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 7부
관리자
근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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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14:04
(7) 신록 예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제목이 아니던가?)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윗집이 이사를 가고 새 사람이 이사를 왔다.
아파트에서 그런 일이야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인데 왜 그 얘기를 하는가 하면 새로 이사를 오는 사람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라는 것 때문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도대체 가물가물했다.
이삿짐을 올리느라 분주한 옆모습을 지켜보다 꾸벅 인사부터 하고 그녀를 도왔다.
그녀도 내가 눈에 익은 양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나는 바로 아래층에 산다고 소개를 하자 "우리 어디서 한번 뵌 듯 하죠?"라 말하는 투에서 그녀가 누군지 떠오른 거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 지하 술집의 그 여인이 분명했다.
화장을 지우니 전혀 딴 사람이다.
훤칠한 키에 미인이다.
"장사는 잘 되세요?" 묻자 "요즘 같은 불경기에 장사 잘된다 하면 빨갱이라 한다지요!"라 말했다.
실은 나도 장사를 한다고 털어놓은 뒤 이러다 굶어죽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여인은 다시 한번 악수를 청해오며 위아래이고 하니 언니 동생처럼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날 내내 여인의 이사를 돕느라 위층에 머물렀다.
풀어둔 짐 중에 아이 둘과 여인이 찍은 크다란 사진이 거실 벽에 걸렸는데 사내만 둘이었다. 작은애 인 듯한 아이는 줄곧 우릴 돕고 있었고, 큰애가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불과 며칠 전 군 입대를 했다한다.
큰방에 푼 짐 중에 화장대 앞에 놓을 자그만 액자를 발견했는데 돌아가셨다는 남편과 찍은 생전의 부부사진 같았다.
여인 못지 않게 남자도 미남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각이 진 얼굴이 군인 같기도 하여 물었더니 경찰공무원이었다 했다.
경찰대학을 나온 고급 경찰공무원으로 제법 고위직까지 올랐단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를 당해 그는 떠나고, 이때껏 그가 남긴 유족 연금과 보험금으로 살았다 한다.
그가 떠난 후 여인은 전공(교육학)을 살려 IMF가 터지기 전까지 학원을 운영했단다. 그런데 건물주가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내는 바람에 건물은 저당이 잡히고 졸지에 쫓겨날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전세금조차 한 푼 찾을 수 없었다 한다.
무슨 법이 그렇냐고 쌍방 인감도장이 선명한 전세계약서를 들고 알만한 지인들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온갖 수를 다 써봤지만 허사였다 한다.
남편만 살아 있었어도 그렇게 억울하게 당하진 않았을 텐데...
여인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그래서 삶의 맨 밑바닥이라 하는 물장사까지 하게 되었구나...
그날 초면이었지만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았는데... 내가 다소 직업에 편견을 가지지 않았나 미안하기도 했다.
짐이 모두 풀리고... 정리도 대충 끝나고... 저녁으로 시켜온 잡채밥을 함께 먹으며 맥주도 한잔 나누었다.
우리가 언니 동생 하는 사이 아이들도 어느 새 형 아우 하고 있었다.
언니가 없는 나... 형이 없는 아들... 오랜만에 들뜬 형제애에 젖어 있었다.
다음 날부터 둘이 만나기는 쉽지가 않았다.
내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는 반면, 언니는 저녁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니까.
그리고 가끔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날 아이의 아침은 내가 챙겨주어야 했다.
그런 어느 날이던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핸드폰에 "천사야! 오늘도 좀 부탁한다!"는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천사"는 그날 밤 그 남자는 내 애인이 아니라 친오빠라 했더니, "넌 천사야!"하여 그때부터 붙여진 별명인데 그 후 메시지엔 늘 그렇게 썼다. 그리고 "부탁한다"는 자기 아들의 아침을 챙겨달라는 거다.
좀 늦은 거 같아 후닥닥 올라갔더니 애 방에 아이가 없었다. 벌써 갔나보다 하고 돌아 나오려는데 화장실에 인기척이 났다.
