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 - 3부
관리자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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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3 22:08
-바람소리-
제 3 부 : 보석함의 노래
희진과 민기는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마주 보기만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라도, 지나간 시간과 그 사이에 있었던 묵은 때를 걷어내지 못할 바에는, 그렇게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고……그 사이, 식탁 위에 놓여 있던 희진의 핸폰은 계속해서 난장을 떨고 있었지만, 희진은 받을 기미가 없었다.
‘전화 왔는데…..’
‘놔 둬. 안 그래도 나가야 돼. 오늘 냉동차가 오기로 되어서 안 나갈 수도 없어.’
‘냉동차 라니?’
‘오늘 스튜디오 촬영이, 그 놈의 아이스께끼진 뭔진데, 항상 제일로 골 잡는 케이스야.’
‘아이스크림도 먹고, 좋잖아?’
‘좋기는? 그 놈의 아이스크림이 조명발에 닿기만 하면, 금새 니기미 좇물 처럼 누그러드는데, 사람 성질 테스트 하는 것도 아니고설랑, 돈만 아니면…..’
‘나 그냥…… 있어도 되지?’
‘누가 뭐라나?.....잠깐만, 내가 전화 한 통 할 때까지 꼼짝말고 그대로 있어.’
‘왜?’
‘왜기는?’
희진은 예약버튼을 눌러 어디론가 전화를 날렸다.
‘응, 누난데?.....지금 바쁘냐?.....응…..그게 아니고…니기미 씨부럴 쇄끼! 아가리만 뗐다하면 그 놈의 빠구리 얘기!......뭣 쫌 부탁 하려구….응…..응….맨 입으론 안헌다. 씨벌 넘아, 누나가 보지는 모냥으로 달고 다닌다니? 한 큐 종합선물로 날릴 꺼니깐…..응…응….’
부탁이라는 말에 민기는 일순 긴장했다. 가뜩이나 쫓기는 판국에 자기를 앞에 두고, 누구에게 무얼 부탁한다는 말만 들어도 오금이 재려드는 판국 이었기 때문이었다. 희진은 통화 도중에 무언가를 메모지에 계속 적어 나갔다. 워낙 휘갈겨 쓰는 통에, 앞에 앉은 민기 조차도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알았다. 이따 저녁에 데불고들 와 봐……그래…오늘 한코 준다, 이 꼴통 쇄끼야! 속고만 살았나? 이 누님이 보지 돌릴 때, 구라치는 거 봤냐? 알았어……8시에….그래!’
전화를 끊고나서, 희진은 자신이 적은 메모 쪽지를 살펴 본다.
‘아휴, 쒸발, 내가 써 놓고도 내가 못 알아 보네, 좇 겉은 필체 하고는……’
‘뭔데?’
‘너, 삐삐랑, 핸폰 갖고 있지? 그리고 지갑도 내 놔.’
‘그건 왜?’
‘너 그렇게 질문하고 싶어서 내 보지 쑤실 때 얼마나 아가리가 근질 거렸니?’
그녀는 곧잘 우울해 지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후루룩 떨치고 일어나, 새로운 상황에 자신을 던져넣기를 좋아했다. 민기는 주머니에서 핸폰과 삐삐, 지갑을 꺼내면서도 모든 것이 자신을 돕기 위한 일이라는 짐작을 했다.
‘방금 전화 한 애가 쫌 재주가 있거덩…..특장차 타고 마누라 몰래, 남편 몰래 씹빠빠 하고 돌아 댕기는 년놈들, 도청에다, 차적조회, 카드며, 민증 조회까지 짭새가 알면 요 씨방새 하면서 달겨들 아그거덩? 갸 한테 자문 쫌 때렸지 뭐. 궁하면 통한다고, 굶은 보지 돌린 값, 이렇게 허는 갑다.’
‘이건 꺼내서 뭐 하게?’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절대로 전화는 켜 놓아서도 안되고, 갸가 들고 오는 컴터에 연결하기 전까지는 어디고 전화 때려서는 안 된대, 그리고, 또 뭐라더라? 우리 집 전화로도 헛보,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 날렸다간 경칠 쭐 알라고 했고……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지갑의 신용카드, 직불카드, 민증, 운전면허증….모두 싸그리 쓰레기 됐다고 여기래.’
‘아니 멀쩡한 카드랑, 민증은?’
‘여보세여. 손에 칼들고 피나 볼 쭐 알았지? 세상 돌아가는 거 꿰고 계세여? 의사가 말이 의사지, 그 짓 빼놓고, 빨가 벗겨서 광화문 네거리에 내다 놓으면, 암 껏두 할 쭐 아는 게 없사와요, 아시겄어여? 허연 까운 입고 있을 때나 폼 잡기지, 나 원참….’
그건 그렇다고 민기도 동의 할 수 밖에 없었다. 남들도 자신이 의사라는 직함 이기에 매달리고, 기대는 지경이지, 만일 구로공단에 공돌씨 처럼 차려 입히고, 양손에 오함마나 들려 놨으면, 영락 없는 공사판 인부가 따로 없다고 평소에 생각해 오던 것 때문 이었다.
‘어차피, 단순도주의 상태이기 때문에 출국정지까지야 되진 않았을 것이고, 그러니 국외로 빠져 나가는 것도 가능 하겠지만, 여권까지 챙겨 나오지는 않았을 테고, 설사 여권이 있다고 해도, 걸려 뒤지기는 매한가지라고 허대. 돈이 얼마나 은행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개털로 일관하셈.’
‘그럼 꼼짝을 못 하는데…’
‘그래서 내가 아그들 데불고 오라고 했잖아?’
‘그건 또 왜?’
‘조, 조, 조둥아리 나불대는 거 봐라. 나 아직 완전히 믿고 있는 거 아니거덩여? 누가 알어? 마누라 눈치까고, 좇되기 전에 실수로 죽였는지, 알 게 뭐래? 잠이나 쳐자! 나 나갔다 올 동안…..부엌 찬장 뒤져 보면 라면 있을 거야. 밥 차려 먹으란 말은 못허네. 내가 안 쳐먹는데, 밥이 있을리가 없쥐. 조심하란 짓거리는 아예 허덜 않는 게 좋아…..’
민기는 허탈했다. 윤서의 행방마저 묘연한 와중에, 자신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진다는 것은 두손 두발을 다 결박당하는 것 보다 더 낙심천만한 일이었다.
‘잘 다녀와.’
‘안 그래도 잘 다녀 올꺼네. 내가 오기 전까지, 절대 아무도 문 열어 주지마. 올 사람도 없을 거고…..’
