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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 - 20부

관리자 0 4360
-바람소리-



제 20 부 : 새식구를 맞으며



‘그만 울어…..성자야….그만….’



‘흑흑…흑흑…..끅끅……’



기어이 딸꾹질을 할 때까지 목을 놓아 울어 버리는 그녀를 내려다 보며, 이마에 진땀까지 쏟아내는 그녀의 이마를 쓸어주는 진검사였다.



‘성자야. 널 만나면서 한번도 널 창녀로 생각한 적 없었다. 그건 정말이야. 내가 나쁜 놈이라서……, 그 년 때문에 상처받은 가슴이 원통해서, 널 그렇게 했던걸….이해하지? 앞으론 절대 그러지 않을꺼다.’



‘흑흑…끅끅…근데…..왜 갑자기…….’



‘나 오늘, 우연찮게……. 윤택이 자슥에게 다 들었어. 너! 날 만나고 나서도, 일 나간다고 계속 거짓말 해오던 거……이 두 귀로 다 들었다. 썅노무 쉐이, 도와주면 도와주고 있다구 말이라도 할 것이지…..그 자식이 이제까지 널 도와 줬다며?’



‘말하지 말라고 기자오빠가 그래서…..’



‘왜?’



‘오빠의 상한 심정을 보살펴 줄 여자가 많지 않다고 그랬거덩여. 전 몸 파는 거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그랬는데도…..’



‘그랬는데?’



‘우선 일을 나가지 말고, 오빠한테는 거짓말로 둘러대라고 하더라구여. 저를 찾아와서 한동안 말을 못했져. 닮아도 어찌 이렇게 닮을 수 있느냐며…..오빠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다 받아 주라구……때리던, 덮치던 간에……그 뒤는 기자오빠가 알아서 하겠다며….때가 되면 오빠가 자기한테 찾아 올 때가 있을테니…..저 보고는 잘 참으라고만 했져……’



‘그랬구만…..얼마나 힘들었니? 그래, 그 자식이 뭘로 도와 줬다니? 돈도 변변찮은 인간인데……’



‘저라구 도움만 받을 수 없었어여. 닥치는대로 일하다 보니, 사는 게 그랬져……’



진검사는 그제서야 그녀를 만났을때, 멋들어지게 손질되어 있던 손톱이 어느새 없어지고, 그 매끈하던 손이 거칠게 변해져 있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진검사는 그 거칠어진 손을 잡은 채, 그녀의 위에서 내려와 옆에 누웠다. 마치 부부처럼 같은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런 걸 모르고 있었다니….그저 너를 아프게만 했구나.’



‘아니에여. 오빠가 오면, 전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여. 아파도 기쁘구, 쓰라려도 즐겁구, 온 몸에 멍이 들어도 행복 했다구여. 오빠가 돌아가고 나면, 한동안 전 몸을 안 씻어여. 얼굴에 묻은 오빠의 침이 다 말라 붙어도, 보지가 꾸덕꾸덕 해지도록 씻질 않아도, 기뻤다는 거….오늘 첨 말하는 거에여. 그게 오빠의 맘이니까여. 전 그것 마저도 감사하고 살아가야 하는 갈보년에다, 창년데…….뭘 더 바라겠어여….’



‘이젠 아니야. 그 쇄끼…..하라는 기자질은 않허고 설랑…….이리 와봐.’



진검사는 옆으로 누워,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술이 거나하게 취해가는 도중에 윤택이 그에게 소리친 것이 생각났다.