식탁을 보니 밥 먹은 흔적은 없고... 이제 일어나 씻나보다 여기고 밥을 차려 놓고 잠시 앉아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거였다.
시계를 보니 서둘러야 할 시간인데... 화장실 문을 똑똑 노크했다.
"엄마야...? 들어와!"
시간이 없는데... 5분만에 밥 먹고, 신발에 연기가 나도록 뛰어야 할 텐데...
그 생각에 와락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이는 태연하게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욕조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머리까지 푹 담그고...
어떻게 저렇게 태평일까?
혹시 내가 시계를 잘못 보았나? 고개를 빼 벽시계를 다시 보았다.
7시 58분... 분명히 8시 2분 전이 맞는데...
"얘! 2분 전이야! 지금 날아가도 지각일 거라고!!"
그때야 애가 욕조 속에서 고개를 빼 올리며 "아니, 아줌마???"하며 깜짝 놀라는 거였다.
나는 지금 시간을 한번 더 일러주었다.
"7시 58분 32초, 33초, 34초!"
그래서 일까? 앞을 털어 쥐고 후닥닥 욕조에 튀어나와 제 방으로 마구 뛰어가는 거였다.
걔가 지나간 자국마다 뚝뚝 흘린 물방울이 고양이 발자국처럼 남았다.
저럴 때 보면 사내아이들은 참 귀엽다. 그저 귀엽다. 내 아이 건 남의 아이 건...
통통한 엉덩이-사내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길어진다.-가 조금씩 거칠어져 가는 모습도 예쁘다.
미려한 조각상처럼 차가워져 가는 모습 또한 아름답다. 멋지다.
난 사내만 키워 사내아이만 예찬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사내아이가 왜 폭력적이 되고 야만성만 숭배하는 진저리치는 짐승으로 변하는지 모르겠다.
방금 언뜻 보았다.
숲 속에 은밀히 숨긴 야만성을... 그 치부를... 그 잠재력을...
아이가 옷을 껴입고 나오며 황급히 말했다.
"오늘 개교 기념일이라 학교 안 가요!"
"아, 그랬구나! 이 아줌마만 바빴네..."
아이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오히려 내가 그래야 할 텐데...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내가 꺼내 놓은 밥을 후닥닥 비운 그가 "잘 먹었습니다!" 딱 그 한 마디만 남기고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제 딴엔 놀란 모양이네... 조금 전 욕실 문을 두드리자 "엄마야...? 들어와!"한 걸로 보면 제 엄마에겐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인데... 요 녀석이 차별하네?
차별하여 기분 나쁘다는 말보다 호기심이 동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다시 벽시계를 올려보다 깜짝 놀라 이번엔 아래층으로 쏜살같이 뛰어 내려왔다.
옷까지 챙겨 입은 아들이 막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퉁한 아들의 볼에다 뽀뽀를 해주고 엉덩이를 툭툭 쳐 배웅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나는 소파에 깊이 파 묻혔다.
벌써 여름빛이 도는 아침 햇살이 얼굴을 핥아대자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주방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아들이 먹다 만 밥을 몇 숟갈 떠 넣으며 뒷베란다 밖을 내다보니 한창 물오른 신록들이 계단이며 담이며 건물의 지붕까지도 마구잡이로 타고 오르는 걸 볼 수 있다.
신록이란 저렇게 용감하여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신록들은 너무 많은 걸 가림 하여 키우는 건 아닐까?
벌써 가을이다.
신록이 시들고 있다.
사건 위주로 글을 쓰다보니 이야기의 전개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생긴다는 건 어쩔 수 없다. 역사적 사서를 쓰더라도 전후 흐름의 끊김은 어쩔 수 없다. 하물며......
흔히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하지만 사실은 여자의 계절이다.
여자의 방황이 더 많은 계절이다.
보다 정확히 얘길 하자면 봄엔 한창 물오른 처녀들이 치마 밑으로 기어드는 봄바람에 넋을 잃는 계절이지만, 가을이면 스산한 가을바람이 물 빠진 중년 여성들의 가슴에 구멍을 뻥뻥 뚫어놓는 계절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중년...