평소처럼 희진은 그 찢어진 청바지 차림에 항상 무거워 보이는 그 커다란 장비를 걸머지고 집을 나갔다. 갑자기 집 안이 비어 버린 것 같은 공허함에 민기는 잠도 제대로 오진 않았다. 오랜만에 와 본 그녀의 집……예전에는 자신의 집처럼 모든 것들이 손에 익숙했고, 냉장고 조차,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과 음료수로 가득 차 있었는데…..냉장고를 열어보니, 물과 먹다 남은 피자와 음료수 펫트병, 닭다리 몇개, 말라 비틀어진 사과 몇알이 고작 이었다. 찬장을 여는 도중에, 문을 열자마자,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지는 라면봉지들….라면만 먹고 사는 것 같은 그녀의 주변…..아마도 민기와의 추억이 가득한 집 안의 구석구석을 바라볼 때마다 치미는 울화를 달래기도 버거운 통에 무얼 해먹는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민기의 집안 구경은 계속 되었다. 이젠 남의 집처럼 느껴지기도 했건만, 집안은 예전의 그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고집이 느껴졌다. 잠자는 침대 옆의 작은 탁자에도, 민기의 옆모습을 찍은 흑백 사진은 어김 없이 단아한 사진틀에 끼워져 있었고, 찢어 내버릴 것처럼, 불태워 버릴 것처럼 벼르던 그의 잠옷도 빨지 않은 채로 자신의 목욕 가운 안에 같이 걸려 있었다. 민기가 곁에 없었어도 그 살내음을 지우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민기는 가만히 침대 옆의 탁자를 열었다. 항상 그 안에는 콘돔이 들어가 있었고, 버릇처럼 언제나 콘돔의 갯수를 큰 소리로 세던 그때의 즐거운 기억들…….그 안에는 아직도 자신이 즐겨 쓰던 브랜드의 콘돔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예전에 보지 못하던 작은 보석함 같은 것이 들어가 있었다.
‘이건 뭐지?’
민기는 침대에 걸터 앉아, 그 작은 보석함을 두 손에 들고 살며시 열어 보았다. 오르골의 맑은 음률과 함께 뚜껑이 열리면서, 민기는 한 동안 기가 막히는 것 같아, 숨을 쉬기 어려웠다.
‘이건?......’
그건 이미 정액마저 꾸덕꾸덕 말라 붙어 누렇게 색깔마저 변한, 쓰다 남은 콘돔 이었다. 분명코 그것은 요즈음 벗어버린 콘돔이 아니었다. 민기는 무슨 오물 덩어리를 쥐는 것처럼, 손끝으로 그 콘돔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자기가 사용하고, 아무 생각없이 휴지통에 버려 버린 콘돔이 분명했다. 민기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희진의 처지로 인해서, 휴지통에 버렸던, 정액이 묻어 찌질대는 콘돔 마저도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냥, 보석함에 간직해 온 그녀의 연약함…..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언제나 터프한 척, 쿨한 척, 온 몸에 껍질을 두르는 그녀의 서글픔…민기는 그 보석함을 다시 서랍에 넣으면서도, 가슴이 무척이나 아파왔다. 그건 스토킹도, 집착도, 정신질환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저 사랑했던 사람의 채취를 조금씩이나마, 굳어가는 정액이 담긴 콘돔이라 할지라도, 아껴가며 맡고 싶은 그런 애틋함 이라고나 해야 할까? 민기는 그제서야, 평소에 잘 입지 않던 목욕가운을 어째서 입고 있는가 이해할 수 있었다. 일을 나간 사이, 민기의 잠옷과 함께 걸려 있는 그 가운을 집에 돌아와 입을 때 즈음에는, 그 잠옷으로부터 냄새가 흠뻑 베어들어, 흡사 민기가 곁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조금이라도 맛보려는 그녀의 작은 소망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 이었다. 거실로 나오는 발걸음이 차츰 무거워지고 있었다. 착한 그녀를 그렇게 짓밟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었다고 머리를 때리고 후회해 봐도, 시간은 이미 흘러 있었고, 그 어느 것도 바뀌어 질 수는 없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건 느낌이 다른 수채화 였고, 기본 그로키가 탄탄한 아내와의 유화는 물로 지울수도, 손으로 문질러 지우기에도 이미 굳어감이 깊이있게 진행된, 각별한 의미였다. 민기는 그 당시, 욕심을 모두 채울 수는 없다는 단순한 논리에서 그녀와의 작별을 결심했었다. 윤서를 사랑하질 않았다면, 오히려 얘기는 쉬웠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기의 삶에는 윤서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었고, 희진의 존재는 그저 눈에 띄는 정류장에서 잠시 내렸을 뿐이라는 유희적 가정이 앞서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과 헤어진 이후에도 자신에게 절대 아무런 표시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끝끝내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존재가 예전과 다르게 다가오는 것을 민기도 어쩔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민기 자신은 윤서를 찾아야만 했다.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하고, 자신에게 뒤집어 씌워져 있는 살인누명 마저도 벗어야 하는 이중과제가 어깨에 무겁게 눌려 있음으로 해서 이렇게 한가로운 추억타령이나 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민기는 거실로 나가 TV를 켰다. 때 마침, 방송에는 한 낮이기는 했어도 유선방송의 뉴스채널로 고정되어 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화면이 밝아 지면서 보여지는 것은 바로, 어질러질대로 어질러진,앞집의 거실 모습 이었다. 경찰이 부산하게 들락이며, 곳곳에서 지문을 채취하는 모습과 사진을 찍어대는 모습들….
‘….검찰은 달아난 목격자, 35세 강민기씨를 원한에 의한 치정 살인 용의자로 보고, 전국 경찰에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내연의 관계를 이미 짐작하고, 배우자의 살해 행각에 동참한 것으로 보이는, 아내 33세 민윤서씨도 같은 혐의로 전국에 수배령을 내리는 동시에, 국외출국 정지령도 함께 발효키로 하였습니다. 현재 도주하여 잠적한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고등교육을 이수한 엘리트로서, 고도의 지능적 범죄 수법으로 피해자를 살해한 것으로 판단되며…….’
민기는 기가 턱 하고 막혀 왔다. 아니, 본인이 없다고 이 지경으로 스토리를 엮어 나가다니…욱 하는 심정에 바로 검찰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자기를 보호해준 희진이가 범인 은닉 혐의로 엉뚱한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고, 어떻게든 윤서와 손이 닿아서, 이제까지 발생한 사소한 오해를 푸는 것이 급선무 일 것 같았다. 민기는 이런 상황에서 무력하기만한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나마 희진이를 믿고 버티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TV를 소파에 누워서 보다가 민기는 그만 잠에 곯아 떨어지고야 말았다.
‘띵동,띵동,띵동,띵동……’
민기는 잠결에 그 초인종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오고 있었고, 누군가 대신 열어주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이미 어두워져, 컴컴해진 거실에는 아무도 그것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었고, TV만이 뎅그렇게 켜져 있었을 뿐이었다.
‘누…누….누구세여?’
