를 시원스레 쓸어 넘기는 가느다란 손가락조차 아름답다.
자기소개 시간에 그녀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안녕-. 이은빈이라고 해.”
“와-!”
예쁜 여학생답게 남자애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엄청났다.
각자 간단한 소개를 하고 신나는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미팅 분위기보다는 일반적인 술자리 분위기였다. 환우의 눈은 처음부터 찍은 은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환우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눈이 마주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환우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술자리가 즐거웠다.
이런 저런 게임도하면서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던 도중, 과팅을 추진했던 남학생이 일어나 제안을 했다.
“자 이제 우리 사랑의 작대기 한 번 해보자. 만취되기 전에 찍어야지, 만취돼서 찍고 난 후 다음 날 자기가 누구 찍었는지 기억도 못하면 안 되잖아.”
남학생의 개그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린다.
“자 이제 그럼 젓가락 들고 내가 하나둘셋 하면 찍는 거야. 자 하나, 둘….”
젓가락을 든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은빈의 모습을 힐끔거리는 환우의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셋-!”
환우는 떨리는 손으로 은빈을 향해 젓가락을 내밀었다. 하지만 은빈의 젓가락은 누가 봐도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찰나의 일이었지만 환우의 눈엔 그런 그녀의 손동작이 한없이 느리게 보인다.
젓가락이 가른 운명에 여기저기서 부끄러워하는 웃음, 또는 낮은 탄식소리가 들려온다.
은빈을 찍은 남학생은 두 명이었다. 환우와 행정학과에서 가장 잘생긴 남학생인 정혁. 남자애들이 너무 예쁜 은빈은 맺어질 확률이 적다고 생각했는지 둘을 빼고 아무도 찍지 않은 것이다.
은빈을 가리킨 젓가락은 두 개였지만, 그녀의 손에 들려진 젓가락은 하나…. 그리고 그 젓가락은 환우가 아닌 그녀를 찍은 또 다른 사람인 정혁을 가리켰다.
은빈이 자신을 찍은 환우를 살짝 쳐다본다. 오늘 그녀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환우였지만 재빨리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하며 젓가락을 내렸다.
‘역시….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보면 그녀와 얘기 한 번 해본 적도 없잖아. 그런 그녀를 찍다니 쪽팔리게….’
자신이 기대했던 모든 상황이 무너진 뒤에야 현실로 돌아온 환우는 그제야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단 하나의 젓가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여학생. 아니 자기소개 할 때 한 번 보긴 했었던 것 같다. 물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평범한 여학생…. 못생긴 것은 아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이 꽤나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은 환우가 자신을 쳐다보자 고개를 푹 숙인다. 환우는 그런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했지만 기억이 날 리 없었다.
이윽고 술자리는 남녀가 섞여 앉아 진행이 되었다. 아니, 젓가락이 맞은 사람들끼리 앉다보니 자연스레 섞였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환우는 정혁의 옆에 앉아 밝은 미소로 대화하는 은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와 말 한 번 섞은 것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괜스레 가슴이 쓰리다….
*
과팅이 끝난 스무 명의 남녀학생들은 술집에서 나와 자연스레 끼리끼리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개중에는 혼자 서서 짜증나는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환우도 혼자 멀거니 서서 정혁의 옆에 붙어 웃고 있는 은빈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 이제 더 놀 사람들은 놀고,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좋은 데 갈 사람은 좋은 데 가고….”
주최자 남학생의 말에 몇몇 여자애들이 야유를 보낸다.
‘집에나 가자….’
환우가 쓸쓸히 발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오려 할 때 누군가가 외투소매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아까 자신을 찍었던 여학생이다.
“응, 응?”
적잖이 당황이 되었다. 갑자기 자신의 소매는 왜 잡는 거지….
“저, 저기….”
생각보다 높은 음색의 귀여운 목소리를 가진 여학생.
“나랑 더 놀다 갈래…?”
순간 환우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 얌전해 보이는 여학생이 겉보기와 달리 엄청나게 적극적이다라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놀다 가자는 게 무슨 의미일까하는 생각까지….
환우는 그런 생각들을 거치고 난 후에야 여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백육십정도 돼 보이는 키에 보통의 몸매, 어깨까지 내려오는 평범한 머리…. 아기같이 맑은 얼굴이 특색이라면 특색일까? 굉장히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시, 싫어?”
이젠 살짝 떨리기까지 하는 여학생의 말에 환우는 결론을 내려야했다.
“아, 아냐. 싫기는…. 그, 그래….”
결국 둘은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소주 한 병과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도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앉아 있는 두 사람…. 어색한 침묵이 오랫동안 이어진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여학생 쪽이었다. 예의 그 높은 음색의 목소리로….
“저, 저 술 잘 마시니? 난 되게 못 마셔….”
“아, 아…. 응. 난 좀 잘 마시는 편이긴 해. 좋아하기도 하고.”
환우의 대답에 그녀가 어색하게 웃는다.
“그, 그렇구나….”
다시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내 여학생이 소주를 따더니 어색한 동작으로 환우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다.
“바, 반가워. 화, 환우야….”
환우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이름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아. 으응…. 그, 근데 저기 미안한데 난 너 이름을 기억 못해….”
“아…. 응. 괜찮아, 괜찮아. 그럴 거라 생각했어. 내 이름은 소은이야. 유소은….”
아기 같은 얼굴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서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으며 술만 홀짝 거린다. 그러다 환우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왜 말 한 번 섞어보지 못한 나를 찍었을까…. 물어보는 것이 예의가 아니란 생각도 들었지만,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저, 저기 소은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은은 환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으, 응?”
“그, 근데 왜 날 찍은 거…야?”
“아….”
다시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녀…. 환우는 그런 그녀를 보고는 재빨리 말했다.