물 빠진 중년이다.
거기다 구멍을 막아줄 남자도 없는 중년이다.
함에도 구멍을 더 뚫으려 부는 바람... 뻥뻥 다 뚫어 놓으려 부는 바람...
그 바람이 내게 불었다.
위층 언니가 남자를 하나 소개한 거다.
상처를 한지 3년이고 어느 중견기업의 부장이란다.
아이는 딸 하나이고 내 아들보다 두 살 아래란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위라 했다.
모든 조건이 호 조건이다. 일부러 맞추래도 그렇게 못 맞출 거다.
그런데 문제는 언니의 술집에 1년 여 드나들었단다.
누님! 누님! 하며 드나들었단다.
"그랬다면 언니와 나와 구멍동서 하잔 말야?"라는 막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자꾸 찾아오는 거다.
내 옷가게로 딸 옷 산다며 사고 또 사고 자꾸 오는 거다.
그래서 내 분명한 의사를 전하려...
언니에게 해온 청을 정중히 거절하려고... 어려운 자리를 마련했는데...
왁자한 식사 중에는 차마 말을 못 꺼내고...
분위기가 너무 소란스러워 다음 장소로 미루었는데...
2차로 간 나이트에선 더욱 못하고...
돌아 나오는 택시 안에서 꺼낼 수도 없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하고 싶다한 건데...
어딘지 모를 익숙한 대접을 받으며...
내 말에 맞장구를 치는 분위기도 느끼며... 어떤 말을 전했는지 기억이 없다.
얼마나 정중히 거절했는지도 기억에 없다.
다만 귓속에 붙어 앵앵대던 거친 숨소리와
숭숭 뚫린 구멍을 쉴새 없이 드나들던 노련한 감각과
아직도 눈을 찔러대는 창백한 불빛의 까칠함......
눈보다 먼저 손을 떴다.
역시 까칠했다. 머리인가? 턱인가? 턱인 듯 했다.
곡선이 낯설다. 턱을 거쳐 귀로 가는 곡선이 도저히 낯설다.
눈을 떠야 한다.
아, 저 창백한 불빛이 싫다. 눈꺼풀까지 뚫고 들어온 저 까칠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떠야 한다. 누가 내 눈에다 이렇게 강한 접착제로 붙여 놓았나?
몸부림치다 펑! 하고 뚫린 눈!
튀밥기계에서처럼 펑! 하는 소리가 한동안 귀에 쟁했다.
적어도 기계에서 쏟아진 연기가 걷히는 순간까지는...
갑자기 오싹해지는 기분! 그 기분을 느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예리한 면도날이 지나간 뒤 잠시는 못 느끼지만 솟구치는 피를 보는 순간 뼈 밑부터 아려오는 통증을...
악! 소리를 지르려 했다.
저 구석에 열린 조그만 문으로 좌변기가 보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언니의 술집! 더 둘러보지 않아도 이미 익숙한 물건들이었다.
그 후에도 몇 번 술 마시러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다!
어젯밤 검은 양복에 나비 타이까지 매고 나와 기사도란 기사도는 다 발휘하던 그 남자가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지럽게 눌린 이불 속을 뒤져 치마부터 껴입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마지막으로 간 나이트는 여기서 반대 방향인데...
아, 택시 안에서... 필름이 끊겼다 이어졌다 했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택시를 태워 여기까지 날 데리고 온 모양이다.
음침한, 모르는 곳이었다면 내가 거절했을 텐데 여긴 너무 익숙한 곳이라 거절(반항이 맞을지도 모르겠다)하지 않았을 거고, 익숙해서 많이 마셨을 거고, 그래서 저 남자의 작업은 수월했을 것이다.
날 저 짐승에게 버려 두고 언니는 어디를 갔단 말인가?
블라우스를 찾아 걸친 뒤 문 밖으로 나왔다.