‘야, 이 호랑말코 같은 씨벌넘아! 세상이 좇같다고 사람 맘이 다 그렇게 드럽다고 생각허면 넌 정말 죽일넘인 거 아냐? 내가 뭐 아쉬운 게 있다고 카드깡에, 빚까지 져가며, 니 여자 보살폈는데? 내가 니 밑구녕이나 핥는 놈으로 뵈냐? 너 세상 어느 천지, 눈까리 까 뒤집고 찾아봐라, 그 여자만큼 널 사랑해 주는 여자 있는가? 암만 거죽 씻어 재끼고, 명품에, 향수로 쳐바른다고 해도, 속까지 썩어 문드러져서 고름이 질질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들 천지인 이 마당에, 그 여자 처럼 바라는 것도 없이, 널 좋아해 주는 여자, 너 찾을 수 있을 거 같냐? 그게 무신 전과자 잡아 들이듯이 쉬운 일인 거 가터? 너 그 여자가 너 만나고 부터, 딴 남자가 자기 몸을 만지는 게 징그러워서, 하루 벌어 먹기도 어려운 마당에 일 끊은 거 모르지? 그러고도 니가 사람새끼냐?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정신 쫌 차려라. 아무도 너란 인간이랑 친구 해주는 얼빵한 쇄끼들 없쥐? 왠지 알아? 니 눈엔 니 인생만 젤루 중요허다고 모가지에 공구리치고, 어깨에 후까쉬 빡주고 있는데, 누가 기분이 내키겠냐 이거야. 그래도 나 같이 미친갱이 아닌 담에야, 가까이 할 이유가 없쥐. 에이 좇겉은 쇄끼…..말해줘야 들어 처먹어야쥐…..내도 미친 놈이지. 저런 똥고집을 뭐가 잘 될거라고 그 정성을 때려 대는건지, 나원참…..’



진검사는 윤택의 맘을 이제야 알 것도 같았다. 남들이 눈쌀을 찌푸리건 말건, 자신에게만은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농처럼 말하던 것을, 늦게사 깨달은 자신의 돌같은 대가리가 미욱스럽기만 했다.



‘성자야. 날 용서해라…..아주 많이……결혼하자라는 말은…… 아직 못해. 솔직하게 말 허자면…..그래도 이렇게 사는 걸 안 이상, 더는 참을 순 없다……. 같이 살아보자, 우리…..한동안은…한동안은….니 얼굴을 보면서, 그 년 생각이 나긴 할꺼야. 나 거짓말은 못한다. 그래도, 오빠가 잊어볼께. 얼굴은 같아 보여도, 성자는 나에게 유일한 여자라는 걸 이제사 깨닫고 있으니…..별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꺼야. 같이 살자….어렵더라도…..같이…..’



그녀가 말이 없었다. 진검사는 얘기를 하다말고, 말없이 품에 안겨 있던 그녀의 얼굴을 찾았지만, 벌써 그녀는 그의 품 속에서 쌔근대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언제나 벼락처럼 휘몰아치고, 상처난 몸뚱아리를 내팽게친 채, 사라지는 그를 바라다 보기만 했던 그녀에게 있어서, 그렇듯 순순한 포옹은 마약과도 같은 수면제였을 거란 생각을 하는 진검사…..그의 귓가에 술이 거나하게 올라 비틀대며, 택시를 잡는 그 순간, 자신의 귀에 쏜살같이 무언가를 속삭인 윤택의 말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곰곰히 되짚어 보아도, 그냥 안개속에서 들리는 짐승들의 울부짖음 같다는 느낌만이 떠오르고 있어서 마음이 무척 무거워지고 있었다.



‘딩딩딩….’



‘나다…..너 이 시키…..’



‘어디냐? 출근 했냐? 어제 저녁에 졸나구 퍼 재끼는 거 같드만…..그래도 애국허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만…..’



‘너 윤택이, 너 죽는다!’



‘허어, 이젠 아무나 보고 질러대? 이거 대한민국 검사가 멀쩡한 민주시민 협박허는데, 누구 잡아 줄 인간들 없나? 히히….성자씨는 잘 있구? 너 어제 감동 쪼매 먹었는지, 그 집으로 간다고, 큰소리 뻥뻥 쳐대드만…..가긴 갔냐?’



‘갔지, 이 씹새야! 글구 지금 당장 나가서, 니 통장 확인해라. 인터넷 뱅킹으로 니 구좌에 성자 도운거 플러스 알파로 돈 날려 놨으니….씨벌넘이 누굴 도우려면 얘길 허지….너 그럼 나 다신 안 본다, 알쥐? 내 똥꼬집?’