“아….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아, 아냐…. 사실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한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환우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주일 전쯤에 너를 본 적이 있어.”
“나, 나를?”
순간 그녀가 스토커인가 하는 생각까지 드는 환우였다.
“으, 응…. 그때 너가 학교 앞 지하철역에서 계단 위까지 할머니 짐 들어다 드리고, 버스 타는 곳까지 안내해드린 다음에 할머니 버스타시는 거 기다렸다가 나중에 웃는 얼굴로 인사까지 하면서 보내드리는 거 봤었어….”
환우는 소은의 말에 깜짝 놀랐다. 확실히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그거 보고선 아 저사람 참 착한사람이구나 생각했었어.”
“그래서 과팅에 나온 거야?”
환우의 질문에 소은이 놀라 손사래를 친다.
“아, 아냐. 그때는 그냥 너 한 번 봤을 뿐이고, 과팅도 친구들이 나가자고해서 억지로 끌려나오듯 나온 건데…. 근데 별 생각 없이 나왔는데 그때 봤던 너가 보여서 정말 놀랐어…. 그래서 괜히 가슴이 두근거려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고개를 푹 숙인다. 환우는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환우의 얼버무리는 듯한 대답으로 분위기는 다시 어색해졌다.
사실 지금 환우의 머릿속엔 눈앞의 유소은이란 이 여학생보다, 아까 봤던 이은빈이란 예쁜 여학생의 생각으로 꽉차있었다.
유소은이란 여학생이 자신을 붙잡고 조금 더 놀다 가자고 하고, 자신을 찍은 이유를 설명하기 전까진 솔직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겨우 전에 한 번 봐서라는 것을 알자 더 이상의 두근거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잖아.’
환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충분히 두근거릴만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 상대가 이은빈이 아니라 유소은이라는 것이 더 이상의 설렘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시 눈앞의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워하고 있는 그녀…. 은빈에 비해선 조족지혈이지만 그래도 귀엽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마음이 이렇다니…. 소은처럼 자신에게 저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여자라면 확실히 말만 잘하면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환우에겐 이 눈앞의 소은에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저 은빈의 얼굴만이 잔뜩 떠오를 뿐이었다.
환우가 아무 말이 없자 소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 근데 넌 은빈이 찍었었지…?”
“응? 응….”
소은도 봤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하지…. 은빈인 여자가 봐도 엄청 예쁘니까….”
환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소은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우리 그, 그래도 친구로 지낼 수 있잖아. 응? 저, 전화번호 알려줄래? 가끔 만나서 놀 수 있지? 그치?”
“으, 응…. 당연하지.”
환우는 얼떨결에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헤헤…. 고마워.”
핸드폰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그녀…. 환우는 순간 그녀가 무척이나 순수한 미소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집에서 나와 소은은 학교에서 보면 꼭 인사하자는 말을 남기고는 쫄래쫄래 사라져갔다. 환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았지만, 머릿속엔 온통 아까 정혁과 떠난 은빈의 생각뿐이었다.
*
주말을 보내고 학교에 간 환우의 귀엔 정혁과 은빈에 대한 이야기만이 들려왔다. 자기도 여학생 한 명과 그 자리를 떴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자리에 앉는 환우에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남학생이 다가왔다.
“야 너도 그 은빈이란 애 찍지 않았었냐?”
“아냐 인마….”
“아니긴 뭘 아냐. 너 찍은 거 다 봤는데.”
“아니라니까….”
환우는 쓴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치다 멀리서 남학생들과 떠들던 정혁과 눈이 마주쳤다. 자기도 모르게 잽싸게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환우….
‘내가 왜 이러지….’
너무도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렇게 환우의 새내기 대학생활은 별다른 변화 없이 흘러가게 되었다. 아니 변화가 있긴 했다. 바로 정혁과 함께 다니는 은빈의 모습을 혼자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버릇이 생겨버린 것이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 커플인 둘을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기에 다행이지, 만약 그런 사람들마저 없었다면 둘에게 들킬 정도로 오랫동안 바라보는 그였다.
‘그 애는 잘 지내나. 학교에서 도통 보이질 않네….’
소은을 떠올린 것이다. 그 날 그렇게 헤어진 이후 3주가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단 한 차례도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전화번호도 찍어주기만 했지, 받지는 못해서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다시 1주일이 지났을 무렵 환우의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도착했다. 내용을 확인하자 소은이었다.
[환우야 안녕^^? 나 소은이야. 기억하니?]
그때 이후 거의 한 달 만에 온 그녀의 문자에 환우는 반가움부터 앞선다.
[응. 당연하지. 잘 지내?]
환우의 답장에 바로 답장이 왔다.
[응. 잘 지내지^^/ 저기 혹시 토요일에 약속 있니?]
[아니 없어 ㅠㅠ]
[ㅎㅎ그럼 토요일날 만날래?]
환우는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처럼 외롭고 우울한 때에는 그녀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 ^^]
둘은 그렇게 주말에 만날 약속을 정했다.
*
4월의 맑디맑은 어느 토요일.
환우는 따사롭게 내리 쬐는 햇살을 받으며 소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을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도중, 저기 멀리서 노란 후드티를 귀엽게 차려입은 소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앞머리가 날리지 않도록 그러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쫄래쫄래 달려와 환우의 앞에 서는 그녀.
“헥, 헥…. 미안 환우야 늦었지.”
소은은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쉰다.
“아냐. 나도 방금 왔는걸.”
환우는 자신의 앞에서 살짝 혀를 내민 채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기같이 어려보이는 귀여운 외모. 약간은 헐렁해 보이는 노란 후드티와 그에 잘 어울리는 짧은 청치마.
치마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맨다리가 생각 외로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학교에서 자주 보던 은빈의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길고 매끈한 다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아….’
갑자기 은빈의 생각이 나자 앞에서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이러지 정말!’