혹시 테이블에 언니가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으나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들어가 내 흔적들을 찾아 모조리 없앤 뒤 불을 끄고 조용히 나왔다.
다음날 나는 가게를 못 갔다.
애를 보내고 한숨 자고 일어나 술은 깼으나 뻐개지는 머리... 아랫도리에 느껴지는 통증...
거기다 그 남자와 언니에 대한 불쾌함... 등등이 나를 괴롭혔다.
점심때쯤 되었을까? 언니가 내려왔다.
나는 무작정 화부터 냈다.
나를 어떻게 봤냐고...?
어떻게 그런 남자에게 날 버려 두고 갈 수 있냐고?
언니에게 너무너무 실망했다고... 그런데 되려 내게 화를 내는 거였다.
도대체 이 언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술집 작부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냐고?
너나 처신 똑바로 하라는 둥 잘못하단 싸움이 일어날 거 같았다.
난 무조건 영문을 모르겠다며 자초지종부터 설명해달라 했더니...
둘 모두 많이 취했는데 특히 내가 더 취해 찾아와선 술 내놓아라길래 술을 줬더니
내가 구멍동서 하자는 수작이냐며 따지더란 거다.
얼마나 황당하던지... 그 남자는 그간 내 손끝도 한번 안 잡은 신사 중 신사 같아 소개시켜줬더니... 그렇게 옥신각신 했다는 거다.
그래도 진심은 아니겠지 여겨 언니가 먼저 남자에게 사죄하고 오늘 약주를 제법 하셨는데 다음에 또 만나는 게 좋지 않겠느냐 했더니 내가 펄쩍펄쩍 뛰더라는 거다.
"나 오늘 집에 안 갈 거야! 안 갈 거야!"라면서...
하는 수 없이 불쌍한 동생 잘 부탁한다며 나왔다는 거다.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그랬다니... 전혀 기억에 없는데...
오히려 기억에 없다는 것이 다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이라도 기억에 남아 있다면 얼마나 민망할까?
지금도 민망하여 고개를 제대로 못 들겠는데...
"언니 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하 선생은?"(하 선생은 그 남자다)
"언니 가게에...!"
"아직?"
"몰라. 그냥 왔어. 살짝..."
언니가 전화를 들었다.
안 받는 모양이다.
"얘, 갔나봐!"
우린 함께 점심을 먹었고, 나는 두 시가 넘어 가게로 나왔다.
가게 앞에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보나마나 그 남자가 보낸 거겠지...
언제 일어나 이런 거까지 챙겼나?
그 남자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 어느새 호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남자가 맞았다. 꽃 속에 이런 쪽지가 끼어져 있었다.
"불은 홀로 타지 않습니다. 그대는 타서 꽃이 되소서! 재는 내가 되겠나이다! -하진봉"
그만한 일에 갑자기 보고 싶다.
언제 제대로 보기나 했던가?
전라로 누운 모습을 보고도 바퀴벌레 보듯 피해 나오지 않았던가?
코가 있던가? 입이 있던가? 귀가 있던가?
목 아래... 가슴 아래... 배꼽 아래... 가장 중요한 풀무는 있던가?
잘 생긴 풀무는 붙어 있더냐고......?
지금이라도 나타난다면 그곳에 뽀뽀를 해주고 싶다.
그곳에 내 이름을 새겨주고 싶다.
아아 보고 싶다. 미치도록 보고 싶다.
미치도록 핥아주고 싶다.
외롭다.
이럴수록 더 외로운 거다.
꼭 그 시절 같다.
그 머저리에게 홀딱 빠져있던 그때 같다.
오후 늦은 시간까지 손님 한 사람 오지 않고...
기다리던 그 사람도 오지 않고...
기다리던 전화기도 울리지 않고...
문 밖엔 황량한 바람만 불고 있었다.
오후 내내 그가 갖다두고 간 꽃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래도 외로워... 그래도 도무지 외로워... 손님 옷 갈아입는 탈의실로 들어가 어젯밤 그가 비볐을 두덩의 털을 빗으로 빗기며...