자신의 목소리 밖에는 외부로 들리지 않는대도 불구하고, 민기는 잔뜩 움츠러 들어,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나야! 어서 문 열어. 디진 줄 알았네….20분이 뭐야?’
그건 희진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긴장이 풀리면서 열어준 현관문을 획 잡아채는 그녀……보나마나 자신을 노려보면서, 들어서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뭘 좀 먹었니?’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음성을 낮추었다.
‘응…..아니….’
‘꼭 누가 차려 줘야, 아가리 농사 지을 쭐 알쥐…..으이그 웬수!’
그녀의 양 손에는 한 보따리 가득 찬거리가 들려 있었다.
‘라면만 처먹을 수야 없잖수? 내가 이 나이에 웬 쌩고생?’
‘미안…..’
‘여기 신문 쫌 봐봐….. 시내가 난리도 아니다. 너 완전, 유명인사 됐드라?’
희진이가 식탁에 찬거리를 올려 놓으면서 민기에게 내민 신문에는 자신의 얘기가 무슨 딴 나라 동화처럼 주저리 주저리, 길게도 적혀 있었다.
‘근데, 쫌 이상한 건, 그냥, 사회면에 쬐그맣게 자리나 차지할 줄 알았던 야그가 어떻게 그렇게 대서 특필이 되가고 있느냐 이거지. 아무래도 냄새가 쫌 나긴 해.’
밖에서 지치기도 했을 희진이 였건만, 그녀는 씻지도 않고 팔을 걷어 부친 채로, 오자마자, 부엌에서 밥을 하네, 반찬 거리를 만드네, 찌게를 끓이네 하면서 부산을 떨었다. 신문을 들고는 있었지만, 민기는 그 내용을 건성건성 훑고 있었고, 그것 보다도, 자신을 위해서 저렇게 열심을 내고 있는 그녀의 분주함이 고마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콧바람을 내가며, 오랜만에 식구를 맞이하는 모습으로 저녁상을 한 시간 가까이 차려냈다.
‘어여 먹지? 아그들 올때 다 됐는데?’
‘오면 같이 안 먹고?’
‘내가 쫌 늦게 오라고 했쓰…어른들 식사 허시는데, 아그들 와서리, 턱쭈가리 받치고, 개지랄들 떨지 말라고 했거덩.’
‘그래?’
그녀는 언제나 식사 시간에는 불을 끄고 초를 켰다. 오늘도 어김없이 초를 켜고, 어른 거리는 일렁임 앞에서 밥상을 마주한 두 사람…왠지 감개 무량하다는 느낌은 서로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조기라고 사 왔는데, 이거 썅 노무 쇄끼들이 좇나게 쐬겨 파는 거 같어. 아니, 그 손바닥 만한 바다에서 뭔 그리 조기는 철마다, 때마다 하우스 농사처럼 빌빌 넘쳐난대? 원 믿을 수가 있시야쥐.’
그냥 살을 발라 주기 계면쩍은지, 그녀가 또 한소리 걸지게 토해낸다. 그러나, 이제 민기는 그게 그녀의 진심이 아님을 안다. 말을 안 했지만…..
‘너도 먹지….’
‘하이고 고양이 쥐 생각 허시네……어여 자시게나….앞 길이 멀다니깐?’
그녀의 말 속에는 뼈가 있었다. 그랬다. 그녀의 지적처럼 민기는 앞 길이 그리 순탄치 만은 않다고 생각하고는 있었고…..
‘뭘 쫌 먹고 들이키지….’
희진은 고픈 배를 채울 생각도 하질 않고, 바로 소주병을 따서 벌컥대며 마셔갔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그녀는 그저 그렇게 오랜만에 마주한 채로 밥을 먹고 있는 민기의 그늘진 얼굴이라도 뚫어지게 바라다 보기만 하고 있었는데,
‘내 얼굴에 뭐 묻었니?’
민기가 물었다. 그제서야 아니라며, 고개를 돌리는 그녀….그녀 스스로도 이런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전혀 예상하지는 못했던 가 보다.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민기도, 식욕이 날리는 만무했다. 억지로 살을 발라 생선살을 수저에 얹어 건네주니, 그녀가 벌컥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휴, 쒸발, 아까 파 썰고 손을 안 씻었나? 졸나리 맵네. 다 큰 년 한테까지 떠 멕이고 지랄이야, 지랄은…..’
그녀는 휭하니, 방으로 돌쳐 들어갔다. 이어서 방안에 딸린 욕실로부터 흘러 나오는 수도물 트는 소리. 그건 세면대가 아니라, 욕조의 샤워기에서 나오는 쏴하는 소음 이었다. 민기는 밥을 먹다 말고,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부의 욕실은 방을 향해 열려 있었다. 세면대와 좌변기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서 울고 있는 그녀, 샤워기의 물소리가 그녀의 울컥대는 울음 소리를 막고는 있었지만, 그 흐르는 눈물 만큼이나 세차게 뿜어대지는 못하고 있었다.
‘문 닫고 가서 밥 쳐먹어. 쪽 팔리게…….여자 우는 거 첨 보니? 개쇄끼….남의 눈에 눈물 짜게 하고 지랄이야……’
민기는 조용히 욕실의 문을 닫고서 식탁으로 돌아왔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민기는 이미 식욕을 잃기는 했어도, 자기의 밥그릇에 남산 만큼이나 수북하게 퍼담은 그 밥을 꾸역꾸역 먹어치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식탁으로 돌아 온 그녀는 울컥대지도 않는지, 맹물 삼키듯이, 소주를 병나발을 불어댔다.
‘내가 있는 게 불편하니? 그런 거니?’
‘아니, 그게 아니고….내가 못나서 그렇지…..미친 년따우, 안될 거 뻔히 알면서……’
‘그래도 그렇지 빈 속에…..밥 정말 맛있다. 찌게도 그만이고…솜씨는 여전해….’
‘맛있게 먹어주니……., 정말이지……. 좋다.’
오랜만에 걸진 단어가 빠진 그녀의 반가운 일성. 퉁퉁 부어버린 눈자위 사이로 그녀의 웃음이 퍼지는 도중에 딸깍하고 현관이 열렸다. 빈 속에 술기운이 도는지, 그녀가 일어나려다 비틀하면서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자기가 나가겠다며, 민기가 발딱 일어났다.
‘야, 이 씨벌 넘들아! 누님 집 들어올 때는 문 따고 들어오지 말랬쥐? 니들이 무신 도둑괭이냐?’
집 안으로 들어서는 세 남자를 두고, 희진이가 소리쳤다.
‘누님, 우리들 왔수! 집안이 왜 이렇게 어두워? 누님 요새 생활 많이 어렵수? 불들은 왜 끄고 있대? 밥 먹다 말고 일 벌리남?’
‘저 쇄끼는 아가리만 뗐다하면, 저 놈의 씹떡질 소리….내가 미쳐…..어여 거기들 걸쳐.’