방금 소은이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녀가 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호감까지 갖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은빈의 생각이 들자마자 그러한 소은조차도 너무나도 평범하게 보였다.
아니….
그녀가 평범해 보인다기보다는 일종의 패배감이 들었다.
정혁의 옆에서 우월한 미모를 뽐내며 걷는 은빈과 소은을 비교하자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 병신 같은 생각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는 환우가 걱정스러운지 소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왜 그러니?”
그녀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드는 환우.
“아, 아냐. 그냥 좀 이런 저런 생각하느라…. 근데 너 진짜 오랜만이다. 학교에서 보면 인사하자고 해놓고 학교에선 보이지도 않더라?”
“아…. 응. 사실 저기…. 멀리서 너 보이면 피했거든….”
“나를? 왜?”
“아니 저기 음…. 이상하게 부끄럽다고 해야 할까…. 그냥 그래서 좀 피해 다녔어.”
소은의 하얗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그, 그랬었구나. 흠…. 아. 내가 연락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난 번호를 안 받았더라고.”
“맞아! 내가 그때 너무 긴장해서 너 번호로 통화버튼을 누른다는 걸 깜빡했었어.”
소은의 말에 둘은 살짝 웃으며 어색한 분위기를 약간이나마 덜어낸다. 살짝 미소를 짓고 있던 소은이 손뼉을 마주쳤다.
“음…. 그럼 우리 뭐 할까?”
소은이 밝게 웃으며 그렇게 물었지만 환우의 입에서 마땅한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여자친구도 한 번 사귀어보지 못한데다, 지금 자신의 머릿속이 은빈의 생각으로 꽉 차 있으니 적극적으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로 아무 말이 없는 시간이 길어지자 금세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환우는 너무나도 어색한 분위기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당황한 소은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우리 영화 보러 갈래?”
“여, 영화?”
“응. 나 요즘에 보고 싶은 영화 있었거든 그거 보러 가자.”
결국 소은의 말대로 둘은 근처 영화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토요일 낮에 표를 구할 수가 있을까? 간신히 몇 장 남은 표는 아직도 네 시간도 넘게 남은 저녁 7시 30분 영화표였다.
소은은 시간이 너무 맞질 않자 울상을 지었다.
“어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네….”
환우는 마땅히 할 거는 없기에 우선 저녁 시간대 영화표를 사자고 제안했다. 영화표를 샀지만, 이젠 영화 시작시간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음…. 그럼 근처에서 뭐 간단하게 먹으면서 얘기라도 하자.”
이번에도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은 소은이었다.
허나 근처 커피숍에서도 서로 음료수만 만지작거리며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사람. 가끔 학교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짧게 끝나곤 했다. 그러던 도중 소은이 은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은빈이도 그 정혁이란 애랑 잘 사귀더라.”
“아, 응. 그렇지….”
환우의 대답에 소은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장난을 친다.
“에이 너도 은빈이 찍었었잖아. 지켜보는 기분은 어떠니?”
“하, 하…. 뭐 기분이 어떻긴 아무렇지 않아. 그냥 그때 한 번 찍어본 거야.”
실제 생각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꺼내는 환우.
“오? 그래? 그럼 여자친구는 안 만들어? 다른 좋아하는 애는 없니?”
“여자친구는 무슨 하하…. 대학 온지 얼마나 됐다고. 공부해야지 공부!”
환우가 짐짓 여유로운 척 자세를 잡으며 그렇게 대답한다. 환우의 대답에 소은은 피식 웃는다.
“뭐야 그게…. 너 여자친구 한 번도 안사귀어본 거 아니야?”
정확히 집어낸 소은의 말에 뜨끔한 환우는 이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그래…. 맞다…. 못 사귀어봤다….”
“어? 정말?”
소은이 놀라자 환우도 오기가 생겨 역으로 물었다.
“야! 너는 남자친구 사귀어 봤냐?”
“나, 나는 고등학교 때 사, 사귀어 봤어!”
소은은 대답을 하긴 하지만 왠지 말을 더듬는다. 환우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거 같아서 몰아붙이기로 했다.
“흥. 말 더듬는 거봐. 거짓말이지?”
“아, 아냐! 진짜야! 며, 며칠이긴 하지만….”
“며칠? 야 며칠이 사귄 거냐?”
환우가 꼬리를 잡았다는 듯 몰아붙인다. 허나 소은도 질 수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야 며칠도 사귄 거지! 넌 사귀어보지도 못했잖아!”
커피숍에 살짝 정적이 흐른다. 소은의 목소리가 꽤나 높았던 것이다. 무안해진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소은이 배시시 웃는다.
“우리가 너무 떠들었나 보다.”
“그러게…. 하하….”
어색한 것이 꽤나 사라진 두 사람이었지만, 네 시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별 이야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3D의 판타지물이었다. 생각보다 재미가 있어서 두 사람은 끝난 뒤에도 영화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극장을 빠져 나왔다.
극장을 나오자 9시가 되었다. 시계를 보던 소은은 헤어지긴 약간 애매한 시간인지라 무엇을 할까 또 고민을 한다. 그러다 저번에 환우가 술 마시는 걸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던 걸 떠올렸다.
“아 환우야. 우리 술 한 잔 하고 갈래? 너 술 마시는 거 좋아한다며.”
“술? 응 뭐 나야 좋지.”
환우가 좋다고 하자 소은은 활짝 웃는다.
“히히. 그래 가자.”
둘은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안주와 소주 한 병을 시키고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두 사람.
소은은 이렇게 둘이서 술을 마시니 과팅 때 생각이 난다며 웃는다.
“그땐 많이 추웠는데 날씨 금방 풀렸다. 그치?”
“응. 이제 봄이지 뭐….”
그렇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술을 마신다. 소은과 둘이 있는 걸 어색해하던 환우도 술이 조금씩 들어가자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다.