‘똥집이면, 똥집이쥐, 똥꼬집은 또 뭐래? 포장마차에서 뭘 잘못 드셨남? 안그래도 나 안보고는 못 배길껄? 이따가 오후에 쫌 보자. 할 말도 있고, 전해줄 것두 있고….머릿속이 근질근질 허지, 지금?’



‘그래 미치겠다. 어제 택시 탈 때 뭐라고 씨부린 거냐?’



‘범인이 어찌 학의 고매함을 눈치채리오! 허허허….그게 바로 속경술(速涇術)이란 거야. 몰랐쥐?’



‘속경술?’



‘그런 게 있다. 예전에 무인들이나 고승들 사이에 유행허던 것이쥐, 장고한 스토리를 빠르고, 비밀스럽게 전해야 허는데, 지필묵이 없을 때 허는 짓거리 거덩. 사람이 가늠하는 단위 시간 영역을 넘어서는, 빠른 속도와 입술의 내공을 이용해서, 니 대가리에 창 꽂듯이 우악시럽게, 길고 긴 스토리를 한방에 찔러넣는 거지. 그게 드라이 아이스처럼 니 뇌속에 팍 꽂혀서는, 드라이 아이스가 승화되면서 천천히 냉기를 풀어가듯이, 니 머리속에서 하나하나 천천히, 그 길고 긴 스토리가 장편 서사시 처럼, 줄줄 풀려 나가는 거야. 어때? 신기허지?’



‘또 그 놈의 노가리…..암튼 그 동안 애쓰고 욕 봤다. 그 집 니가 알아서 써라. 집 잃고 거리에 나 앉은 불쌍한 사람들 있잖어? 넌 기자니깐두루 그런 사람들 많이 접할 꺼 아니냐? 그러니, 아무런 걱정 없이, 비라도 피하라고 그냥 줘 버려.’



‘무신 집? 성자씨 옥탑방? 어제 너 무신 일 있었냥? 혹시 성자씨 쫓아낸 거는 아니궁?’



‘워,워,워, 너도 많이 알면 다쳐, 알았지? 그렇게만 알고…..’



‘벌써 전화 받았다, 임마…..속일 껄 속여야쥐. 새벽부텀, 너 나가고, 성자씨가 울며 불며, 좋아 죽는 목소리로 전화 벌써 날렸넹! 집으로 데리고 들어 왔다며? 잘했다! 역쉬! 내 눈까리 동태 눈깔이라는 우리 마누라, 오늘 완전 죽었쓰…..’



‘근데, 만날 껀수는 뭔데?’



‘니가 지금 헛지랄 떠는 거…..어제 내가 한 말 잊지는 않고 있쥐? 낚시질이나 하고 있으란 말…..한가지 더…..주위의 누구도 믿지마라. 정신나간 짓거리 까지는 아니더라도, 검사랍시고 똥플레이 쫌 한다고, 옷 벗으란 법은 없으니, 칼을 뽑아야 할 시기를 니 스스로 잘 가늠허란 말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쥐? 전생의 그 욱하는 성깔에다, 저지르지 않아도 될 잘잘못을 이생에서 또 되풀이 허면 쓰나? 그럴려면 뭐가 아쉬워서 내가 천기까정 누설허면서, 니 같이 못된 종자 돕고 앉았게? 안 그러냐? 나 바쁘다. 이따가 보자구……’



진검사는 어깨가 한층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매달려, 온 몸을 내던지던 일들이 하찮게 느껴지고 있었고, 친구 윤택의 조언처럼, 첨부터 수사를 다시 찬찬히 시작해도, 결코 손해될 것이 없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검사님, 오늘 좋으신 일 있나봐여?’



‘내가 그렇게 보여? 그럼 그런가 보지.’



‘어제는 어디 다녀 오셨는데, 그렇게 부리나케 나가셨데여?’



‘응, 동창 놈이 여자 하나 소개시켜 주겠다구, 그 와중에 불러내서 말이야. 알고보니까, 이혼도 허덜 않은 바람난 년 인거 있지?’



‘그래서여?’