자위를 했다. (이게 내가 최초로 경험한 자위 방법이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윗집이 이사를 가고 새 사람이 이사를 왔다.
아파트에서 그런 일이야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인데 왜 그 얘기를 하는가 하면 새로 이사를 오는 사람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라는 것 때문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도대체 가물가물했다.
이삿짐을 올리느라 분주한 옆모습을 지켜보다 꾸벅 인사부터 하고 그녀를 도왔다.
그녀도 내가 눈에 익은 양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나는 바로 아래층에 산다고 소개를 하자 "우리 어디서 한번 뵌 듯 하죠?"라 말하는 투에서 그녀가 누군지 떠오른 거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 지하 술집의 그 여인이 분명했다.
화장을 지우니 전혀 딴 사람이다.
훤칠한 키에 미인이다.
"장사는 잘 되세요?" 묻자 "요즘 같은 불경기에 장사 잘된다 하면 빨갱이라 한다지요!"라 말했다.
실은 나도 장사를 한다고 털어놓은 뒤 이러다 굶어죽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여인은 다시 한번 악수를 청해오며 위아래이고 하니 언니 동생처럼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날 내내 여인의 이사를 돕느라 위층에 머물렀다.
풀어둔 짐 중에 아이 둘과 여인이 찍은 크다란 사진이 거실 벽에 걸렸는데 사내만 둘이었다. 작은애 인 듯한 아이는 줄곧 우릴 돕고 있었고, 큰애가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불과 며칠 전 군 입대를 했다한다.
큰방에 푼 짐 중에 화장대 앞에 놓을 자그만 액자를 발견했는데 돌아가셨다는 남편과 찍은 생전의 부부사진 같았다.
여인 못지 않게 남자도 미남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각이 진 얼굴이 군인 같기도 하여 물었더니 경찰공무원이었다 했다.
경찰대학을 나온 고급 경찰공무원으로 제법 고위직까지 올랐단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를 당해 그는 떠나고, 이때껏 그가 남긴 유족 연금과 보험금으로 살았다 한다.
그가 떠난 후 여인은 전공(교육학)을 살려 IMF가 터지기 전까지 학원을 운영했단다. 그런데 건물주가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내는 바람에 건물은 저당이 잡히고 졸지에 쫓겨날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전세금조차 한 푼 찾을 수 없었다 한다.
무슨 법이 그렇냐고 쌍방 인감도장이 선명한 전세계약서를 들고 알만한 지인들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온갖 수를 다 써봤지만 허사였다 한다.
남편만 살아 있었어도 그렇게 억울하게 당하진 않았을 텐데...
여인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그래서 삶의 맨 밑바닥이라 하는 물장사까지 하게 되었구나...
그날 초면이었지만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았는데... 내가 다소 직업에 편견을 가지지 않았나 미안하기도 했다.
짐이 모두 풀리고... 정리도 대충 끝나고... 저녁으로 시켜온 잡채밥을 함께 먹으며 맥주도 한잔 나누었다.
우리가 언니 동생 하는 사이 아이들도 어느 새 형 아우 하고 있었다.
언니가 없는 나... 형이 없는 아들... 오랜만에 들뜬 형제애에 젖어 있었다.
다음 날부터 둘이 만나기는 쉽지가 않았다.
내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는 반면, 언니는 저녁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니까.
그리고 가끔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날 아이의 아침은 내가 챙겨주어야 했다.
그런 어느 날이던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핸드폰에 "천사야! 오늘도 좀 부탁한다!"는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천사"는 그날 밤 그 남자는 내 애인이 아니라 친오빠라 했더니, "넌 천사야!"하여 그때부터 붙여진 별명인데 그 후 메시지엔 늘 그렇게 썼다. 그리고 "부탁한다"는 자기 아들의 아침을 챙겨달라는 거다.
좀 늦은 거 같아 후닥닥 올라갔더니 애 방에 아이가 없었다. 벌써 갔나보다 하고 돌아 나오려는데 화장실에 인기척이 났다.