“너 근데 고등학교 때 며칠 사귀었다는 건 무슨 말이야? 남자친구랑 며칠 사귀어보고 헤어진 거야?”
술이 들어간 환우는 실례인 질문일 수도 있다는 걸 망각한 채 입을 열었다.
“아…. 응…. 그냥 그렇게 됐어.”
“왜 헤어졌는데?”
환우의 집요한 질문이 이어진다. 하지만 술이 약한 소은도 취기가 꽤나 오른지라 별다른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친구 소개로 만난 옆학교 남자애였는데…. 그냥 성격이 안 맞아서 1주일 만에 헤어졌지 뭐…. 아 넌 한 번도 못 사귀어 봤다고 했지?”
“응. 나야 뭐…. 성격 자체가 워낙 소심해서 여자한테 잘 다가가질 못해….”
“그렇구나….”
이렇게 짤막짤막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지만, 워낙 할 이야기가 없는 두 사람인지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보다는 술을 마시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자 술이 약한 소은이 확 취하게 되었다. 소은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환우에게 말한다.
“나 화장실 좀….”
화장실로 향하면서도 넘어질 듯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린다.
환우는 취한 소은을 보자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헉-! 뭐야.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토요일이라 지하철도 일찍 끊길 텐데….’
소은이 나오면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다리는데 얼른 나오질 않는다. 10분 쯤 기다리자 소은이 비틀거리며 나온다.
“미안 사람이 많아서….”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리에 앉는 그녀.
“소은아 우리 이제 집에 가야겠다. 지금 12시 반이야.”
환우의 말에 반쯤 눈이 풀려있던 소은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헤엑? 뭐?”
환우는 소은이 보태준 돈을 합쳐 얼른 계산을 하고 술집을 나온다. 그리고 취한 소은의 팔을 붙잡고 지하철로 갔지만 당연히 끊겨 있었다.
‘큰일났다….’
4월의 밤인지라 꽤나 쌀쌀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환우의 등엔 땀이 쫙 난다. 아까 소은의 지갑을 보니 현금이 꽤 들어 있어서 그걸로 택시를 태워 보내면 될 것 같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환우는 지금 자신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채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그녀…. 이런 그녀를 어떻게 혼자 택시에 태운단 말인가.
‘아…. 미치겠네. 난 혼자 사니까 집에 안 들어가도 상관없지만 얘는 집에서 지금 엄청 걱정하고 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소은이 들고 있는 작은 가방에서 핸드폰 진동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아 진짜…. 에라 모르겠다. 내가 같이 택시타고 가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소은에게 물어본다.
“소은아! 너 어디 살아? 나랑 같이 택시타고 가자.”
“….”
대답이 없다. 완전히 취해버린 것이다.
환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 취한 소은을 끌고 어딘가로 가기 시작했다.
환우가 소은을 끌고 온 곳은 근처 모텔이었다.
“저기…. 방 하나 주세요.”
열쇠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들어간 환우는 소은을 침대에 조심스레 눕힌다. 그리고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후우…. 나도 모텔은 처음인데…. 이렇게 생겼구나….’
이리저리 모텔내부를 둘러보다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소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치마가 살짝 올라가 드러난 새하얀 허벅지도….
“윽-!”
허겁지겁 소은의 치마를 내리고는 이불을 덮어준다. 그러나 이미 환우의 자지는 엉뚱한 상상으로 커질 대로 커진 상태였다.
‘제, 젠장…. 미친 생각하지 말자….’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텔레비전이나 봐야겠단 생각에 전원을 킨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리는데 모텔 특유의 성인 채널이 나온다. 그것도 포르노 수준의….
“으헉…!”
황급히 전원을 끄려다 그만둔다. 한참 결정적인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점점 흥분이 되 미치려고 하는 환우…. 게다가 지금 옆에는 술에 취해 뻗은 여자애가 있지 않은가….
텔레비전을 끄고 잠들어 있는 소은을 바라본다.
‘엉뚱한 생각하지 마라 최환우. 저렇게 아기처럼 순진한 얼굴로 자는 여자애한테 악마같은 마음 품지 말라고!’
이성이 그렇게 호소했지만, 욕망 또한 가만히 있진 않았다.
‘조금만 만져 볼까? 키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정신도 못 차리는데….’
슬그머니 소은에게 다가간다.
욕망의 승리였다.
누워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술 냄새가 약간 나긴 했지만 여자 특유의 기분 좋은 향기도 난다.
소은의 부드러운 입술을 빨다가 혀를 살짝 밀어 넣는다. 이게 자신의 첫키스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저, 저기 환우야….”
“헉-!”
소은의 입에 혀를 밀어 넣으려던 환우는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황급히 놀라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우와-!”
행정학과내에서도 다른 과 여자애들이랑 친하기로 유명한 한 남학생이 그렇게 말하자, 강의가 끝나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던 남학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댔다.
“뭐야. 웃겨.”
그러나 여자애들은 짜증난다는 듯, 하지만 전혀 신경은 쓰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야유만 보낼 뿐이었다.
“야 빨리 나와서 접수해. 10명 선착순이다.”
주선자 남학생이 그렇게 외치자 남학생들이 우르르 달려 나간다. 자리에 앉아 가만히 얘기를 듣던 환우도 재빨리 줄을 섰다. 앞에 서 있는 남자애들의 숫자를 세어보니 다행이 아홉 번째이다. 자기 뒤로 선 몇몇 남학생들이 투덜대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보인다.
‘휴우….’
환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흐뭇하게 자기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촌구석의 남중, 남고를 나온 환우는 여자친구를 사귀어보기는커녕, 여자의 손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상경해 행정학과에 11학번으로 입학해 처음해보는 미팅이니 어찌 기대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부푼 마음을 안고 고개를 내밀어 앞을 보기 몇 차례, 드디어 환우의 순서가 돌아왔다. 이름을 적던 주선자 남학생은 환우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름을 적는다.