집안으로 들어선 세 남자는 자기 집처럼, 거실로 가서 소파에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애 였지만, 유달리 체격이 건장한 나머지는 자신과 거의 엇비슷한 연배로 보이고 있었지만, 체격으로 인해서 그렇게 보인다고 여겨졌다. 민기는 인사를 나누기에도, 그렇다고 마냥 서 있기에도 엉거주춤한 상황속에 있었다.
‘인사해…내가 아는 애들이야. 야! 이 누님, 술이 슬슬 도니끼니, 너그들 끼리 호구조사 해라…꺽 끄윽…’
서 있던 민기에게 앉아 있던 남자들 중에서 가장 어려 뵈는 젊은이가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아까 누님이 전화 때렸던 일슙니다. 제가 일슈고, 저기 앉아 있는 아그가 이슈, 제일 연세 있으신 분이 삼슙니다.’
‘이름이 좀….’
‘이름이요? 모두 손으로 한가락들 한다고 해서 손 수자를 붙여서 일수, 이수, 삼수 라고 했는데, 그냥 수라고 붙이니까, 다들 대학 시험치다 낙방한 인간들로 알더라구여. 그래서 발음을 쫌 옆으로 새게시리 슈라고 바꿨죠. 저는 손으로 못하는 게, 모르는 거 빼고는 없져. 컴터, 열쇠따기, 도청, 헥킹, 공문서 위조등등이 제 전문이구여, 이슈는 전공이 운짱, 삼슈형은 손날이 전공이져. 아마 총알보다 몸이 더 빨리 날아갈 걸여? 몸 전체가 칼날 이라고 봐야져. 그렇다고 칼을 차고 다니는 건 절때 아니고….낄낄……우리 셋을 가리켜, 슈샤인 보이즈라고 해여. 어디에고 적을 두진 않았지만, 프리랜서로 상종가 때리고는 있져. 돈 받고 이 짓 허기는 해도….헐…’
‘근데, 운전은 뭐하러?’
‘뭘 모르시네. 자동차 추격전이 서울 한복판 이라고 없을 거 같어여? 쟤 저래뵈도, 끌고 댕기는 자동차 마다 기깔나여. 앞으로 도움 꽤나 받으실 껄여? 누님…..우리 왔는데, 종합선물 세트 쫌 돌립시다?’
‘종합선물 이라니?’
‘모르셨어여?….그게…’
‘입닥쳐! 어여 방으로들 들어가!’
희진이의 고함에 세 남자는 쫓겨 들어가듯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비틀대며, 그 방으로 따라 들어가는 희진.
‘곧 끝나….어린 애들이라 얼마 길지도 못해…..’
‘뭐 하려고?’
‘그냥 TV나 보고 있어…..소리 크게 해 놓고…..’
민기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네들을 위해서, 그들만을 위한, 희진이 던진 종합선물 세트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민기의 뒤를 봐 주면서, 당장 닥친 일을 해결할 때까지, 돈을 치르는 대신, 어느 때고 이렇게 쳐들어 와서, 즐탕하고 가겠다는 그들의 제안을 그녀가 받아들인 것일 게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는 방아쇠를 당긴 총알의 격발음 보다도 강렬하게 민기의 가슴을 때렸다. 그 잔음은 계속해서 민기의 귓가를 웅웅대며, 흔들었고, 거실로 돌아와 TV를 켜기는 했지만, 도대체 무얼 방송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간간히 크게 올려 놓은 볼륨을 뚫고서 그녀의 욕지기와 남자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확연하게 보이는 그 어지럽고, 음란한 환영들…..그 때였다.
‘쾅!’
다시금 뜻하지 않게 열린,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안방문이 열리고, 그 짧은 사이에, 온 몸 곳곳이 빨아댄 자죽으로 벌겋게 변한 그녀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체인 채로 벌벌 기듯이,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민기에게 가까스로 내미는 그 서랍 안의 보석함.
‘민기씨…..그거 봤지?......봤지?......본거지?......난 알 수 있어…..자기가 그걸 본 이상,….. 내 분신 같은 그걸 옆에 두고…….. 그 짓을 할 수는 없어서……미친년 따우….악!’
‘뭐하우? 누님, 놀다말고? 일은 일이고, 선급금은 지불해야 될 꺼 아니겠수? 저 진저리치게사랑하는 유부남, 씹쇄끼 보호해 주려면 말이우? 낄낄낄…..’
또다시 벌거벗은 그녀를 향해 좇대가리를 있는대로 세운 채로, 뒤에서 달겨든 세 남자는 아귀다툼 하듯이, 발버둥치는 그녀를 나꿔 채서는, 방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다. 민기의 손에 남은 그 작은 보석함…..민기는 뚜껑을 열었다. 공중으로 피어 오르는 씁쓸한 냄새. 그 냄새도 잠깐, 오르골은 지대로의 역할을 위해 음조를 흘리기 시작하고…..철썩대는 소리가 마치 태풍의 끝자락 처럼, 온 집안을 흔들면서 민기의 가슴을 후려쳤다. 그녀의 신음은 강약도 없이, 벌어진 살껍질이 벗겨지는 듯, 날카로운 아픔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들은 민기에게 똑똑히 보여 주려는 듯이,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민기를 바라보며, 히죽대는 것도 모자라, 뱀처럼 길게 빼버린 혓바닥으로, 민기를 힐끔대며, 그녀의 피부를 온통 빨아자실 것처럼 쓸어대는 그 능욕…..이미 그녀의 온몸은 손바닥으로, 허리로 쳐대는 압박으로 인해, 감각을 잃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비명조차 자지러 지는 건, 아마도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으로 가고 있음 일테고….. 오르골에서 작은 음률이 실내로 퍼지면서, 열려진 방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그녀의 흐느낌과 남자들의 환호성, 씩씩대는 격한 호흡들이 뒤 엉키고 있었다. 그 불협화음 속에서 풀린 시선을 끝내, 밖으로 향하고, 시달림을 당하는 그녀의 모습을 민기는 그냥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비명도 지르지 못할만큼, 커다란 좇대를 입안에 담은 채로 마냥 울고 있었다. 그건 쾌락 때문도, 아픔 때문도 아니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긴 해도, 끝내 손 끝에서 놓치 못하는 연인을 위해, 몸을 내던져야 하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도 아니었다. 그건 민기를 향해, 다가가고 싶은, 알아주지 않아도 영원히 곁에서 숨 죽이듯이 머물고 싶은 그녀의 바램이었다. 그 날 밤, 민기는 그녀와 수천번도 더 살을 섞고 있었고, 그녀의 울고 있는 충혈된 눈동자 이긴 했어도, 그 안에서 민기는 자신이 담기워져, 녹아드는 모습에 보석함을 붙들고 내내 울 수밖에 없었다.