‘이 형사, 뭐가 더 알고 싶은데?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어제 한 코 걸치고 빠이빠이 했지.’



‘아니, 검사님도 그런 거 할 쭐 아세여?’



‘그럼, 난 사내새끼 아닌감? 검사가 무신 동네 훈장 선생인가? 마냥 도덕책 붙들고 앉았게? 헐땐 허고, 깔땐 까는 거야. 나 이래뵈도 틈틈이 비아그라에 목말라 허는 자연인 이라구, 알어?’



‘와, 다시 봐야겠네….검사님두….’



고개를 쩔래쩔래 흔드는 이형사를 뒤로 하고, 진검사는 방을 나왔다. 복도를 가로질러 옥상으로 가려다 마주친 부장검사….



‘자네, 앞으로 어떡 헐른지, 보고라도 다시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오늘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그건 나중에 헐라구 그러는데여?’



‘뭬이야? 자네 정신이 있나, 없나? 때가 어느 땐데….’



‘때가 어느 때긴여. 처녀, 총각 시집가고 장가가는, 결혼 씨즌 아닙니까? 아시면서…..’



진검사는 능청을 떨어가며, 복도를 지나쳐, 옥상으로 올라가 버렸다. 뒤꼭지를 때리는 그 근지러운 시선을 나 몰라라할 진검사는 아니었지만, 철저히 자신을 감추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윤택의 말이 귓가에서 뱅뱅 돌고 있는 한, 바보처럼 이리 휘돌리고, 저리 끌려다니지 만은 않을 거라는 다짐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응! 여기다. 어째 얼굴이 해바라기?’



‘괜한 친절은? 그리구, 은퇴한 노인들도 아니구, 공원 벤취가 뭐냐? 남사시럽구로….그리구,니 눔 땜시롱 입 하나 더 늘었는데, 어쩔꺼야?’



‘야! 막말로, 능력좋고, 수완좋은 파출부 떡 하니 데려다 놓고서, 난감해 허기는……어때 발상의 전환으로 세상이 확 달리 보이는 느낌이?’



‘아예 빙신 취급에, 완전 또라이 되기 딱 3초 걸리드라. 암튼 너란 쇄이, 남 잘되는 꼴을 못보지. 그래 할 말은 뭔데?’



‘캬. 이거, 나라의 녹을 처먹고 있다는 인간이 해야될 일을, 내가 대신 이렇게 해주고 있는데, 칭찬은 커녕, 녹봉을 나눠 드시자는 배려도 없고설랑, 참 징하다, 징해…..’



‘누가 허랬남?’



‘자 이거 쫌 봐.’



‘뭔데?’



윤택이 내미는 서류는 제법 두껍기도 했거니와, 오래되어 산화된 종이 빛깔로 보아, 꽤 오랜동안 모아온 자료가 분명했다.



‘너, 기자질 허다허다, 남 뒤나 캐내고 다니는 흥신소 알바까정 허냐? 이거 너무 징하면 법에 걸리는 거 알고는 있냐?’



‘읽어나 보고, 말해라, 나 원, 성질머리 허구는…..’



그 내용은 이제까지, 진검사가 자라오면서, 혹은 살아오면서 들어오고, 알고 있던 누구의 비리네, 의문스런 사고내용, 파헤쳐지지 않고 묻혀 버렸다고 세간에서 떠드는 미제사건, 자살과 타살의 공방이 끊이지 않는 법정 계류껀까지 아주 잡다한 껀수들을 모아놓은 기록철의 느낌이 다분했다.



‘어때? 읽으신 소감이? 독후감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다음으로 이걸 봐 봐.’



하면서 윤택은 두번째 묶음을 내어 놓았다. 그 서류철은 정부와 기업간의 결탁, 밀결합, 부정입찰이나 담합이 의심되는 민관 프로젝트등에 대한 조사 보고서 였다. 그것도 이미 세간에서 회자되어 더 이상 재미있을 건더기가 아닌, 시도때도 없이 구정연휴마다 방영되는, 흘러간 추억의 영화같은 느낌의, 누구나 다 아는 고리타분한 소재들 뿐이었다.