식탁을 보니 밥 먹은 흔적은 없고... 이제 일어나 씻나보다 여기고 밥을 차려 놓고 잠시 앉아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거였다.
시계를 보니 서둘러야 할 시간인데... 화장실 문을 똑똑 노크했다.
"엄마야...? 들어와!"
시간이 없는데... 5분만에 밥 먹고, 신발에 연기가 나도록 뛰어야 할 텐데...
그 생각에 와락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이는 태연하게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욕조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머리까지 푹 담그고...
어떻게 저렇게 태평일까?
혹시 내가 시계를 잘못 보았나? 고개를 빼 벽시계를 다시 보았다.
7시 58분... 분명히 8시 2분 전이 맞는데...
"얘! 2분 전이야! 지금 날아가도 지각일 거라고!!"
그때야 애가 욕조 속에서 고개를 빼 올리며 "아니, 아줌마???"하며 깜짝 놀라는 거였다.
나는 지금 시간을 한번 더 일러주었다.
"7시 58분 32초, 33초, 34초!"
그래서 일까? 앞을 털어 쥐고 후닥닥 욕조에 튀어나와 제 방으로 마구 뛰어가는 거였다.
걔가 지나간 자국마다 뚝뚝 흘린 물방울이 고양이 발자국처럼 남았다.
저럴 때 보면 사내아이들은 참 귀엽다. 그저 귀엽다. 내 아이 건 남의 아이 건...
통통한 엉덩이-사내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길어진다.-가 조금씩 거칠어져 가는 모습도 예쁘다.
미려한 조각상처럼 차가워져 가는 모습 또한 아름답다. 멋지다.
난 사내만 키워 사내아이만 예찬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사내아이가 왜 폭력적이 되고 야만성만 숭배하는 진저리치는 짐승으로 변하는지 모르겠다.
방금 언뜻 보았다.
숲 속에 은밀히 숨긴 야만성을... 그 치부를... 그 잠재력을...
아이가 옷을 껴입고 나오며 황급히 말했다.
"오늘 개교 기념일이라 학교 안 가요!"
"아, 그랬구나! 이 아줌마만 바빴네..."
아이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오히려 내가 그래야 할 텐데...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내가 꺼내 놓은 밥을 후닥닥 비운 그가 "잘 먹었습니다!" 딱 그 한 마디만 남기고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제 딴엔 놀란 모양이네... 조금 전 욕실 문을 두드리자 "엄마야...? 들어와!"한 걸로 보면 제 엄마에겐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인데... 요 녀석이 차별하네?
차별하여 기분 나쁘다는 말보다 호기심이 동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다시 벽시계를 올려보다 깜짝 놀라 이번엔 아래층으로 쏜살같이 뛰어 내려왔다.
옷까지 챙겨 입은 아들이 막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퉁한 아들의 볼에다 뽀뽀를 해주고 엉덩이를 툭툭 쳐 배웅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나는 소파에 깊이 파 묻혔다.
벌써 여름빛이 도는 아침 햇살이 얼굴을 핥아대자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주방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아들이 먹다 만 밥을 몇 숟갈 떠 넣으며 뒷베란다 밖을 내다보니 한창 물오른 신록들이 계단이며 담이며 건물의 지붕까지도 마구잡이로 타고 오르는 걸 볼 수 있다.
신록이란 저렇게 용감하여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신록들은 너무 많은 걸 가림 하여 키우는 건 아닐까?
벌써 가을이다.
신록이 시들고 있다.
사건 위주로 글을 쓰다보니 이야기의 전개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생긴다는 건 어쩔 수 없다. 역사적 사서를 쓰더라도 전후 흐름의 끊김은 어쩔 수 없다. 하물며......
흔히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하지만 사실은 여자의 계절이다.
여자의 방황이 더 많은 계절이다.
보다 정확히 얘길 하자면 봄엔 한창 물오른 처녀들이 치마 밑으로 기어드는 봄바람에 넋을 잃는 계절이지만, 가을이면 스산한 가을바람이 물 빠진 중년 여성들의 가슴에 구멍을 뻥뻥 뚫어놓는 계절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중년...