“좋아. 최환우…. 이제 마지막이네.”
“야 나 된 거야? 확실히 적은 거지?”
환우가 재차 확인하자 남학생이 웃는다.
“야 여기 적었잖아. 너나 약속 펑크내지마라. 자 다음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환우는 기분 좋게 자리로 돌아와 주선자 남학생이 말하는 일정을 수첩에 받아 적기까지 했다. 이미 머릿속은 다가오는 봄날은 여자친구와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
3일 후, 드디어 과팅 날이 되었다. 학교 앞 호프집에서 만난 스무 명의 남녀학생…. 환우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앞에 마주 앉아 자기들끼리 도란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여학생들 중에 유난히 환우의 눈을 사로잡는 여학생이 있었다.
‘진짜 예쁘다….’
눈에 띄게 하얀 피부에, 약간은 도도할 것 같은 눈매를 가진 그녀…. 가끔씩 긴 머리를 시원스레 쓸어 넘기는 가느다란 손가락조차 아름답다.
자기소개 시간에 그녀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안녕-. 이은빈이라고 해.”
“와-!”
예쁜 여학생답게 남자애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엄청났다.
각자 간단한 소개를 하고 신나는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미팅 분위기보다는 일반적인 술자리 분위기였다. 환우의 눈은 처음부터 찍은 은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환우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눈이 마주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환우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술자리가 즐거웠다.
이런 저런 게임도하면서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던 도중, 과팅을 추진했던 남학생이 일어나 제안을 했다.
“자 이제 우리 사랑의 작대기 한 번 해보자. 만취되기 전에 찍어야지, 만취돼서 찍고 난 후 다음 날 자기가 누구 찍었는지 기억도 못하면 안 되잖아.”
남학생의 개그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린다.
“자 이제 그럼 젓가락 들고 내가 하나둘셋 하면 찍는 거야. 자 하나, 둘….”
젓가락을 든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은빈의 모습을 힐끔거리는 환우의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셋-!”
환우는 떨리는 손으로 은빈을 향해 젓가락을 내밀었다. 하지만 은빈의 젓가락은 누가 봐도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찰나의 일이었지만 환우의 눈엔 그런 그녀의 손동작이 한없이 느리게 보인다.
젓가락이 가른 운명에 여기저기서 부끄러워하는 웃음, 또는 낮은 탄식소리가 들려온다.
은빈을 찍은 남학생은 두 명이었다. 환우와 행정학과에서 가장 잘생긴 남학생인 정혁. 남자애들이 너무 예쁜 은빈은 맺어질 확률이 적다고 생각했는지 둘을 빼고 아무도 찍지 않은 것이다.
은빈을 가리킨 젓가락은 두 개였지만, 그녀의 손에 들려진 젓가락은 하나…. 그리고 그 젓가락은 환우가 아닌 그녀를 찍은 또 다른 사람인 정혁을 가리켰다.
은빈이 자신을 찍은 환우를 살짝 쳐다본다. 오늘 그녀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환우였지만 재빨리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하며 젓가락을 내렸다.
‘역시….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보면 그녀와 얘기 한 번 해본 적도 없잖아. 그런 그녀를 찍다니 쪽팔리게….’
자신이 기대했던 모든 상황이 무너진 뒤에야 현실로 돌아온 환우는 그제야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단 하나의 젓가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여학생. 아니 자기소개 할 때 한 번 보긴 했었던 것 같다. 물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평범한 여학생…. 못생긴 것은 아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이 꽤나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은 환우가 자신을 쳐다보자 고개를 푹 숙인다. 환우는 그런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했지만 기억이 날 리 없었다.
이윽고 술자리는 남녀가 섞여 앉아 진행이 되었다. 아니, 젓가락이 맞은 사람들끼리 앉다보니 자연스레 섞였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환우는 정혁의 옆에 앉아 밝은 미소로 대화하는 은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와 말 한 번 섞은 것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괜스레 가슴이 쓰리다….
*
과팅이 끝난 스무 명의 남녀학생들은 술집에서 나와 자연스레 끼리끼리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개중에는 혼자 서서 짜증나는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환우도 혼자 멀거니 서서 정혁의 옆에 붙어 웃고 있는 은빈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 이제 더 놀 사람들은 놀고,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좋은 데 갈 사람은 좋은 데 가고….”
주최자 남학생의 말에 몇몇 여자애들이 야유를 보낸다.
‘집에나 가자….’
환우가 쓸쓸히 발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오려 할 때 누군가가 외투소매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아까 자신을 찍었던 여학생이다.
“응, 응?”
적잖이 당황이 되었다. 갑자기 자신의 소매는 왜 잡는 거지….
“저, 저기….”
생각보다 높은 음색의 귀여운 목소리를 가진 여학생.
“나랑 더 놀다 갈래…?”
순간 환우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 얌전해 보이는 여학생이 겉보기와 달리 엄청나게 적극적이다라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놀다 가자는 게 무슨 의미일까하는 생각까지….
환우는 그런 생각들을 거치고 난 후에야 여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백육십정도 돼 보이는 키에 보통의 몸매, 어깨까지 내려오는 평범한 머리…. 아기같이 맑은 얼굴이 특색이라면 특색일까? 굉장히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시, 싫어?”
이젠 살짝 떨리기까지 하는 여학생의 말에 환우는 결론을 내려야했다.
“아, 아냐. 싫기는…. 그, 그래….”
결국 둘은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소주 한 병과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도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앉아 있는 두 사람…. 어색한 침묵이 오랫동안 이어진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여학생 쪽이었다. 예의 그 높은 음색의 목소리로….
“저, 저 술 잘 마시니? 난 되게 못 마셔….”