‘다들 알고 있는 풍월들인데, 새삼스러울 꺼 까지야….’



‘자, 마지막으로 이걸 봐, 봐. 그리고 얘기해 보셈.’



윤택이 마저 들고 있는 두개의 서류철 중에서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잔뜩 숫자로 되어 있는 통장 사본카피와 수표추적 자료가 들어가 있었다. 어디서 얻었는지, 대외비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손에 쥐게 된 경위를 물어야 했건만, 윤택과 진검사의 사이에 그런 것은 중요한 일들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 선배 중에 실종되어서 아직까지 생사가 불투명한 분이 있지. 그 형이 실종되기 며칠전, 내 책상에 넣어두고 간거야. 내가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내가 내 스스로 발로 뛰어 다니며, 찾아낸 수박 겉껍질이구…..’



‘수박이면 수박이쥐, 겉껍질은 또 뭐래?’



‘수박 겉핥기란 말 모르냐? 실체를 눈 앞에 두고는 있지만, 칼이 없어서 자르지는 못하고, 멀뚱허니 껍질만 핥고 있다는 비유……이해가 가냐?’



‘근데?’



‘너도 잘 알잖냐? 내가 수학에 도무지 약한 거. 넌 고시 패스 하면서, 세무 회계법도 공부 했잖어? 그래서 말인데, 일단 대강 쭈욱 훑어보고, 무슨 느낌이 안들었냐 이 말이쥐. 자금추적 자료야 원래, 빡스로 몇개씩은 되는 게 정상이지만, 그 형이 남긴 그 서류는 그 중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만을 발췌해서 묶어 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거든…..’



‘잠깐, 다시 한번 볼까?’



진 검사의 양미간이 주름으로 가득차기 시작한다.



‘근데, 어떻게 이 많은 돈들이 이 부근에서 모두 인출되고 있지? 그리고, 수표의 지급이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이 시점부터 뚝 끊어진 이유는 뭐래? 망했나? 그리구, 이렇게나 오래도록 오간 흔적이 왜 이 시점부터 자취를 감추었느냐 이거지…..아니, 이 때가 대체 언제야?’



‘그건 바로 금융실명제 실시 일주일 전…….이제 이해가 가냐? 난 숫자나, 그 자금의 흐름이 어디로 흘러 들어와 어디로 나가느냐 하는 건 잘 몰라. 하지만, 그게 일어난 시기로 보아, 그 당시, 정부는 국민들을 한방에 우롱하고 있었다는 야그고, 그 소식은 보안이 철저해서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고는 하지만, 이 예금주 한 사람에게만 특별히 소식이 전달 되었다는 게 이상하질 않느냐 이거지. 만일 이게 어떤 언질에 의해서 움직인 흔적이라면, 그 오랜 거래 행적으로 보아, 정부가 저렇듯 많은 돈을 엥길 수 밖에 없는 대대한 인물, 혹은 조직일 수 있다는 게 내 소신이쥐.’



‘정부가 구지 관련되었다고 니가 주장하는 이유는?’



‘수표의 발행자가 누군지 잘 봐라.’



‘그냥 일련번혼데? 이런 회사도 있냐? 아님, 그냥 구좌번호를 수표 발행자로? 글쎄 이건 쫌그렇네. 있을수도 있겠지만…...’



‘글쎄, 그럴까?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 일련번호의 끝자리 세개가 의미하는 게 있다고 해서 알아봤지.’



‘그게 뭔데?’



‘정부 부처간 오가는 공문에 나오는 부처간 서류구분 번호야. 이제 알겠어? 그러니, 그 수표는 그 예금주와 관련을 맺었던 정부의 해당 부서의 명의로 발행된 수표라구. 만일 무슨 일이 발생되더라도 그 내용을 파악하질 못하고 있는 수사관 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의 나열이라고 주장할 꺼고, 그렇게 민간의 은행예금으로 위장한 구좌를 통해, 은밀한 자금이 그 예금주에게 날라가고 있었단 얘기야. 다르게 얘기 하자면, 정부는 그런 비밀 구좌를 셀 수 없이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일반인 중에 어떤 또라이가 구좌명을 번호로 개설하고, 돈을 날린다고 믿어도 될만한 시기를 충분히 누렸다가니, 더 이상의 그런 체제의 유지가 불가능 함으로 인해, 돈을 급작스럽게 인출하고, 빼돌리고, 조작을 일삼았다는 시나리오야. 그것도 금융실명제 일주일 전에, 그 사람만 유일하게……’



‘음..흥미로운데?’