-계속-
제 3 부 : 보석함의 노래
희진과 민기는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마주 보기만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라도, 지나간 시간과 그 사이에 있었던 묵은 때를 걷어내지 못할 바에는, 그렇게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고……그 사이, 식탁 위에 놓여 있던 희진의 핸폰은 계속해서 난장을 떨고 있었지만, 희진은 받을 기미가 없었다.
‘전화 왔는데…..’
‘놔 둬. 안 그래도 나가야 돼. 오늘 냉동차가 오기로 되어서 안 나갈 수도 없어.’
‘냉동차 라니?’
‘오늘 스튜디오 촬영이, 그 놈의 아이스께끼진 뭔진데, 항상 제일로 골 잡는 케이스야.’
‘아이스크림도 먹고, 좋잖아?’
‘좋기는? 그 놈의 아이스크림이 조명발에 닿기만 하면, 금새 니기미 좇물 처럼 누그러드는데, 사람 성질 테스트 하는 것도 아니고설랑, 돈만 아니면…..’
‘나 그냥…… 있어도 되지?’
‘누가 뭐라나?.....잠깐만, 내가 전화 한 통 할 때까지 꼼짝말고 그대로 있어.’
‘왜?’
‘왜기는?’
희진은 예약버튼을 눌러 어디론가 전화를 날렸다.
‘응, 누난데?.....지금 바쁘냐?.....응…..그게 아니고…니기미 씨부럴 쇄끼! 아가리만 뗐다하면 그 놈의 빠구리 얘기!......뭣 쫌 부탁 하려구….응…..응….맨 입으론 안헌다. 씨벌 넘아, 누나가 보지는 모냥으로 달고 다닌다니? 한 큐 종합선물로 날릴 꺼니깐…..응…응….’
부탁이라는 말에 민기는 일순 긴장했다. 가뜩이나 쫓기는 판국에 자기를 앞에 두고, 누구에게 무얼 부탁한다는 말만 들어도 오금이 재려드는 판국 이었기 때문이었다. 희진은 통화 도중에 무언가를 메모지에 계속 적어 나갔다. 워낙 휘갈겨 쓰는 통에, 앞에 앉은 민기 조차도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알았다. 이따 저녁에 데불고들 와 봐……그래…오늘 한코 준다, 이 꼴통 쇄끼야! 속고만 살았나? 이 누님이 보지 돌릴 때, 구라치는 거 봤냐? 알았어……8시에….그래!’
전화를 끊고나서, 희진은 자신이 적은 메모 쪽지를 살펴 본다.
‘아휴, 쒸발, 내가 써 놓고도 내가 못 알아 보네, 좇 겉은 필체 하고는……’
‘뭔데?’
‘너, 삐삐랑, 핸폰 갖고 있지? 그리고 지갑도 내 놔.’
‘그건 왜?’
‘너 그렇게 질문하고 싶어서 내 보지 쑤실 때 얼마나 아가리가 근질 거렸니?’
그녀는 곧잘 우울해 지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후루룩 떨치고 일어나, 새로운 상황에 자신을 던져넣기를 좋아했다. 민기는 주머니에서 핸폰과 삐삐, 지갑을 꺼내면서도 모든 것이 자신을 돕기 위한 일이라는 짐작을 했다.
‘방금 전화 한 애가 쫌 재주가 있거덩…..특장차 타고 마누라 몰래, 남편 몰래 씹빠빠 하고 돌아 댕기는 년놈들, 도청에다, 차적조회, 카드며, 민증 조회까지 짭새가 알면 요 씨방새 하면서 달겨들 아그거덩? 갸 한테 자문 쫌 때렸지 뭐. 궁하면 통한다고, 굶은 보지 돌린 값, 이렇게 허는 갑다.’
‘이건 꺼내서 뭐 하게?’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절대로 전화는 켜 놓아서도 안되고, 갸가 들고 오는 컴터에 연결하기 전까지는 어디고 전화 때려서는 안 된대, 그리고, 또 뭐라더라? 우리 집 전화로도 헛보,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 날렸다간 경칠 쭐 알라고 했고……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지갑의 신용카드, 직불카드, 민증, 운전면허증….모두 싸그리 쓰레기 됐다고 여기래.’
‘아니 멀쩡한 카드랑, 민증은?’
‘여보세여. 손에 칼들고 피나 볼 쭐 알았지? 세상 돌아가는 거 꿰고 계세여? 의사가 말이 의사지, 그 짓 빼놓고, 빨가 벗겨서 광화문 네거리에 내다 놓으면, 암 껏두 할 쭐 아는 게 없사와요, 아시겄어여? 허연 까운 입고 있을 때나 폼 잡기지, 나 원참….’
그건 그렇다고 민기도 동의 할 수 밖에 없었다. 남들도 자신이 의사라는 직함 이기에 매달리고, 기대는 지경이지, 만일 구로공단에 공돌씨 처럼 차려 입히고, 양손에 오함마나 들려 놨으면, 영락 없는 공사판 인부가 따로 없다고 평소에 생각해 오던 것 때문 이었다.
‘어차피, 단순도주의 상태이기 때문에 출국정지까지야 되진 않았을 것이고, 그러니 국외로 빠져 나가는 것도 가능 하겠지만, 여권까지 챙겨 나오지는 않았을 테고, 설사 여권이 있다고 해도, 걸려 뒤지기는 매한가지라고 허대. 돈이 얼마나 은행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개털로 일관하셈.’
‘그럼 꼼짝을 못 하는데…’
‘그래서 내가 아그들 데불고 오라고 했잖아?’
‘그건 또 왜?’
‘조, 조, 조둥아리 나불대는 거 봐라. 나 아직 완전히 믿고 있는 거 아니거덩여? 누가 알어? 마누라 눈치까고, 좇되기 전에 실수로 죽였는지, 알 게 뭐래? 잠이나 쳐자! 나 나갔다 올 동안…..부엌 찬장 뒤져 보면 라면 있을 거야. 밥 차려 먹으란 말은 못허네. 내가 안 쳐먹는데, 밥이 있을리가 없쥐. 조심하란 짓거리는 아예 허덜 않는 게 좋아…..’
민기는 허탈했다. 윤서의 행방마저 묘연한 와중에, 자신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진다는 것은 두손 두발을 다 결박당하는 것 보다 더 낙심천만한 일이었다.
‘잘 다녀와.’
‘안 그래도 잘 다녀 올꺼네. 내가 오기 전까지, 절대 아무도 문 열어 주지마. 올 사람도 없을 거고…..’