물 빠진 중년이다.
거기다 구멍을 막아줄 남자도 없는 중년이다.
함에도 구멍을 더 뚫으려 부는 바람... 뻥뻥 다 뚫어 놓으려 부는 바람...
그 바람이 내게 불었다.
위층 언니가 남자를 하나 소개한 거다.
상처를 한지 3년이고 어느 중견기업의 부장이란다.
아이는 딸 하나이고 내 아들보다 두 살 아래란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위라 했다.
모든 조건이 호 조건이다. 일부러 맞추래도 그렇게 못 맞출 거다.
그런데 문제는 언니의 술집에 1년 여 드나들었단다.
누님! 누님! 하며 드나들었단다.
"그랬다면 언니와 나와 구멍동서 하잔 말야?"라는 막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자꾸 찾아오는 거다.
내 옷가게로 딸 옷 산다며 사고 또 사고 자꾸 오는 거다.
그래서 내 분명한 의사를 전하려...
언니에게 해온 청을 정중히 거절하려고... 어려운 자리를 마련했는데...
왁자한 식사 중에는 차마 말을 못 꺼내고...
분위기가 너무 소란스러워 다음 장소로 미루었는데...
2차로 간 나이트에선 더욱 못하고...
돌아 나오는 택시 안에서 꺼낼 수도 없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하고 싶다한 건데...
어딘지 모를 익숙한 대접을 받으며...
내 말에 맞장구를 치는 분위기도 느끼며... 어떤 말을 전했는지 기억이 없다.
얼마나 정중히 거절했는지도 기억에 없다.
다만 귓속에 붙어 앵앵대던 거친 숨소리와
숭숭 뚫린 구멍을 쉴새 없이 드나들던 노련한 감각과
아직도 눈을 찔러대는 창백한 불빛의 까칠함......
눈보다 먼저 손을 떴다.
역시 까칠했다. 머리인가? 턱인가? 턱인 듯 했다.
곡선이 낯설다. 턱을 거쳐 귀로 가는 곡선이 도저히 낯설다.
눈을 떠야 한다.
아, 저 창백한 불빛이 싫다. 눈꺼풀까지 뚫고 들어온 저 까칠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떠야 한다. 누가 내 눈에다 이렇게 강한 접착제로 붙여 놓았나?
몸부림치다 펑! 하고 뚫린 눈!
튀밥기계에서처럼 펑! 하는 소리가 한동안 귀에 쟁했다.
적어도 기계에서 쏟아진 연기가 걷히는 순간까지는...
갑자기 오싹해지는 기분! 그 기분을 느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예리한 면도날이 지나간 뒤 잠시는 못 느끼지만 솟구치는 피를 보는 순간 뼈 밑부터 아려오는 통증을...
악! 소리를 지르려 했다.
저 구석에 열린 조그만 문으로 좌변기가 보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언니의 술집! 더 둘러보지 않아도 이미 익숙한 물건들이었다.
그 후에도 몇 번 술 마시러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다!
어젯밤 검은 양복에 나비 타이까지 매고 나와 기사도란 기사도는 다 발휘하던 그 남자가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지럽게 눌린 이불 속을 뒤져 치마부터 껴입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마지막으로 간 나이트는 여기서 반대 방향인데...
아, 택시 안에서... 필름이 끊겼다 이어졌다 했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택시를 태워 여기까지 날 데리고 온 모양이다.
음침한, 모르는 곳이었다면 내가 거절했을 텐데 여긴 너무 익숙한 곳이라 거절(반항이 맞을지도 모르겠다)하지 않았을 거고, 익숙해서 많이 마셨을 거고, 그래서 저 남자의 작업은 수월했을 것이다.
날 저 짐승에게 버려 두고 언니는 어디를 갔단 말인가?
블라우스를 찾아 걸친 뒤 문 밖으로 나왔다.
혹시 테이블에 언니가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으나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들어가 내 흔적들을 찾아 모조리 없앤 뒤 불을 끄고 조용히 나왔다.