‘흥미 정도가 아니지. 한번 가정해 봐. 이 자료가 모두 사실이고, 실종된 그 형이 그 일련의 사건들과 자금의 흐름이 어떤 연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말이야. 죽음 이상의 경고가 가해지지 않았을까?’



‘나라도 입을 막아야지 라고 생각 했을껄?’



‘왜 입을 막아야 한다고 넌 생각하지?’



‘그 피해가 자기에게, 혹은 관련된 사람들에게 돌려질까봐….. 아마도 그 부류들 끼리는 어떤 묵계적 암시가 항상 있어왔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일은?’



‘그래, 맞아. 불법적인 일들 이었겠지, 밖으로 내놓고 할 수 없는 그런…..’



‘내가 듣고 싶은 말이 그거야. 이렇게 얘기를 해 줘야 이해가 가니, 나 원참….지금 니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들고 있는 이 마지막 서류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확신이 나에게 있다구.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남들이 봐도 별로 눈에 띄는 건 아니지. 그러나, 이제까지 니 손에 들려 있는 서류와 자료들을 종합하면서, 이 자료를 그 연장 선상에 두고 본다면, 너도 이해가 가게 될꺼야. 이건 한두 녀석이 푼돈이나 벌자고 달겨드는 복마전 판이 아니라는 거지.’



‘그럼 결국은 돈지랄에, 돈쌈?’



‘왜 위에서 널 첨부터 지목해서 수사를 맡겼는지, 이제 이해가 가니? 불법자금 추적 전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독종 검사를, 어째서 하찮은 치정관련 살인 사건의 수장으로 명을 때린 것인지…..누구보다도 그들은 자신의 목을 가장 빠르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조를 것으로 보이는 적격의 위험인물로 너를 꼽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너 보고 낚시나 하라고 한 거지. 목숨보전을 위하여라는 치사한 목적은 차제 하고라도, 결단의 순간에 정확히 발검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을 세고 있으라고 말이야. 그들은 이미 자네라면, 이 사건을 파고 들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주변으로 수사의 시각을 좁혀올 것이 뻔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아. 다른 검사 였어도 마찬가지 였겠지, 종국에 가서 자금의 흐름에 대한 부분이 드러나면, 자네도 수사에 한 몫을 했을 것이고, 결국 목을 조이는 사람은 자네가 될테니 말이야. 그래서 머리를 짜낸 것이, 바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이지. 아예 첨부터 자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대상에 넣고서, 밀고 땡겨 보자는 그들의 교묘한 잔대가리…..흠’



진검사는 등골이 서늘한 감도 들었지만, 그 반면에 승부욕이 불타고도 있었다.



‘진검사, 빙글대며 웃는 걸 보니, 해볼만한 쌈이라는 얼굴이네, 내 말이 맞쥐?’



‘알기는 잘도 알아여. 어디가서 자리나 펴고 앉으면, 내가 손님들은 기깔나게 몰아다 줄턴데, 왜 저 지랄 떨고 사는지 원…..’



‘내가 얘기 안해서 그렇지, 내가 바로…..에이, 얘기 허면 뭐허냐?’



‘얘기 해봐. 뭔 소리를 들으려고 그렇게 뒷말을 자르삼?’



‘니 전생에서 너에게 아주 큰 빚을 진 인물이야. 아주 비겁한…… 인물이었지. 그나마 망나니 주제비에 불과 하지만, 나랏님의 잘못된 폭정에 그렇게라도 맞설 수 있음을 속으로만 감탄하던….. 못된 인간….난 시키면 시키는대로 자네를 고문허고, 곤을 후둘르고, 몸을 지져대던 패두(牌頭) 였다네.’