평소처럼 희진은 그 찢어진 청바지 차림에 항상 무거워 보이는 그 커다란 장비를 걸머지고 집을 나갔다. 갑자기 집 안이 비어 버린 것 같은 공허함에 민기는 잠도 제대로 오진 않았다. 오랜만에 와 본 그녀의 집……예전에는 자신의 집처럼 모든 것들이 손에 익숙했고, 냉장고 조차,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과 음료수로 가득 차 있었는데…..냉장고를 열어보니, 물과 먹다 남은 피자와 음료수 펫트병, 닭다리 몇개, 말라 비틀어진 사과 몇알이 고작 이었다. 찬장을 여는 도중에, 문을 열자마자,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지는 라면봉지들….라면만 먹고 사는 것 같은 그녀의 주변…..아마도 민기와의 추억이 가득한 집 안의 구석구석을 바라볼 때마다 치미는 울화를 달래기도 버거운 통에 무얼 해먹는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민기의 집안 구경은 계속 되었다. 이젠 남의 집처럼 느껴지기도 했건만, 집안은 예전의 그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고집이 느껴졌다. 잠자는 침대 옆의 작은 탁자에도, 민기의 옆모습을 찍은 흑백 사진은 어김 없이 단아한 사진틀에 끼워져 있었고, 찢어 내버릴 것처럼, 불태워 버릴 것처럼 벼르던 그의 잠옷도 빨지 않은 채로 자신의 목욕 가운 안에 같이 걸려 있었다. 민기가 곁에 없었어도 그 살내음을 지우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민기는 가만히 침대 옆의 탁자를 열었다. 항상 그 안에는 콘돔이 들어가 있었고, 버릇처럼 언제나 콘돔의 갯수를 큰 소리로 세던 그때의 즐거운 기억들…….그 안에는 아직도 자신이 즐겨 쓰던 브랜드의 콘돔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예전에 보지 못하던 작은 보석함 같은 것이 들어가 있었다.
‘이건 뭐지?’
민기는 침대에 걸터 앉아, 그 작은 보석함을 두 손에 들고 살며시 열어 보았다. 오르골의 맑은 음률과 함께 뚜껑이 열리면서, 민기는 한 동안 기가 막히는 것 같아, 숨을 쉬기 어려웠다.
‘이건?......’
그건 이미 정액마저 꾸덕꾸덕 말라 붙어 누렇게 색깔마저 변한, 쓰다 남은 콘돔 이었다. 분명코 그것은 요즈음 벗어버린 콘돔이 아니었다. 민기는 무슨 오물 덩어리를 쥐는 것처럼, 손끝으로 그 콘돔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자기가 사용하고, 아무 생각없이 휴지통에 버려 버린 콘돔이 분명했다. 민기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희진의 처지로 인해서, 휴지통에 버렸던, 정액이 묻어 찌질대는 콘돔 마저도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냥, 보석함에 간직해 온 그녀의 연약함…..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언제나 터프한 척, 쿨한 척, 온 몸에 껍질을 두르는 그녀의 서글픔…민기는 그 보석함을 다시 서랍에 넣으면서도, 가슴이 무척이나 아파왔다. 그건 스토킹도, 집착도, 정신질환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저 사랑했던 사람의 채취를 조금씩이나마, 굳어가는 정액이 담긴 콘돔이라 할지라도, 아껴가며 맡고 싶은 그런 애틋함 이라고나 해야 할까? 민기는 그제서야, 평소에 잘 입지 않던 목욕가운을 어째서 입고 있는가 이해할 수 있었다. 일을 나간 사이, 민기의 잠옷과 함께 걸려 있는 그 가운을 집에 돌아와 입을 때 즈음에는, 그 잠옷으로부터 냄새가 흠뻑 베어들어, 흡사 민기가 곁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조금이라도 맛보려는 그녀의 작은 소망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 이었다. 거실로 나오는 발걸음이 차츰 무거워지고 있었다. 착한 그녀를 그렇게 짓밟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었다고 머리를 때리고 후회해 봐도, 시간은 이미 흘러 있었고, 그 어느 것도 바뀌어 질 수는 없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건 느낌이 다른 수채화 였고, 기본 그로키가 탄탄한 아내와의 유화는 물로 지울수도, 손으로 문질러 지우기에도 이미 굳어감이 깊이있게 진행된, 각별한 의미였다. 민기는 그 당시, 욕심을 모두 채울 수는 없다는 단순한 논리에서 그녀와의 작별을 결심했었다. 윤서를 사랑하질 않았다면, 오히려 얘기는 쉬웠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기의 삶에는 윤서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었고, 희진의 존재는 그저 눈에 띄는 정류장에서 잠시 내렸을 뿐이라는 유희적 가정이 앞서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과 헤어진 이후에도 자신에게 절대 아무런 표시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끝끝내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존재가 예전과 다르게 다가오는 것을 민기도 어쩔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민기 자신은 윤서를 찾아야만 했다.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하고, 자신에게 뒤집어 씌워져 있는 살인누명 마저도 벗어야 하는 이중과제가 어깨에 무겁게 눌려 있음으로 해서 이렇게 한가로운 추억타령이나 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민기는 거실로 나가 TV를 켰다. 때 마침, 방송에는 한 낮이기는 했어도 유선방송의 뉴스채널로 고정되어 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화면이 밝아 지면서 보여지는 것은 바로, 어질러질대로 어질러진,앞집의 거실 모습 이었다. 경찰이 부산하게 들락이며, 곳곳에서 지문을 채취하는 모습과 사진을 찍어대는 모습들….
‘….검찰은 달아난 목격자, 35세 강민기씨를 원한에 의한 치정 살인 용의자로 보고, 전국 경찰에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내연의 관계를 이미 짐작하고, 배우자의 살해 행각에 동참한 것으로 보이는, 아내 33세 민윤서씨도 같은 혐의로 전국에 수배령을 내리는 동시에, 국외출국 정지령도 함께 발효키로 하였습니다. 현재 도주하여 잠적한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고등교육을 이수한 엘리트로서, 고도의 지능적 범죄 수법으로 피해자를 살해한 것으로 판단되며…….’
민기는 기가 턱 하고 막혀 왔다. 아니, 본인이 없다고 이 지경으로 스토리를 엮어 나가다니…욱 하는 심정에 바로 검찰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자기를 보호해준 희진이가 범인 은닉 혐의로 엉뚱한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고, 어떻게든 윤서와 손이 닿아서, 이제까지 발생한 사소한 오해를 푸는 것이 급선무 일 것 같았다. 민기는 이런 상황에서 무력하기만한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나마 희진이를 믿고 버티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TV를 소파에 누워서 보다가 민기는 그만 잠에 곯아 떨어지고야 말았다.
‘띵동,띵동,띵동,띵동……’
민기는 잠결에 그 초인종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오고 있었고, 누군가 대신 열어주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이미 어두워져, 컴컴해진 거실에는 아무도 그것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었고, TV만이 뎅그렇게 켜져 있었을 뿐이었다.
‘누…누….누구세여?’