다음날 나는 가게를 못 갔다.
애를 보내고 한숨 자고 일어나 술은 깼으나 뻐개지는 머리... 아랫도리에 느껴지는 통증...
거기다 그 남자와 언니에 대한 불쾌함... 등등이 나를 괴롭혔다.
점심때쯤 되었을까? 언니가 내려왔다.
나는 무작정 화부터 냈다.
나를 어떻게 봤냐고...?
어떻게 그런 남자에게 날 버려 두고 갈 수 있냐고?
언니에게 너무너무 실망했다고... 그런데 되려 내게 화를 내는 거였다.
도대체 이 언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술집 작부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냐고?
너나 처신 똑바로 하라는 둥 잘못하단 싸움이 일어날 거 같았다.
난 무조건 영문을 모르겠다며 자초지종부터 설명해달라 했더니...
둘 모두 많이 취했는데 특히 내가 더 취해 찾아와선 술 내놓아라길래 술을 줬더니
내가 구멍동서 하자는 수작이냐며 따지더란 거다.
얼마나 황당하던지... 그 남자는 그간 내 손끝도 한번 안 잡은 신사 중 신사 같아 소개시켜줬더니... 그렇게 옥신각신 했다는 거다.
그래도 진심은 아니겠지 여겨 언니가 먼저 남자에게 사죄하고 오늘 약주를 제법 하셨는데 다음에 또 만나는 게 좋지 않겠느냐 했더니 내가 펄쩍펄쩍 뛰더라는 거다.
"나 오늘 집에 안 갈 거야! 안 갈 거야!"라면서...
하는 수 없이 불쌍한 동생 잘 부탁한다며 나왔다는 거다.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그랬다니... 전혀 기억에 없는데...
오히려 기억에 없다는 것이 다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이라도 기억에 남아 있다면 얼마나 민망할까?
지금도 민망하여 고개를 제대로 못 들겠는데...
"언니 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하 선생은?"(하 선생은 그 남자다)
"언니 가게에...!"
"아직?"
"몰라. 그냥 왔어. 살짝..."
언니가 전화를 들었다.
안 받는 모양이다.
"얘, 갔나봐!"
우린 함께 점심을 먹었고, 나는 두 시가 넘어 가게로 나왔다.
가게 앞에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보나마나 그 남자가 보낸 거겠지...
언제 일어나 이런 거까지 챙겼나?
그 남자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 어느새 호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남자가 맞았다. 꽃 속에 이런 쪽지가 끼어져 있었다.
"불은 홀로 타지 않습니다. 그대는 타서 꽃이 되소서! 재는 내가 되겠나이다! -하진봉"
그만한 일에 갑자기 보고 싶다.
언제 제대로 보기나 했던가?
전라로 누운 모습을 보고도 바퀴벌레 보듯 피해 나오지 않았던가?
코가 있던가? 입이 있던가? 귀가 있던가?
목 아래... 가슴 아래... 배꼽 아래... 가장 중요한 풀무는 있던가?
잘 생긴 풀무는 붙어 있더냐고......?
지금이라도 나타난다면 그곳에 뽀뽀를 해주고 싶다.
그곳에 내 이름을 새겨주고 싶다.
아아 보고 싶다. 미치도록 보고 싶다.
미치도록 핥아주고 싶다.
외롭다.
이럴수록 더 외로운 거다.
꼭 그 시절 같다.
그 머저리에게 홀딱 빠져있던 그때 같다.
오후 늦은 시간까지 손님 한 사람 오지 않고...
기다리던 그 사람도 오지 않고...
기다리던 전화기도 울리지 않고...
문 밖엔 황량한 바람만 불고 있었다.
오후 내내 그가 갖다두고 간 꽃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래도 외로워... 그래도 도무지 외로워... 손님 옷 갈아입는 탈의실로 들어가 어젯밤 그가 비볐을 두덩의 털을 빗으로 빗기며...
자위를 했다. (이게 내가 최초로 경험한 자위 방법이었다)