‘패두가 뭔데?’



‘그건 자네가 글도 모르는 망나니 였음에도, 역모에 연루 되었다고 몰아 부치던 간신배들의 희생양이 되고 있음을 뻔히 알지만,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목숨 부지에 급급한 나머지, 자네를 기어이 고문했던 형조(刑曺)의 사령(使令)중에서도 최고 악질이었다면 알아 듣겠나? 이렇게 자네에게 빚 갚음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하늘의 뜻이 아닐런지…..’



‘그런 고리타분한 얘기는 그만 허고, 어디 가서 밥이나 먹자구.’



‘밥을 먹긴?, 니네 집에나 가자. 성자씨가 널 위해서 밥을 차려 줄 텐데, 이렇게 밖에서 맛대가리에다, 영양가도 좇도 없는 짠빱이나 먹어야 되겠냐? 어서 가자….’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밥이나 차려 줄라나?’



‘그럼, 굶길까 봐서?’



진검사와 윤택은 서류뭉치를 고이 품에 안고, 집으로 향했다.



‘띵동….’



‘띵동….’



‘띵동…. 어? 아무도 없나?’



‘딸깍……어? 기자 오빠두…..어머 내 정신 쫌 봐.’



성자는 한 입가득 밥을 물고, 우물거리는 채로 문을 열고 있엇다. 아마도 늦은 저녁을 먹는 중이었던 모양 이었다. 진검사는 집 안에 들어서면서 감도는 냄새에 행복하기만 했다.



‘그래, 이런 냄새야.’



언제나 고리타분한 노총각 홀아비 냄새에다, 여기저기 널려진 빨래 더미와, 수북히 쌓여 있는 설겆이 감, 치우지 않고 산처럼 되어 있는 재떨이와 꿰진 창자처럼 넘치는 휴지통 하며…..꼴꼴한 분위기 일색 이었건만, 하룻 사이에 집안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와, 집안 봐라 말이야. 이래서 여자의 손길은 필요하단 말쌈. 밥 쫌 다오.’



‘야! 너 이 시키, 언제부터 봤다고, 성자 보러 다오체? 너 디진다? 입조심 안 허면?’



‘하이고 감싸 돌기는…근데 성자씬 도대체 뭘 먹고 있었데?’



진검사는 기가 막혔다. 식탁에는 진검사를 위해서 곱게 상이 차려져 있었지만, 성자는 식탁도 아닌, 바닥에 앉아, 쉬어빠져 더이상 삼킬 수도 없을 것 같던 김치랑, 누룽지가 다 되어 가는 밥통안의 그 찬밥에 물을 말아, 달랑 그 한가지로 밥을 먹고, 아니, 쓰레기로도 치우기 어려운 그 밥을, 입안에 때려넣고 있었다. 진검사는 그 그릇을 들고, 냅다 씽크에다 처박아 버렸다.



‘새밥 해먹지, 왜 이렇게 궁상 떨고 앉았니, 응? 쉬었으면 말고, 못 먹겠으면 버리지, 왜 그렇게 살어, 응?’



그녀가 입안 가득 들은 밥술을 넘기지도 못하고, 서서 벌벌 떨며, 울고 있었다.



그녀가 너무나 겁을 먹고 있는 모양으로 인해, 진검사는 윤택이 곁에 있다는 생각도 못한 채, 그녀를 껴 안아 버렸다.



‘나랑 살면서, 하인처럼 살지마라. 이 집의 주인처럼 살아도 모자랄 판에…나 더 이상 슬프게 하지 말고, 멋있게 살게 해주께. 누구보담 행복하게…..’



‘꺼…억…꺼억…..엉엉……’



그녀의 감격은 또 시작됐다. 입안 가득 들어 있던 밥알과 김치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면서 그녀는 왁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됐다고 등을 토닥여도 그녀의 딸꾹질은 계속되고….



‘음식 버리면….오빠한테 혼 날까 봐…..그래서..그래서….’