“아, 아…. 응. 난 좀 잘 마시는 편이긴 해. 좋아하기도 하고.”
환우의 대답에 그녀가 어색하게 웃는다.
“그, 그렇구나….”
다시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내 여학생이 소주를 따더니 어색한 동작으로 환우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다.
“바, 반가워. 화, 환우야….”
환우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이름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아. 으응…. 그, 근데 저기 미안한데 난 너 이름을 기억 못해….”
“아…. 응. 괜찮아, 괜찮아. 그럴 거라 생각했어. 내 이름은 소은이야. 유소은….”
아기 같은 얼굴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서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으며 술만 홀짝 거린다. 그러다 환우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왜 말 한 번 섞어보지 못한 나를 찍었을까…. 물어보는 것이 예의가 아니란 생각도 들었지만,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저, 저기 소은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은은 환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으, 응?”
“그, 근데 왜 날 찍은 거…야?”
“아….”
다시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녀…. 환우는 그런 그녀를 보고는 재빨리 말했다.
“아….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아, 아냐…. 사실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한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환우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주일 전쯤에 너를 본 적이 있어.”
“나, 나를?”
순간 그녀가 스토커인가 하는 생각까지 드는 환우였다.
“으, 응…. 그때 너가 학교 앞 지하철역에서 계단 위까지 할머니 짐 들어다 드리고, 버스 타는 곳까지 안내해드린 다음에 할머니 버스타시는 거 기다렸다가 나중에 웃는 얼굴로 인사까지 하면서 보내드리는 거 봤었어….”
환우는 소은의 말에 깜짝 놀랐다. 확실히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그거 보고선 아 저사람 참 착한사람이구나 생각했었어.”
“그래서 과팅에 나온 거야?”
환우의 질문에 소은이 놀라 손사래를 친다.
“아, 아냐. 그때는 그냥 너 한 번 봤을 뿐이고, 과팅도 친구들이 나가자고해서 억지로 끌려나오듯 나온 건데…. 근데 별 생각 없이 나왔는데 그때 봤던 너가 보여서 정말 놀랐어…. 그래서 괜히 가슴이 두근거려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고개를 푹 숙인다. 환우는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환우의 얼버무리는 듯한 대답으로 분위기는 다시 어색해졌다.
사실 지금 환우의 머릿속엔 눈앞의 유소은이란 이 여학생보다, 아까 봤던 이은빈이란 예쁜 여학생의 생각으로 꽉차있었다.
유소은이란 여학생이 자신을 붙잡고 조금 더 놀다 가자고 하고, 자신을 찍은 이유를 설명하기 전까진 솔직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겨우 전에 한 번 봐서라는 것을 알자 더 이상의 두근거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잖아.’
환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충분히 두근거릴만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 상대가 이은빈이 아니라 유소은이라는 것이 더 이상의 설렘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시 눈앞의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워하고 있는 그녀…. 은빈에 비해선 조족지혈이지만 그래도 귀엽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마음이 이렇다니…. 소은처럼 자신에게 저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여자라면 확실히 말만 잘하면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환우에겐 이 눈앞의 소은에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저 은빈의 얼굴만이 잔뜩 떠오를 뿐이었다.
환우가 아무 말이 없자 소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 근데 넌 은빈이 찍었었지…?”
“응? 응….”
소은도 봤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하지…. 은빈인 여자가 봐도 엄청 예쁘니까….”
환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소은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우리 그, 그래도 친구로 지낼 수 있잖아. 응? 저, 전화번호 알려줄래? 가끔 만나서 놀 수 있지? 그치?”
“으, 응…. 당연하지.”
환우는 얼떨결에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헤헤…. 고마워.”
핸드폰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그녀…. 환우는 순간 그녀가 무척이나 순수한 미소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집에서 나와 소은은 학교에서 보면 꼭 인사하자는 말을 남기고는 쫄래쫄래 사라져갔다. 환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았지만, 머릿속엔 온통 아까 정혁과 떠난 은빈의 생각뿐이었다.
*
주말을 보내고 학교에 간 환우의 귀엔 정혁과 은빈에 대한 이야기만이 들려왔다. 자기도 여학생 한 명과 그 자리를 떴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자리에 앉는 환우에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남학생이 다가왔다.
“야 너도 그 은빈이란 애 찍지 않았었냐?”
“아냐 인마….”
“아니긴 뭘 아냐. 너 찍은 거 다 봤는데.”
“아니라니까….”
환우는 쓴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치다 멀리서 남학생들과 떠들던 정혁과 눈이 마주쳤다. 자기도 모르게 잽싸게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환우….
‘내가 왜 이러지….’
너무도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렇게 환우의 새내기 대학생활은 별다른 변화 없이 흘러가게 되었다. 아니 변화가 있긴 했다. 바로 정혁과 함께 다니는 은빈의 모습을 혼자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버릇이 생겨버린 것이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 커플인 둘을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기에 다행이지, 만약 그런 사람들마저 없었다면 둘에게 들킬 정도로 오랫동안 바라보는 그였다.
‘그 애는 잘 지내나. 학교에서 도통 보이질 않네….’
소은을 떠올린 것이다. 그 날 그렇게 헤어진 이후 3주가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단 한 차례도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전화번호도 찍어주기만 했지, 받지는 못해서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다시 1주일이 지났을 무렵 환우의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도착했다. 내용을 확인하자 소은이었다.
[환우야 안녕^^? 나 소은이야. 기억하니?]
그때 이후 거의 한 달 만에 온 그녀의 문자에 환우는 반가움부터 앞선다.
[응. 당연하지. 잘 지내?]
환우의 답장에 바로 답장이 왔다.
[응. 잘 지내지^^/ 저기 혹시 토요일에 약속 있니?]