자신의 목소리 밖에는 외부로 들리지 않는대도 불구하고, 민기는 잔뜩 움츠러 들어,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나야! 어서 문 열어. 디진 줄 알았네….20분이 뭐야?’
그건 희진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긴장이 풀리면서 열어준 현관문을 획 잡아채는 그녀……보나마나 자신을 노려보면서, 들어서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뭘 좀 먹었니?’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음성을 낮추었다.
‘응…..아니….’
‘꼭 누가 차려 줘야, 아가리 농사 지을 쭐 알쥐…..으이그 웬수!’
그녀의 양 손에는 한 보따리 가득 찬거리가 들려 있었다.
‘라면만 처먹을 수야 없잖수? 내가 이 나이에 웬 쌩고생?’
‘미안…..’
‘여기 신문 쫌 봐봐….. 시내가 난리도 아니다. 너 완전, 유명인사 됐드라?’
희진이가 식탁에 찬거리를 올려 놓으면서 민기에게 내민 신문에는 자신의 얘기가 무슨 딴 나라 동화처럼 주저리 주저리, 길게도 적혀 있었다.
‘근데, 쫌 이상한 건, 그냥, 사회면에 쬐그맣게 자리나 차지할 줄 알았던 야그가 어떻게 그렇게 대서 특필이 되가고 있느냐 이거지. 아무래도 냄새가 쫌 나긴 해.’
밖에서 지치기도 했을 희진이 였건만, 그녀는 씻지도 않고 팔을 걷어 부친 채로, 오자마자, 부엌에서 밥을 하네, 반찬 거리를 만드네, 찌게를 끓이네 하면서 부산을 떨었다. 신문을 들고는 있었지만, 민기는 그 내용을 건성건성 훑고 있었고, 그것 보다도, 자신을 위해서 저렇게 열심을 내고 있는 그녀의 분주함이 고마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콧바람을 내가며, 오랜만에 식구를 맞이하는 모습으로 저녁상을 한 시간 가까이 차려냈다.
‘어여 먹지? 아그들 올때 다 됐는데?’
‘오면 같이 안 먹고?’
‘내가 쫌 늦게 오라고 했쓰…어른들 식사 허시는데, 아그들 와서리, 턱쭈가리 받치고, 개지랄들 떨지 말라고 했거덩.’
‘그래?’
그녀는 언제나 식사 시간에는 불을 끄고 초를 켰다. 오늘도 어김없이 초를 켜고, 어른 거리는 일렁임 앞에서 밥상을 마주한 두 사람…왠지 감개 무량하다는 느낌은 서로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조기라고 사 왔는데, 이거 썅 노무 쇄끼들이 좇나게 쐬겨 파는 거 같어. 아니, 그 손바닥 만한 바다에서 뭔 그리 조기는 철마다, 때마다 하우스 농사처럼 빌빌 넘쳐난대? 원 믿을 수가 있시야쥐.’
그냥 살을 발라 주기 계면쩍은지, 그녀가 또 한소리 걸지게 토해낸다. 그러나, 이제 민기는 그게 그녀의 진심이 아님을 안다. 말을 안 했지만…..
‘너도 먹지….’
‘하이고 고양이 쥐 생각 허시네……어여 자시게나….앞 길이 멀다니깐?’
그녀의 말 속에는 뼈가 있었다. 그랬다. 그녀의 지적처럼 민기는 앞 길이 그리 순탄치 만은 않다고 생각하고는 있었고…..
‘뭘 쫌 먹고 들이키지….’
희진은 고픈 배를 채울 생각도 하질 않고, 바로 소주병을 따서 벌컥대며 마셔갔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그녀는 그저 그렇게 오랜만에 마주한 채로 밥을 먹고 있는 민기의 그늘진 얼굴이라도 뚫어지게 바라다 보기만 하고 있었는데,
‘내 얼굴에 뭐 묻었니?’
민기가 물었다. 그제서야 아니라며, 고개를 돌리는 그녀….그녀 스스로도 이런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전혀 예상하지는 못했던 가 보다.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민기도, 식욕이 날리는 만무했다. 억지로 살을 발라 생선살을 수저에 얹어 건네주니, 그녀가 벌컥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휴, 쒸발, 아까 파 썰고 손을 안 씻었나? 졸나리 맵네. 다 큰 년 한테까지 떠 멕이고 지랄이야, 지랄은…..’
그녀는 휭하니, 방으로 돌쳐 들어갔다. 이어서 방안에 딸린 욕실로부터 흘러 나오는 수도물 트는 소리. 그건 세면대가 아니라, 욕조의 샤워기에서 나오는 쏴하는 소음 이었다. 민기는 밥을 먹다 말고,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부의 욕실은 방을 향해 열려 있었다. 세면대와 좌변기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서 울고 있는 그녀, 샤워기의 물소리가 그녀의 울컥대는 울음 소리를 막고는 있었지만, 그 흐르는 눈물 만큼이나 세차게 뿜어대지는 못하고 있었다.
‘문 닫고 가서 밥 쳐먹어. 쪽 팔리게…….여자 우는 거 첨 보니? 개쇄끼….남의 눈에 눈물 짜게 하고 지랄이야……’
민기는 조용히 욕실의 문을 닫고서 식탁으로 돌아왔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민기는 이미 식욕을 잃기는 했어도, 자기의 밥그릇에 남산 만큼이나 수북하게 퍼담은 그 밥을 꾸역꾸역 먹어치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식탁으로 돌아 온 그녀는 울컥대지도 않는지, 맹물 삼키듯이, 소주를 병나발을 불어댔다.
‘내가 있는 게 불편하니? 그런 거니?’
‘아니, 그게 아니고….내가 못나서 그렇지…..미친 년따우, 안될 거 뻔히 알면서……’
‘그래도 그렇지 빈 속에…..밥 정말 맛있다. 찌게도 그만이고…솜씨는 여전해….’
‘맛있게 먹어주니……., 정말이지……. 좋다.’
오랜만에 걸진 단어가 빠진 그녀의 반가운 일성. 퉁퉁 부어버린 눈자위 사이로 그녀의 웃음이 퍼지는 도중에 딸깍하고 현관이 열렸다. 빈 속에 술기운이 도는지, 그녀가 일어나려다 비틀하면서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자기가 나가겠다며, 민기가 발딱 일어났다.
‘야, 이 씨벌 넘들아! 누님 집 들어올 때는 문 따고 들어오지 말랬쥐? 니들이 무신 도둑괭이냐?’
집 안으로 들어서는 세 남자를 두고, 희진이가 소리쳤다.
‘누님, 우리들 왔수! 집안이 왜 이렇게 어두워? 누님 요새 생활 많이 어렵수? 불들은 왜 끄고 있대? 밥 먹다 말고 일 벌리남?’
‘저 쇄끼는 아가리만 뗐다하면, 저 놈의 씹떡질 소리….내가 미쳐…..어여 거기들 걸쳐.’