‘어허……이제 유부남 앞에서 애정질들은 그만 허시고, 곱창이나 채워 주시징? 바닥에 흘린 저 밥풀이랑, 김치 쪼박지 치울래도 한 수세월 걸리겠구만….’



‘네…..’



그녀가 진검사를 밀어내고, 욕실에서 얼른 걸레를 갖고 나오는데, 진검사는 왜 수건을 갖고 나오느냐고 반문했다.



‘아니에여. 오늘 낮에 다 삶았어여. 너무 더러워서….’



‘캬. 내 뭐라디? 일등 아니냐? 일등! 내가 사람 하나는 기깔 나게 잘 본 다니깐……성자씨, 나 이쑤시게 쫌 있스믄 줘 봐여. 낮에 먹은 곱창이 이빨에 껴서 도대처 안 빠지네…..’



‘여기여…..’



‘통째 쫌 줘봐여. 하이구 부창부수라구, 이쑤시게 아껴서 삘띵 짓겄네, 하나만 달랑이 뭐야? 통째 줘 봐여, 얼릉….’



그때 였다.



‘띵동…띵동…..띵동’



‘누구지? 이 시간에?’



‘가만 있어라, 두 사람 이야 애정질에 바쁘실테니, 이 몸이 나가야 쥐. 나도 빨랑 배 채우고, 마누라 궁딩이 뚜드리러 가야 되는뎅, 헐…누구셔?’



윤택이 비디오 폰의 액정 화면 앞에 섰다.



‘여기, 천성자씨 계시져?’



‘네…… 그런데여? 누구세여?’



‘동회에서 뭘 쫌 알아볼 게 있어서여….문 쫌 열어 주십시오.’



‘진검사, 동회에서 왔다는데?.......자, 자, 자, 잠깐만….성자는 오늘 새벽에 왔는데, 동회 직원이 알 리가 없잖아?’



그와 동시에 윤택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진검사와 성자에게 구석으로 피해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나서,



‘수고 하시네여, 어여 들어오세여. 문 열어 드릴께여.’



하면서, 도어 개폐 버튼을 눌렀다.



‘딸깍!’



‘와당탕!’



문소리와 동시에, 현관문이 와당탕 열리면서, 여남은 명의 남자들이 현관 앞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그 앞에서 사람들을 맞이 해야할 윤택은 그 자리에 이미 없었다. 윤택의 몸은 이미 공중에 매달린 것처럼 허공에 붕 떠 있었고, 이빨을 쑤신다던 이쑤시게가 어느새 양손에 들려져,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녀석들의 안구과 목동맥에 비수처럼 비오듯, 정확히 꽂혀가고 있었다.



‘파파팟!.....파파팟팟!’



그 뿐이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리며, 앞으로 허우적대는 녀석들의 급소 부위를, 바닥에 사뿐히 내려 서기도 전에 어느새 말아 쥔 정권과 무릎으로 동시에 가격하는 그 사이, 뒤에서 밀치고 들어 오려던 다른 무리들이, 앞에서 풀썩대며 쓰러진 서너명을 남겨두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도망가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진검사도 갑자기 벌어진 일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다만, 이미 기절한 녀석 이외에, 신음을 흘리고 있는 녀석의 목을 발로 누르며,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신고를 하는 윤택의 모습을 지켜 볼 뿐이었다.



‘너..너…어떻게?…..’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면, 믿겠니?....아, 저 수고 하십니다. 여기 000오피스 텔 000혼데여, 불법 침입자가 있어서 신고 드립니다. 아!…저…제압은 된 상태구여…여기 대한민국 검사님이 사시는 집입니다, 집! 아시겄어여? 치안이 이래서야 원…..네…네….빨랑 쫌 오시져? 저여? 친군데여?.....네…네….’



갈수록 진검사는 윤택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보이고 있었다.



-계속-





P.S.: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진검사측과 슈샤인보이즈의 접전, 그 사이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의문의 세력……결코 빠질 수 없는 등장인물 간의 진한 사랑과 어우러짐, 앞으로도 수없이 등장할 새로운 인물과 얘기들로 가득찬 바람소리, 다음 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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