[아니 없어 ㅠㅠ]
[ㅎㅎ그럼 토요일날 만날래?]
환우는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처럼 외롭고 우울한 때에는 그녀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 ^^]
둘은 그렇게 주말에 만날 약속을 정했다.
*
4월의 맑디맑은 어느 토요일.
환우는 따사롭게 내리 쬐는 햇살을 받으며 소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을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도중, 저기 멀리서 노란 후드티를 귀엽게 차려입은 소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앞머리가 날리지 않도록 그러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쫄래쫄래 달려와 환우의 앞에 서는 그녀.
“헥, 헥…. 미안 환우야 늦었지.”
소은은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쉰다.
“아냐. 나도 방금 왔는걸.”
환우는 자신의 앞에서 살짝 혀를 내민 채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기같이 어려보이는 귀여운 외모. 약간은 헐렁해 보이는 노란 후드티와 그에 잘 어울리는 짧은 청치마.
치마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맨다리가 생각 외로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학교에서 자주 보던 은빈의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길고 매끈한 다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아….’
갑자기 은빈의 생각이 나자 앞에서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이러지 정말!’
방금 소은이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녀가 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호감까지 갖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은빈의 생각이 들자마자 그러한 소은조차도 너무나도 평범하게 보였다.
아니….
그녀가 평범해 보인다기보다는 일종의 패배감이 들었다.
정혁의 옆에서 우월한 미모를 뽐내며 걷는 은빈과 소은을 비교하자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 병신 같은 생각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는 환우가 걱정스러운지 소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왜 그러니?”
그녀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드는 환우.
“아, 아냐. 그냥 좀 이런 저런 생각하느라…. 근데 너 진짜 오랜만이다. 학교에서 보면 인사하자고 해놓고 학교에선 보이지도 않더라?”
“아…. 응. 사실 저기…. 멀리서 너 보이면 피했거든….”
“나를? 왜?”
“아니 저기 음…. 이상하게 부끄럽다고 해야 할까…. 그냥 그래서 좀 피해 다녔어.”
소은의 하얗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그, 그랬었구나. 흠…. 아. 내가 연락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난 번호를 안 받았더라고.”
“맞아! 내가 그때 너무 긴장해서 너 번호로 통화버튼을 누른다는 걸 깜빡했었어.”
소은의 말에 둘은 살짝 웃으며 어색한 분위기를 약간이나마 덜어낸다. 살짝 미소를 짓고 있던 소은이 손뼉을 마주쳤다.
“음…. 그럼 우리 뭐 할까?”
소은이 밝게 웃으며 그렇게 물었지만 환우의 입에서 마땅한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여자친구도 한 번 사귀어보지 못한데다, 지금 자신의 머릿속이 은빈의 생각으로 꽉 차 있으니 적극적으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로 아무 말이 없는 시간이 길어지자 금세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환우는 너무나도 어색한 분위기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당황한 소은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우리 영화 보러 갈래?”
“여, 영화?”
“응. 나 요즘에 보고 싶은 영화 있었거든 그거 보러 가자.”
결국 소은의 말대로 둘은 근처 영화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토요일 낮에 표를 구할 수가 있을까? 간신히 몇 장 남은 표는 아직도 네 시간도 넘게 남은 저녁 7시 30분 영화표였다.
소은은 시간이 너무 맞질 않자 울상을 지었다.
“어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네….”
환우는 마땅히 할 거는 없기에 우선 저녁 시간대 영화표를 사자고 제안했다. 영화표를 샀지만, 이젠 영화 시작시간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음…. 그럼 근처에서 뭐 간단하게 먹으면서 얘기라도 하자.”
이번에도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은 소은이었다.
허나 근처 커피숍에서도 서로 음료수만 만지작거리며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사람. 가끔 학교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짧게 끝나곤 했다. 그러던 도중 소은이 은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은빈이도 그 정혁이란 애랑 잘 사귀더라.”
“아, 응. 그렇지….”
환우의 대답에 소은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장난을 친다.
“에이 너도 은빈이 찍었었잖아. 지켜보는 기분은 어떠니?”
“하, 하…. 뭐 기분이 어떻긴 아무렇지 않아. 그냥 그때 한 번 찍어본 거야.”
실제 생각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꺼내는 환우.
“오? 그래? 그럼 여자친구는 안 만들어? 다른 좋아하는 애는 없니?”
“여자친구는 무슨 하하…. 대학 온지 얼마나 됐다고. 공부해야지 공부!”
환우가 짐짓 여유로운 척 자세를 잡으며 그렇게 대답한다. 환우의 대답에 소은은 피식 웃는다.
“뭐야 그게…. 너 여자친구 한 번도 안사귀어본 거 아니야?”
정확히 집어낸 소은의 말에 뜨끔한 환우는 이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그래…. 맞다…. 못 사귀어봤다….”
“어? 정말?”
소은이 놀라자 환우도 오기가 생겨 역으로 물었다.
“야! 너는 남자친구 사귀어 봤냐?”
“나, 나는 고등학교 때 사, 사귀어 봤어!”
소은은 대답을 하긴 하지만 왠지 말을 더듬는다. 환우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거 같아서 몰아붙이기로 했다.
“흥. 말 더듬는 거봐. 거짓말이지?”
“아, 아냐! 진짜야! 며, 며칠이긴 하지만….”
“며칠? 야 며칠이 사귄 거냐?”
환우가 꼬리를 잡았다는 듯 몰아붙인다. 허나 소은도 질 수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야 며칠도 사귄 거지! 넌 사귀어보지도 못했잖아!”
커피숍에 살짝 정적이 흐른다. 소은의 목소리가 꽤나 높았던 것이다. 무안해진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소은이 배시시 웃는다.
“우리가 너무 떠들었나 보다.”
“그러게…. 하하….”