집안으로 들어선 세 남자는 자기 집처럼, 거실로 가서 소파에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애 였지만, 유달리 체격이 건장한 나머지는 자신과 거의 엇비슷한 연배로 보이고 있었지만, 체격으로 인해서 그렇게 보인다고 여겨졌다. 민기는 인사를 나누기에도, 그렇다고 마냥 서 있기에도 엉거주춤한 상황속에 있었다.
‘인사해…내가 아는 애들이야. 야! 이 누님, 술이 슬슬 도니끼니, 너그들 끼리 호구조사 해라…꺽 끄윽…’
서 있던 민기에게 앉아 있던 남자들 중에서 가장 어려 뵈는 젊은이가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아까 누님이 전화 때렸던 일슙니다. 제가 일슈고, 저기 앉아 있는 아그가 이슈, 제일 연세 있으신 분이 삼슙니다.’
‘이름이 좀….’
‘이름이요? 모두 손으로 한가락들 한다고 해서 손 수자를 붙여서 일수, 이수, 삼수 라고 했는데, 그냥 수라고 붙이니까, 다들 대학 시험치다 낙방한 인간들로 알더라구여. 그래서 발음을 쫌 옆으로 새게시리 슈라고 바꿨죠. 저는 손으로 못하는 게, 모르는 거 빼고는 없져. 컴터, 열쇠따기, 도청, 헥킹, 공문서 위조등등이 제 전문이구여, 이슈는 전공이 운짱, 삼슈형은 손날이 전공이져. 아마 총알보다 몸이 더 빨리 날아갈 걸여? 몸 전체가 칼날 이라고 봐야져. 그렇다고 칼을 차고 다니는 건 절때 아니고….낄낄……우리 셋을 가리켜, 슈샤인 보이즈라고 해여. 어디에고 적을 두진 않았지만, 프리랜서로 상종가 때리고는 있져. 돈 받고 이 짓 허기는 해도….헐…’
‘근데, 운전은 뭐하러?’
‘뭘 모르시네. 자동차 추격전이 서울 한복판 이라고 없을 거 같어여? 쟤 저래뵈도, 끌고 댕기는 자동차 마다 기깔나여. 앞으로 도움 꽤나 받으실 껄여? 누님…..우리 왔는데, 종합선물 세트 쫌 돌립시다?’
‘종합선물 이라니?’
‘모르셨어여?….그게…’
‘입닥쳐! 어여 방으로들 들어가!’
희진이의 고함에 세 남자는 쫓겨 들어가듯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비틀대며, 그 방으로 따라 들어가는 희진.
‘곧 끝나….어린 애들이라 얼마 길지도 못해…..’
‘뭐 하려고?’
‘그냥 TV나 보고 있어…..소리 크게 해 놓고…..’
민기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네들을 위해서, 그들만을 위한, 희진이 던진 종합선물 세트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민기의 뒤를 봐 주면서, 당장 닥친 일을 해결할 때까지, 돈을 치르는 대신, 어느 때고 이렇게 쳐들어 와서, 즐탕하고 가겠다는 그들의 제안을 그녀가 받아들인 것일 게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는 방아쇠를 당긴 총알의 격발음 보다도 강렬하게 민기의 가슴을 때렸다. 그 잔음은 계속해서 민기의 귓가를 웅웅대며, 흔들었고, 거실로 돌아와 TV를 켜기는 했지만, 도대체 무얼 방송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간간히 크게 올려 놓은 볼륨을 뚫고서 그녀의 욕지기와 남자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확연하게 보이는 그 어지럽고, 음란한 환영들…..그 때였다.
‘쾅!’
다시금 뜻하지 않게 열린,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안방문이 열리고, 그 짧은 사이에, 온 몸 곳곳이 빨아댄 자죽으로 벌겋게 변한 그녀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체인 채로 벌벌 기듯이,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민기에게 가까스로 내미는 그 서랍 안의 보석함.
‘민기씨…..그거 봤지?......봤지?......본거지?......난 알 수 있어…..자기가 그걸 본 이상,….. 내 분신 같은 그걸 옆에 두고…….. 그 짓을 할 수는 없어서……미친년 따우….악!’
‘뭐하우? 누님, 놀다말고? 일은 일이고, 선급금은 지불해야 될 꺼 아니겠수? 저 진저리치게사랑하는 유부남, 씹쇄끼 보호해 주려면 말이우? 낄낄낄…..’
또다시 벌거벗은 그녀를 향해 좇대가리를 있는대로 세운 채로, 뒤에서 달겨든 세 남자는 아귀다툼 하듯이, 발버둥치는 그녀를 나꿔 채서는, 방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다. 민기의 손에 남은 그 작은 보석함…..민기는 뚜껑을 열었다. 공중으로 피어 오르는 씁쓸한 냄새. 그 냄새도 잠깐, 오르골은 지대로의 역할을 위해 음조를 흘리기 시작하고…..철썩대는 소리가 마치 태풍의 끝자락 처럼, 온 집안을 흔들면서 민기의 가슴을 후려쳤다. 그녀의 신음은 강약도 없이, 벌어진 살껍질이 벗겨지는 듯, 날카로운 아픔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들은 민기에게 똑똑히 보여 주려는 듯이,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민기를 바라보며, 히죽대는 것도 모자라, 뱀처럼 길게 빼버린 혓바닥으로, 민기를 힐끔대며, 그녀의 피부를 온통 빨아자실 것처럼 쓸어대는 그 능욕…..이미 그녀의 온몸은 손바닥으로, 허리로 쳐대는 압박으로 인해, 감각을 잃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비명조차 자지러 지는 건, 아마도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으로 가고 있음 일테고….. 오르골에서 작은 음률이 실내로 퍼지면서, 열려진 방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그녀의 흐느낌과 남자들의 환호성, 씩씩대는 격한 호흡들이 뒤 엉키고 있었다. 그 불협화음 속에서 풀린 시선을 끝내, 밖으로 향하고, 시달림을 당하는 그녀의 모습을 민기는 그냥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비명도 지르지 못할만큼, 커다란 좇대를 입안에 담은 채로 마냥 울고 있었다. 그건 쾌락 때문도, 아픔 때문도 아니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긴 해도, 끝내 손 끝에서 놓치 못하는 연인을 위해, 몸을 내던져야 하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도 아니었다. 그건 민기를 향해, 다가가고 싶은, 알아주지 않아도 영원히 곁에서 숨 죽이듯이 머물고 싶은 그녀의 바램이었다. 그 날 밤, 민기는 그녀와 수천번도 더 살을 섞고 있었고, 그녀의 울고 있는 충혈된 눈동자 이긴 했어도, 그 안에서 민기는 자신이 담기워져, 녹아드는 모습에 보석함을 붙들고 내내 울 수밖에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