어색한 것이 꽤나 사라진 두 사람이었지만, 네 시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별 이야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3D의 판타지물이었다. 생각보다 재미가 있어서 두 사람은 끝난 뒤에도 영화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극장을 빠져 나왔다.
극장을 나오자 9시가 되었다. 시계를 보던 소은은 헤어지긴 약간 애매한 시간인지라 무엇을 할까 또 고민을 한다. 그러다 저번에 환우가 술 마시는 걸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던 걸 떠올렸다.
“아 환우야. 우리 술 한 잔 하고 갈래? 너 술 마시는 거 좋아한다며.”
“술? 응 뭐 나야 좋지.”
환우가 좋다고 하자 소은은 활짝 웃는다.
“히히. 그래 가자.”
둘은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안주와 소주 한 병을 시키고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두 사람.
소은은 이렇게 둘이서 술을 마시니 과팅 때 생각이 난다며 웃는다.
“그땐 많이 추웠는데 날씨 금방 풀렸다. 그치?”
“응. 이제 봄이지 뭐….”
그렇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술을 마신다. 소은과 둘이 있는 걸 어색해하던 환우도 술이 조금씩 들어가자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다.
“너 근데 고등학교 때 며칠 사귀었다는 건 무슨 말이야? 남자친구랑 며칠 사귀어보고 헤어진 거야?”
술이 들어간 환우는 실례인 질문일 수도 있다는 걸 망각한 채 입을 열었다.
“아…. 응…. 그냥 그렇게 됐어.”
“왜 헤어졌는데?”
환우의 집요한 질문이 이어진다. 하지만 술이 약한 소은도 취기가 꽤나 오른지라 별다른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친구 소개로 만난 옆학교 남자애였는데…. 그냥 성격이 안 맞아서 1주일 만에 헤어졌지 뭐…. 아 넌 한 번도 못 사귀어 봤다고 했지?”
“응. 나야 뭐…. 성격 자체가 워낙 소심해서 여자한테 잘 다가가질 못해….”
“그렇구나….”
이렇게 짤막짤막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지만, 워낙 할 이야기가 없는 두 사람인지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보다는 술을 마시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자 술이 약한 소은이 확 취하게 되었다. 소은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환우에게 말한다.
“나 화장실 좀….”
화장실로 향하면서도 넘어질 듯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린다.
환우는 취한 소은을 보자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헉-! 뭐야.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토요일이라 지하철도 일찍 끊길 텐데….’
소은이 나오면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다리는데 얼른 나오질 않는다. 10분 쯤 기다리자 소은이 비틀거리며 나온다.
“미안 사람이 많아서….”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리에 앉는 그녀.
“소은아 우리 이제 집에 가야겠다. 지금 12시 반이야.”
환우의 말에 반쯤 눈이 풀려있던 소은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헤엑? 뭐?”
환우는 소은이 보태준 돈을 합쳐 얼른 계산을 하고 술집을 나온다. 그리고 취한 소은의 팔을 붙잡고 지하철로 갔지만 당연히 끊겨 있었다.
‘큰일났다….’
4월의 밤인지라 꽤나 쌀쌀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환우의 등엔 땀이 쫙 난다. 아까 소은의 지갑을 보니 현금이 꽤 들어 있어서 그걸로 택시를 태워 보내면 될 것 같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환우는 지금 자신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채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그녀…. 이런 그녀를 어떻게 혼자 택시에 태운단 말인가.
‘아…. 미치겠네. 난 혼자 사니까 집에 안 들어가도 상관없지만 얘는 집에서 지금 엄청 걱정하고 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소은이 들고 있는 작은 가방에서 핸드폰 진동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아 진짜…. 에라 모르겠다. 내가 같이 택시타고 가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소은에게 물어본다.
“소은아! 너 어디 살아? 나랑 같이 택시타고 가자.”
“….”
대답이 없다. 완전히 취해버린 것이다.
환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 취한 소은을 끌고 어딘가로 가기 시작했다.
환우가 소은을 끌고 온 곳은 근처 모텔이었다.
“저기…. 방 하나 주세요.”
열쇠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들어간 환우는 소은을 침대에 조심스레 눕힌다. 그리고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후우…. 나도 모텔은 처음인데…. 이렇게 생겼구나….’
이리저리 모텔내부를 둘러보다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소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치마가 살짝 올라가 드러난 새하얀 허벅지도….
“윽-!”
허겁지겁 소은의 치마를 내리고는 이불을 덮어준다. 그러나 이미 환우의 자지는 엉뚱한 상상으로 커질 대로 커진 상태였다.
‘제, 젠장…. 미친 생각하지 말자….’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텔레비전이나 봐야겠단 생각에 전원을 킨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리는데 모텔 특유의 성인 채널이 나온다. 그것도 포르노 수준의….
“으헉…!”
황급히 전원을 끄려다 그만둔다. 한참 결정적인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점점 흥분이 되 미치려고 하는 환우…. 게다가 지금 옆에는 술에 취해 뻗은 여자애가 있지 않은가….
텔레비전을 끄고 잠들어 있는 소은을 바라본다.
‘엉뚱한 생각하지 마라 최환우. 저렇게 아기처럼 순진한 얼굴로 자는 여자애한테 악마같은 마음 품지 말라고!’
이성이 그렇게 호소했지만, 욕망 또한 가만히 있진 않았다.
‘조금만 만져 볼까? 키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정신도 못 차리는데….’
슬그머니 소은에게 다가간다.
욕망의 승리였다.
누워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술 냄새가 약간 나긴 했지만 여자 특유의 기분 좋은 향기도 난다.
소은의 부드러운 입술을 빨다가 혀를 살짝 밀어 넣는다. 이게 자신의 첫키스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저, 저기 환우야….”
“헉-!”
소은의 입에 혀를 밀어 넣으려던 환우는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황급히 놀라 그녀에게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